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심산 등록일: 2006-05-15 17:05:48 IP ADRESS: *.254.86.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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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와 달이 뜨고 지고

 

 

    사랑에는 사람의 눈을 멀게 하는 힘이 있다. 산에 대한 사랑 역시 그렇다. 산에 대한 그리움이 지극하여 그와 떨어져 있는 순간들마저 힘겹게 느껴질 때 우리는 그 대체물을 찾는다. 나의 경우 그것은 산서(山書)다. 산에 못 가는 대신 산에 대하여 쓰여진 시와 산문과 사진들을 어루만지며 그 애틋한 그리움을 달래는 것이다. 덕분에 제목에 '산'이 들어간 책들은 모두 내 차지다. 열정은 때로 집착으로 기운다. 제목에 '산'이 들어간 책들을 모두 섭렵하고 나면 이제 그 내용 중의 일부라도 '산'에 걸쳐져 있는 책들까지 샅샅히 뒤지게 된다. 김미진의 장편소설 <자전거를 타는 여자>를 읽게 된 것도 그런 연유다.
    2000년 5월, 노멀 루트를 통하여 로체(Lhotse, 8516m) 정상에 오른 한국등반대는 뜻밖에도 그곳에서 눈속에 파묻혀 있는 스위스제 서바이벌 키트를 하나 찾아낸다. 키트의 소유자는 3년전 로체 남벽을 단독등반으로 오르던 중 실종된 것으로 보고되었던 한국의 젊은 등반가 하훈. 이 소설의 남자 주인공인 그는 MM이라는 이니셜을 가진 미지의 여인에게 바치는 못 다한 사랑의 편지를 서바이벌 키트 속에 남겨놓은 채 그렇게 세상을 떠난 것이다. 그렇다면 MM은? 두말할 나위도 없이 이 소설의 여자 주인공인 미목이다. 자전거를 즐겨타는 매혹적인 유부녀 미목은 횡계의 별장에서 우연히 하훈과 마주친 이후 걷잡을 수 없는 사랑에 빠져든다. <자전거를 타는 여자>는 하훈과 미목의 격렬하고도 애절한 러브스토리다.
    하지만 결론부터 말하자면, 작가인 김미진 님께는 대단히 죄송스러운 말씀이 되겠지만, 소설은 별로다. 적어도 내게는 그랬다. 로체 남벽(현재 이 지구상에서 가장 난이도 높은 등반대상지로 손꼽힌다)에 도전할 정도의 극한등반가가 남자 주인공으로 나오는 소설이라면 본격적인 산악문학 혹은 모험소설의 전개를 기대하는 것이 당연한 반응이 아닌가? 하지만 <자전거를 타는 여자>는 상투적인 멜로드라마의 틀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않는다. 아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너무 혹독하고 편협한 독후감일지도 모른다. 대신 이렇게 표현하자. 산악문학 혹은 모험소설의 잣대로 가늠해 보자면 이 소설은 함량 미달이다. 하지만 멜로드라마 혹은 연애소설의 잣대로 가늠해 볼 경우 충분히 그 기대수준을 충족시키고도 남는 작품이 바로 이 <자전거를 타는 여자>다.
    독자로서의 나는 이 소설에서 단 한 장면만을 기억한다. 바로 그들의 첫 번째 데이트 장면이다. 외로운 터프가이 하훈은 자신의 랜드로바에 미목을 태운채 어디론가를 향하여 달린다. 뚜렷한 목적지는 없다. 그가 찾는 곳은 다만 일몰을 제대로 감상할 수 있는 장소다. 책을 덮은 다음에도 오래도록 내게 깊은 여운을 남겼던 대사들이 읊조려지는 것은 바로 이 대목에서다.
    "우리는 죽을 때까지 몇 번이나 해가 지는 것을 볼 수 있을까요?"
    "글쎄요, 그런 계산을 해본 적이 없어요."
    "우리가 사는 동안 대략, 이만 번쯤 해가 질 겁니다. 그렇지만 해가 지는 광경을 실제로 구경할 수 있는 날은 그리 많지 않아요. 나는 해가 질 때면 일부러 밖에 나가요. 오직 해가 기울어가는 모습을 보기 위해서죠." 

