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너무 예뻤다. 단 한 순간의 곁눈질만으로도 발걸음을 멈춰 세우기에 충분했다. 열 여덟 혹은 열 아홉? 앳됨과 성숙함이 묘하게 교차된 표정이 신비롭기 그지없다. 나는 나도 모르게 발길을 돌려 그녀의 뒤를 쫓았다. 하늘거리는 붉은 원색의 원피스 안으로 슬며시 드러나는 볼륨 있는 몸피가 더 없이 고혹적이다. 그렇게 홀린 듯 넋을 잃고 따라가던 내 마음이 어느 순간 덜컹 내려앉았다. 그녀가 거리의 한복판에서 갑자기 멈춰선 것이다. 내가 뒤쫓고 있다는 것을 눈치챈 것일까? 나를 잠재적인 치한 쯤으로 여기고 있진 않을까? 나는 짐짓 아무렇지도 않게 그녀를 스쳐지나갔다. 하지만 도저히 그대로 사라져버릴 순 없었다. 용기를 내어 뒤를 돌아봤다. 그녀는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약간 숙인채 눈을 내리깔고 있었다. 도대체 갑자기 길 한복판에 멈추어서서 무얼하고 있담? 좀 더 담대해진 나는 말이라도 붙여볼 요량을 하고 그녀의 자태를 찬찬히 뜯어보았다. 그러다 다음 순간, 마치 득도라도 하듯 불현 듯, 그녀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깨달았다.
그녀의 발목 안쪽으로 연한 노란빛의 물줄기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오줌이다. 사타구니를 타고 내린 오줌은 발목의 끝에 이르러 절묘하게도 샌달을 건너뛰더니 흙바닥으로 흥건하게 스며들고 있었다. 실개울의 흐름이 잦아들 즈음 그녀의 동작이 또한 일품이다. 가볍게 진저리치듯 부르르 다리를 떨며 이내 걸음을 옮겨놓은 품새가 더 없이 우아했던 것이다. 움직이지 못한 건 나다. 나는 마치 망치로 얻어맞은 듯 멍한 상태가 되어 사라져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하릴없이 바라보고만 있었을 뿐이다. 그곳은 메인바자르였다. 그곳은 파하르간지의 번화가였다. 그곳은 인도였다.
인도의 화장실문화는 가히 충격적이다. 그들만의 문화에 대하여 뭐라 시비를 걸 생각은 추호도 없다. 다만 문명생활에 찌들어온 나로서는 그 동안 속없이 키워온 막연한 로맨티시즘이 단 한 순간에 사그라들어 버렸다는 사실을 고백할 뿐이다. 소위 한 나라의 수도라는 뉴델리의 번화가에서조차 사정이 이러하니 그곳에서 북쪽으로 700킬로미터 이상 떨어진 히말라야 산자락에 이르러서야 더 말 할 것도 없다. 하지만 도시에서는 충격적인 추문에 불과한 일들도 히말라야라는 대자연 속에서는 아름다운 추억이 되기도 한다. 바로 히말라얀 토일렛이다.
보름이 넘도록 인도 히말라야의 산자락을 쏘다니다가 돌아오니 지인들이 눈을 빛내며 묻는다. 도데체 거긴 왜 갔냐고. 그곳엔 무엇이 있냐고. 뭐가 제일 좋았냐고. 나는 겸연쩍게 어깨를 으쓱하며 답한다. 히말라얀 토일렛. 물론 천길 낭떠러지를 에돌아가는 옛 교역로도 좋았고, 뜽금없이 길을 끊어먹곤 했던 눈사태지역의 트래버스도 좋았으며, 인간 존재의 나약함을 단 한번의 눈맞춤으로 일깨워주던 저 장엄한 히말라야의 웅대한 자태도 좋았다. 하지만 오래도록 가슴을 따사롭게 하며 선명한 기억 속에 각인된 것은 히말라얀 토일렛이다.
