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산의 산, 그리고 사람<2> 하인리히 하러(1912-2006)편
20세기 등반사의 영욕, 하인리히 하러
하인리히 하러가 죽었다. 20세기 등반사의 영욕을 한 몸에 구현했던 이 희대의 풍운아가 2006년 1월 7일 자신의 고국인 오스트리아의 한 소도시에서 조용히 눈을 감았다. 향년 94세. 하지만 내게는 그의 부고가 여전히 낯설게만 느껴진다. 그는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라 믿었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그와 정반대다. 너무 이른 나이에 스타가 되어버린 사람들에게는 여생이 너무도 길다. 그래서 그가 죽었다는 사실보다 그가 최근까지 살아있었다는 사실이 더욱 놀랍게 느껴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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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사람들에게 하인리히 하러는 ‘전설 속의 영웅’이다. 전설의 무대는 물론 아이거(3.970m) 북벽이고, 전설의 기록은 두말 할 것도 없이 그가 남긴 책 ‘하얀 거미’이다. 우리 윗세대의 산악인들은 밤마다 ‘하얀 거미’를 품에 안고 아이거 북벽을 꿈꾸며 잠이 들곤 했다. 나 역시 아버지가 물려주신 ‘하얀 거미’를 겉장이 나달나달해질 때까지 읽고 또 읽으며 알프스 등반을 꿈꿔왔다.
나는 지금도 이 책의 몇 구절을 정확히 암송한다. “행복이란 무엇인가? 최후의 역량까지 쏟아붓는 것이다!” 확실히 하인리히 하러의 문장 속에는 산에 미친 청춘의 피를 끓어오르게 하는 마약과도 같은 성분이 있다. “거미의 눈사태는 우리들을 암벽으로부터 팽개치지 못했다. 그렇지만 눈사태는 최후까지 남아있던 것, 곧 개인적 허영심과 이기적인 야심을 말끔히 씻어버렸던 것이다. 이제 이 암벽에서는 오직 우정만이 영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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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등반사에 길이 남을 그의 업적은 물론 아이거 북벽의 초등(1938년)이다. 하지만 그의 삶과 명예에 대한 속 깊은 이해는 전후맥락에 대한 통찰을 필요로 한다. 하인리히 하러는 오스트리아 그라츠대학 지리학과 재학시절 국가대표 스키선수로서 1936년 베를린올림픽에 참가했을 만큼 뛰어난 체육 엘리트였다. 그가 대학 졸업 직후 아이거 북벽에 매달린 이유는 의외로 엉뚱하다. “나는 낭가파르밧(8,126m) 원정대원으로 선발되고 싶었다. 무명의 청년이 그런 국가적 프로젝트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아이거 북벽의 초등자가 되는 수밖에 없었다.”
에베레스트가 영국원정대 집념의 산이라면 낭가파르밧은 독일원정대 집념의 산이다. 독일은 그때까지 4차에 걸쳐 원정대를 파견했으나 무려 31명의 목숨을 잃었을 뿐 등정에는 성공하지 못하고 있었다. 하인리히 하러는 자신이 품었던 야심 그대로 5차 원정대원에 선발되어 낭가파르밧으로 향했다. 하지만 운명은 이쯤에서 예기치 못했던 방향으로 비약한다. 정찰을 마치고 돌아오던 중 제2차 세계대전이 터지는 바람에 영국군에게 체포되어 포로수용소에 수감된 것이다. 그가 이곳을 탈출하여 히말라야를 넘는 초인적인 대장정 끝에 도착한 나라가 바로 티벳이다. 그리고 그가 당시 소년이었던 달라이 라마와 함께 보낸 신비한 세월을 기록한 책이 바로 ‘티벳에서의 7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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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년에 출간된 ‘티벳에서의 7년’은 그를 일약 세계적인 작가로 급부상시키면서 부와 명예를 동시에 안겨주었다. 하인리히 하러는 그 열풍이 가라앉기 전 또 하나의 베스트셀러를 세상에 내놓는다. 바로 아이거 북벽 초등의 기록인 ‘하얀 거미’이다. 흔히 알려져 있는 것과는 반대로 이 책은 ‘티벳에서의 7년’의 출간 이후 5년, 그리고 실제의 등반 이후로는 무려 20년만인 1958년에 출간된 것이다. 이 두 권의 책으로 그는 남은 생애를 풍족하게 보내기에 충분하고도 남을 만큼의 부와 명예를 한 손에 거머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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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과정에서 본의 아니게 평가절하된 산악인이 바로 안데를 헤크마이어(1905-?)이다. 실제로 아이거 북벽 초등의 1등공신은 당시 뮌헨파의 대표주자로서 ‘12발 아이젠의 달인’이라 불리우던 이 사내였다. 그는 하러가 ‘하얀 거미’를 출간하기 9년 전인 1949년 자신의 저서 ‘알프스의 3대 북벽’을 통해 이 사실을 만천하에 알리기도 했다. 하지만 사람들은 ‘알프스의 3대 북벽’을 읽지 않고 ‘하얀 거미’를 읽었다. 그리고 사람들이 기억하는 아이거 북벽의 초등자는 안데를 헤크마이어가 아니라 하인리히 하러일 뿐이다. 왜? 그것이 바로 베스트셀러의 위력이다. 어떤 뜻에서 하인리히 하러는 산악인으로서가 아니라 작가로서 더욱 성공한 인물이라 평해야 옳을 듯하다.