    삶과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대자연의 시간 

    우리가 헤아려보지 않아도 해는 뜨고 진다. 우리가 의식하지 않아도 달은 뜨고 진다. 해와 달이 뜨고 지는 것은 극히 '일상적인' 사건이다. 우리는 그 일상들을 잊고 산다. 하지만 그 일상들은 자연적인 일상인 동시에 우주적인 일상이며 영원한 일상이기도 하다. 우리는 어떤 특정한 날에 이르러서야 이 일상적인 사건에 주목하며 그것을 새출발의 계기로 삼으려 한다. 가령 새해 첫날에 일출을 맞으려 정동진으로 떠나는 것이다. 새삼스럽고도 남세스러운 일이다. 이 우주적인 일상을 우리의 삶 깊숙한 곳으로 끌어들일 수는 없을까? <자전거를 타는 여자>에 나오는 하훈의 어법으로 묻는다면 이렇다. 우리는 죽을 때까지 몇 번이나 해가 지는 것을 볼 수 있을까?
    내 집필실의 두 면은 유리창으로 되어 있다. 각각 동향과 북향이다. 덕분에 밤을 꼬박 새우는 날은 동창의 한 귀퉁이로 붉은 해가 떠오르는 장엄한 광경을 볼 수 있다. 제 아무리 허섭쓰레기 같은 일을 하고 있던 중이라 해도 불현듯 설명할 길 없는 감동에 사로잡히는 순간이다. 별 다른 약속이 없을 때면 이 집필실에서 일몰을 맞는다. 맨처음 노을은 전혀 예상치도 못했던 각도로 다가온다. 한강 저 편으로 떨어지는 붉은 해가 신촌로타리에 우뚝 서 있는 맥도날드빌딩의 유리창에 반사되어 내 방까지 물들이는 까닭이다. 그러면 나는 북창을 열고 그 좁은 틈새로 고개를 내밀어 하루의 해가 저물어가는 모습을 오래도록 지켜본다. 석양은 미련 섞인 하소연 따위는 내 알 바 아니라는 듯 빠른 속도로 빌딩숲을 물들이며 지평선 너머로 사라져 간다.
    어쩌다가 일출과 일몰을 모두 목격한 날은 더 없이 충만한 느낌에 사로잡힌다. 그런 날만은 내가 도시의 바쁜 삶 속에 휘둘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모르는채 살아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소외감으로부터 자유로와진다. 달이 뜨고 해가 지는 모습을 바라볼 때 느끼는 야릇한 안도감 같은 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좋을지 모르겠다. 해가 뜨고 달이 지는 모습을 바라볼 때 느끼는 막연한 긍정 혹은 희망의 힘 같은 것을 어떻게 정의해야 옳을지 모르겠다. 우리는 이 일상적이되 우주적인 장면과 마주칠 때마다 왜 형언할 수 없는 감동에 몸을 떨게 되는가? 지구가 둥글고 우주가 제대로 돌아가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확인 때문에? 우리는 한낱 미물일 뿐이지만 대자연의 햇살과 달빛은 여전히 우리들을 공평하게 비춰주고 있다는 깨달음 때문에? 알 수 없다. 여하튼 해와 달이 뜨고 지는 시간이야말로 삶과 자신을 묵묵히 돌아볼 수 있는 대자연의 시간이라는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깨어있는 삶을 원하는가? 해가 떠오를 때 깨어있으라. 해가 저물 때 그 광경을 보라. 세속의 가치가 아니라 대자연의 가치 속에서 절묘하게 균형을 잡고 있는 삶을 원하는가? 떠오르는 달을 보라. 새벽의 미명 속으로 스며들 듯 사라져가는 달을 바라보라. 당신은 여지껏 몇번의 일출을 목격했는가? 그 빤한 횟수가 곧 당신 삶의 충실도를 가늠해줄지도 모른다. 당신은 휘엉청 밝은 달빛 아래에서의 고독한 산행을 그 동안 얼마나 즐겨왔는가? 그 단순한 수치가 곧 당신 산행의 성숙도를 에누리없이 증언해줄지도 모른다.  