난다 데비 트레킹은 고되다. 그 길은 문명의 저켠에 있다. 가령 에베레스트 트레킹이나 안나푸르나 트레킹과 견주어보면 이곳의 트레킹은 완전히 원시 속으로의 여행이다. 일반적인 트레킹 코스에서는 쉴곳마다 음식점과 여관을 겸한 롯지들이 즐비하다. 이곳에서 코카콜라를 마실 수도 있고 더운 물 샤워를 할 수도 있으며 화장실을 사용할 수도 있다. 하지만 난다 데비 트레킹 코스에는 아무 것도 없다. 황량한 대지 위에 텐트를 하나 쳐놓으면 그것으로 끝인 것이다. 화장실? 당연히 없다. 아니다. 천지사방이 모두 화장실이다. 히말라얀 토일렛이란 곧 따로 만들어진 화장실이 없다는 사실의 유쾌한 반어적 표현이다.
야영준비를 마치면 제일 먼저 하는 것이 히말라얀 토일렛의 경계를 정하는 일이다. 먼저 트레커와 포터들의 경계를 대별한다. 간단하다. 그저 손가락을 들어 저쪽은 포터용, 이쪽은 트레커용이라고 정하면 그뿐인 것이다. 그 다음 트레커들은 다시 그 광활한 대지를 반분한다. 저 위쪽은 여성용, 이 아래쪽은 남성용으로 나누는 것이다. 해가 지기 전에 사용하는 히말라얀 토일렛도 멋지긴 하다. 사방이 탁 트인 공간에서 히말라야의 풍광들을 만끽하며 앉아있는 것이 분명 호사이긴 하다. 하지만 언제 누가 능선 위로 불쑥 나타날지 몰라 편안한 마음으로 볼 일을 보기는 어렵다.
히말라얀 토일렛의 절정은 한밤중이다. 텐트 앞에 모닥불을 피워놓고 이야기꽃을 피우다가 뱃속에서 신호가 오면 슬그머니 자리를 뜬다. 모닥불에서 몇 발자국만 벗어나도 캄캄한 암흑 속이다. 이마 앞에 달아놓은 헤드랜턴의 불을 켠다. 곧게 뻗어나가는 일직선의 빛기둥이 흡사 <스타워즈>에 나오는 광선검 같다. 야영지로부터 멀리 떨어진 능선을 넘어간다. 커다란 바위가 하나쯤 앞을 가려주면 더욱 안심이 된다. 고개를 돌려 사위를 돌아본다. 검은 실루엣으로만 남아있는 산세가 그대로 대자연의 병풍이다. 이쯤이면 됐다. 바지를 내리고 쪼그려 앉으며 헤드랜턴을 끈다. 사위는 돌연 암흑 속에 잠기는데 저도 모르게 탄성이 나온다. 밤하늘에서 별들이 쏟아붓듯 떨어져내리는 것이다.
흡사 관(棺)처럼 만들어진 밀폐공간에서만 볼 일을 봐오던 사람에게 히말라얀 토일렛은 축복이다. 이곳에는 버튼만 내리면 밀려내려오는 수돗물이 없다. 쏴아하는 소리를 내며 빠져나간 자리에 물감처럼 번져드는 푸른 세정액도 없다. 대신 이곳에는 탁 트인 시야와 풀과 바람소리와 별빛이 있다. 배설 또한 당당한 삶의 일부분이며 대자연 속의 일상이라는 당연한 사실에 대한 전면적 긍정이 있다. 히말라얀 토일렛에서는 거침없는 자유와 해방감 그리고 육체의 긍정이 천지사방을 가득 메운다.
히말라얀 토일렛에서 일출을 본 적이 있다. 하얀 설산 너머로 타오르는 붉은 해가 경외스러웠다. 비바람이 몰아치는 히말라얀 토일렛도 있었다. 우산을 쓰고 앉았지만 궁둥이에 흩뿌려지던 찬 비가 더 없이 유쾌하고도 시원했었다. 폭설에 텐트가 무너져내린 다음날도 어김없이 히말라얀 토일렛에 갔다. 눈구덩이를 파헤치며 쪼그려앉을 때 문득 내가 한 마리 순한 짐승처럼 느껴졌었다. 불편하기는커녕 행복했던 기억이다. 그리고 이제 나는 도시로 돌아와 다시 철근과 콘크리트로 만들어진 밀폐공간 안에서 죄인이라도 되는 듯 몸을 숨긴다. 이 얼마나 옹색하고 비루하기 짝이 없는 삶의 방식인가? 그리하여 나는 오피스텔의 비좁아터진 화장실에 앉을 때마다 어쩔 수 없이 그 호쾌한 기상이 천지에 꿈틀거리던 히말라얀 토일렛의 탁 트인 자유를 그리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