하지만 문제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1997년 장 자크 아노 감독이 브래드 피트를 캐스팅하여 ‘티벳에서의 7년’을 영화화할 때 하인리히 하러의 명예는 급전직하한다. 오랫동안 쉬쉬하며 숨겨왔던 그의 나치 부역혐의가 만천하에 드러난 것이다. 오스트리아의 유력지 ‘슈테른’에 따르면 그는 아이거 북벽 등정 당시 나치친위대(SS) 소속이었으며 정상에서도 나치 깃발을 흔들려 했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그가 히틀러와 함께 찍은 사진은 ‘독일의 오스트리아 합병에 대한 합리화’의 도구로 폭 넓게 사용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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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우리는 한 시대의 한계를 본다. 알프스 3대 북벽의 초등경쟁, 더 나아가 히말라야 14좌의 초등경쟁에서 국가주의적 혹은 제국주의적 색채를 읽어내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역사의 격랑에 휘말린 26살의 앳된 청년 산악인에게 냉철한 정치적 입장을 요구하는 것이 무리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것 자체가 20세기 등반사의 태생적 한계일 수도 있다. 그 모든 영욕을 한 몸에 구현했던 하인리히 하러가 이제 세상을 떠났다. 한 시대가 저물어가는 느낌이다.
산악문학작가(www.simsanschoo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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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거 북벽과 하얀 거미
아이거(3,970m)는 스위스 알프스의 베르네 오버란트 산군에 속해 있는 바위산이다. 아이거 북벽은 이 산의 북측 절벽인데, 벽 밑둥에서 정상까지의 거리가 1,800m에 이른다. 세상에는 아이거보다 높은 산이 무수히 많고 아이거 북벽보다 긴 절벽도 무수히 많다. 하지만 아이거 북벽보다 더 유명한 등반대상지는 세상에 없다. 역사상 가장 많은 사망자를 속출해낸 곳으로서 흔히들 ‘클라이머의 공동묘지’라고 부른다.
하얀 거미는 아이거 북벽의 등반루트 중 한 지역을 일컫는 말이다. 흡사 거미 모양처럼 펼쳐져 있는 상습적인 눈사태 지역인데, 정상에 오르려면 이곳을 통과하지 않을 수 없다. 독일의 안데를 헤크마이어와 루드비히 푀르그, 오스트리아의 프리츠 카스파레크와 하인리히 하러는 1938년 7월 24일 이 지역에서 두 차례의 눈사태를 겪고도 기적적으로 살아남아 결국 아이거 북벽 초등에 성공한다. 20년이 지난 후 하인리히 하러가 출간한 산악문학 ‘하얀 거미’는 전세계에서 1천만권 이상이 판매되어 빌리언셀러가 되었다.
한국인 초등은 1979년 악우회의 윤대표와 허욱에 의하여 이루어졌다. 아이거 북벽 등반을 다루는 국내 산악문학 중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정광식의 ‘영광의 북벽’(1989)인데, 최근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전: 아이거 북벽’(2003)이라는 제목으로 재출간되었다.
[한국일보] 2006년 3월 9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