    야영금지는 기본적 행복권의 박탈 

    자연이 제 모습을 가장 가감 없이 드러내는 것은 대자연의 시간 속에서이다. 해와 달이 뜨고 지는 시간이야말로 여기에 해당한다. 산이 흑백의 단순한 구도 속에 제 모습을 선연하게 드러내는 것은 언제인가? 해가 저무는 시간이다. 다정한 산길이 어둠 속에서 표롯이 떠오르는 마술과도 같은 순간은 언제인가? 달빛이 내려앉는 시간이다. 공포를 자아내던 거대한 존재가 잘 생긴 바윗덩어리로 변해가는 것은 언제인가? 하루를 여는 첫햇살이 그 이마를 밝혀줄 때다. 뿌우연 수묵화가 총천연색 파노라마로 몸을 바꿀 때 여운처럼 허공 속으로 사라져가는 존재는 누구인가? 바로 지난 밤 우리에게 수줍은 목소리로 우주의 비밀을 속삭여주던 달이다.
    벌건 대낮에만 쏘다닌 산은 제 모습의 극히 일부만을 보여준다. 산의 참모습을 가슴 가득 느껴보려면 그곳에서 밤을 맞아야만 한다는 것이 나의 지론이다. 언젠가 인수봉 정상에 멍하니 앉아 잔물결처럼 밀려드는 어둠을 막막하게 바라보던 때가 기억난다. 절망도 공포도 한 순간뿐이다. 결국 짙은 어둠이 온 세상을 뒤덮었을 때 밤하늘에는 별들이 쏟아져내리고 있었고 가슴 속에서는 행복한 짐승이 야성의 포효를 토해내고 있었다. 그때 어둠 속에서도 선명히 드러나던 북한산의 그 황홀한 실루엣이라니! 그리고는 어느 순간 저 뿌연 도시의 매연 위로 기적처럼 떠오르던 그 새빨간 아침햇살의 이글거림이라니!
    산의 진정한 아름다움은 해질녘과 해뜰녘에 드러난다. 그런 뜻에서 '자연보호'라는 미명 하에 산에서의 취사와 야영을 금지시킨 것은 산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있어 가장 기본적인 행복권의 향유를 무자비하게 박탈한 것이다. 공무원식으로 이야기해보자. 등산을 통해 정서를 순화하고 인격을 도야한다고? 만약 그런 것이 가능하다면 그것은 야영을 통해서 완성된다. 엄밀히 말해서 현재 우리 나라에서 '허용'되고 있는 등산문화는 오직 '소풍'뿐이다. 아침에 산 밑에서 김밥을 싸들고 올라갔다가 해 지기 전에 후다닥 내려오라고? 그것도 나쁘지 않다. 하지만 소풍은 소풍일 뿐이다. 산은 소풍을 통해서는 제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소 풍을 통해서는 삶과 자신을 되돌아보는 대자연의 시간과 마주할 수 없다.
    얼마 전 내가 주재하는 워크숍 과정을 막 졸업한 학생들과 북한산에 올랐다. 토요일 이른 시간이었는데도 도선사 입구가 북새통이었다. 고개를 갸웃하며 날짜를 헤아려봤더니 아하 때마침 정월 대보름이었다. 해지기 전에 산에서 내려왔지만 집으로 돌아가기는 싫었다. 학생들과 우이동 민박집을 빌려 밤늦도록 술잔을 기울였다. 올려다보는 하늘엔 거짓말처럼 커다란 보름달이 두둥실 떠있었다. 달빛 아래 펼쳐진 북한산의 실루엣이 근사했다. 문득 결심했다. 정월 대보름을 이대로 보낼 순 없다. 이튿날 가족들과 함께 지리산을 향해 달려갔다. 지리산의 그 유장한 능선 위에서 해가 지고 달이 뜨는 것을 바라보고 싶었던 것이다.
    지리산 위에서 해가 지는 것을 봤다. 흡사 누군가의 붉은 심장 같았다. 지리산 위로 떠오르는 달을 봤다. 노랫말 그대로 커다란 은쟁반이었다. 아홉 살 박이 딸아이는 눈 덮힌 지리산길 위에서 엎어지고 자빠지면서도 깔깔대며 즐거워했다. 모퉁이를 돌 때마다 산장의 불빛처럼 환한 빛이 쏟아졌지만 자세히 보면 놀라울만큼 밝은 대보름 달빛이었다. 노고단산장 관리사무소장인 김순완 님의 호의로 내실에 짐을 풀었다. 목은 너무 마르고 방은 쩔쩔 끓어 이리저리 뒤척이다 문득 눈을 떠보니 아직도 한밤중이었다. 홀로 산장 문을 나서니 은빛 물결이 넘실대고 있었다. 대보름 달빛 사이로 엄청난 별들이 쏟아지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까닭도 모르는채 그저 삶과 산과 세상에 감사했다.
    그날 새벽에는 물론 노고단 위에서 떠오르는 해를 맞았다. 뒤돌아보니 우리가 그곳에 오르는 동안 내내 등 뒤에 떠 있었던 달이 어느새 희미하게 스러져가고 있었다. 그렇게 해와 달이 뜨고 지며 새 날은 밝아오고 세월은 흘러간다. 드물게 좋은 시야 아래 펼쳐진 지리산의 연봉들이 더 없이 그윽하고 아름다웠다. 나는 그 유서 깊은 노고단 돌탑에 기대어 눈을감은 채 얼굴 가득 따사로운 아침햇살을 느끼며 나직히 속삭였다. 바라옵건대 나의 남은 삶에서 해가 지고 달이 뜨는 모습을 바라볼 수 있는 날들이 많고 많기를! 기원하건대 지금처럼 산 위에서 달이 지고 해가 뜨는 모습을 맞을 수 있는 날들이 많고 많기를!

  월간 [시민과 변호사]에 실렸던 글인데...몇년 몇월호인지는 나중에 확인해서 올리죠!^^


 

임소연

2006.06.01 13:38
*.22.240.123
맨하탄 5ave의 가장 번화한 거리에서 해질녁에 노을이...사람을 정말..황홀케해야 한다나...느낌이 묘해요... 수많은 관광객들과 마천루...여튼..어떻게 형언이 안되는 그 느낌인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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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산

2006.06.23 17:08
*.146.254.60
아아 맨해튼의 노을, 정말 멋지지...예전에 약 한달간 맨해튼에 머물 때, 내가 묵었던 숙소에서 바라보는 노을이 정말 백만불 짜리였어...거기가 바로 피프스 애버뉴였는데...그리운 뉴욕!^^

최민성

2007.05.12 14:51
*.138.50.98
[시민과 변호사] 라는 잡지가 있다니...ㅎㅎ 은근히 재미있을 듯...
그나저나 저도 지리산 한번 가봐야 할텐데요..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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