오래 전에 쓴 글이지만.....
여러분과 나누고 싶어 올립니다.
출처는 연세대 동문회보 2004년 봄 쯤입니다....
<이 한 권의 책-심산의 ‘마운틴 오딧세이’>
사랑도 돈도 희망도 없을 때
서평을 쓰는 것만큼 미친 짓도 없다.
이렇게 말하는 건 서평에 언급된 책을 잘 읽지 않는 버릇을 가진 필자
의 성격 때문이다. 차라리 무작정 서점에 들어가서 이리저리 책을 뒤적
이다 10여권을 안고 나오는 게 낫다고 생각한다.
책이 도대체 나에게 무엇을 줄 수 있을까?
책은 사랑도 주지 못하고, 돈도 주지 못한다. 알량한 마음의 평화나 흥
미를 주는 것도 그때뿐이다. 그러나 필자는, 사랑도 잃고 돈도 떨어졌
을 때, 희망마저 보이지 않는 다고 생각될때, 당연한 것처럼 심산의 '마운틴
오딧세이'를 펼쳐든다. 첫 다섯 페이지를 읽고 나면, 나도 모르게 ‘살아야겠다’는 생
각이 든다. 그리고 다음 다섯 페이지를 읽고 나면 ‘살거나 죽거나 그
게 그거’라는 생각이 든다. 책을 펼쳐든지 10분이 지날 무렵에는 아무
생각도 나지 않는다.
이 책의 저자는 전업작가다. 시나리오를 써서 상을 받기도 했고 또 그
걸로 돈을 벌기도 했다. 가끔은 히말라야로 달려가서 보름씩 묵었다 돌
아와서는, ‘이번엔 눈사태 때문에 죽을 뻔 했어’라고 태연히 말하는
팔자 좋은 글쟁이다.
이 책은 ‘산서(山書)에 대한 책’이다. 산서는 말 그대로 산에 대한
책이다. 산서들은, 저자의 표현을 빌자면, ‘시보다 시적이고, 소설보
다 드라마틱하며, 영화보다 흥미진진하고, 철학책보다 심오’하다. ‘마
운틴 오딧세이’는 따라서 ‘산에 대한 책들에 대한 책’이다. 그러나
단순히 산서에 대한 서평을 모아 놓은 글들이라고 하기엔 이 책이 담고
있는 관조의 폭이 너무 깊고 넓다. 그건 산을 이해하고 산을 사랑하는
산악인이면서, 인간을 이해하고 인간을 관찰해야하는 문학인의 시각을
동시에 가진 저자가 아니고서는 갖기 힘든 것일 게다.
이 책에는 수많은 등반인들이 소개된다. 그중 ‘우에무라 나오미’는
에베레스트를 초등한 에드문드 힐러리나 최초로 8000m급 고봉을 모두 오
른 라인홀트 메스너가 라이벌로 인정한 등반가였다. 그는 43세이던 1984
년 매킨리 산을 단독 등반한 직후 실종되었다. 세계 최초로 5대륙 최고
봉을 등반했고 남극점마저 정복한 사나이였다.
세계적인 모험가였던 그였지만, 직장에서 일을 하다 비행기 값만 마련
되면 미국이고 아프리카고 산으로 떠나버리기 일쑤였고, 단독으로 북극
탐험에 나섰을 때는 캐나다의 앤더슨 베이에서 만사를 제쳐놓고 낚시로
소일하며 한 여름을 보냈다. 전 세계인의 시선을 한 몸에 받는 클라이머
였지만 행색은 언제나 거지꼴이었고 음식은 빈한하다 못해 초라할 정도
였다. 왜 그랬을까?
산악인들은 대체로 산에 오르다 죽은 친구를 한 두명쯤 가지고 있다.
나오미 쯤 되면 그 수는 더 많을 수도 있다. 산악인들은 전장에 나선 군
인도 아니면서, 시속 300km로 달리는 카레이서도 아니면서, 항상 근처
에 죽음이 있다고 느낀다. 근처에 죽음이 있기 때문에 삶의 자잘한 이익
에 아웅다웅하지 않는다. 명예가 무엇이며 권력이 무엇이냐! 산에 오르
고 나서 마시는 막걸리 한 잔을 그들은, 수백억의 돈을 금고에 채워놓
고 마시는 위스키와 절대로 바꾸지 않는다. 목숨이 끊어지면 온 우주도
아무 소용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세상 사람들이 무어라 해도 산
에 오른다. 번듯한 직장, 멋진 애인, 보장된 미래....이런 것들은, 보이
는 것이라곤 흰 눈과 하늘 밖에 없는 히말라야에 올라본 사람에겐 보잘
것 없는 것들이다.
이 책은 우리에게 나오미처럼 ‘삶을 여행으로 받아들이는 자’가 되라
고 말한다. 그리고 자유롭고 유쾌하게 방랑하라고 은근히 부추긴다. 그
러나 난, 독자들이 그냥 계속 일상의 먼지에 파묻혀서 하루 하루를 고단
하고 신산하게 살아가길 바란다. 이 책을 읽기 전까지는.
- 명로진(탤런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