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적 이상주의의 전도사
로버트 리스킨(Robert Riskin, 1897-1955)
인간의 본성은 선하다. 자본주의사회라고 해서 돈과 물욕만이 전부는 아니다. 착한 사람은 결국 승리하고 사랑을 얻는다. 상식과 대의명분이야말로 최고의 가치다. 세상은 그래도 살 만한 곳이다. 요즘같이 험악한 세상에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냐고? 내 생각이 아니다. 프랭크 카프라의 영화에서 확인할 수 있는 대책없는 인민주의 혹은 미국적 이상주의의 내용이 그렇다는 것이다.
할리우드의 1930년대를 대표하는 감독 프랭크 카프라의 영화는 그렇게 황당무계(?)하고 아름다운 꿈을 설파한다. 오죽했으면 존 카사베츠가 “실제의 미국은 존재하지 않은 대신 프랭크 카프라만이 존재했던 것인지도 모른다.”라고까지 했겠는가? 그러나 관점을 달리해서 볼 수도 있다. 많은 사람들이 카프라의 영화를 사랑한 것은 그래도 여전히 아름다운 어떤 이상적인 꿈을 형상화해놓았기 때문일 수도 있는 것이다. 로버트 리스킨은 카프라의 그런 꿈들을 설계하고 전도한 작가이다.
리스킨이 오직 카프라만을 위해서 시나리오를 썼던 것은 아니다. 그는 평생 30편의 시나리오를 썼는데 카프라가 연출한 것은 그중 11편일 뿐이다. 그러나 그 11편은 작가에게는 물론 감독에게도 각자의 필모그래피에서 가장 중요한 작품이었다.(별항의 필모그래피에서 감독 이름이 생략된 작품은 모두 카프라의 연출작이다). 이들 두 사람이 함께한 첫 작품은 위트 넘치는 코미디 [플래티넘 블론드]. 1920년대 내내 잘 나가는 브로드웨이 극작가로 명성을 날리던 리스킨이 컬럼비아영화사와 10년간 전속계약을 맺고 쓴 첫 번째 작품인데, 재기발랄한 기자-가난한 옛 애인-부유한 여인의 삼각관계를 주축으로 하고 있으며, 향후 펼쳐질 그들의 작품세계를 압축적으로 예언하고 있다.
[img2]리스킨의 데뷔 이후 2년 동안 무려11편의 시나리오를 쓸만큼 원기왕성하게 활동했지만 그중 중요한 작품으로 손꼽히는 것은 역시 카프라와 함께한 두 번째 작품 [미국의 광기]. 대공황을 맞은 자본주의사회의 모습을 한 은행을 중심으로 코믹하게 축약해놓은 밀도 짙은 사회물이다. 철없는 딸을 속이기 위해 주변 이웃들 모두가 한 가난한 브로드웨이의 사과장수 아줌마를 꼭 하루 동안만 부유한 귀부인처럼 떠받든다는 내용의 [하루 동안의 숙녀]는 많은 사람들의 눈시울을 적신 할리우드의 고전. 카프라 역시 이 작품을 몹시도 좋아했는지 리스킨이 세상을 떠난 이후 [한줌의 행운](1961)이라는 제목으로 다시 리메이크하기도 했다.
이들 두 콤비의 명성을 세상에 떨친 것은 아카데미 사상 최초의 빅파이브 수상작으로 손꼽히는 [어느 날 밤에 생긴 일]. 클라크 게이블과 클로데트 콜버트가 주연한 이 영화는 스쿠루볼 코미디의 원조로 기록되면서 엄청난 흥행성공을 이루어 컬럼비아를 메이저영화사로 진입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게리 쿠퍼가 뜬금없이 거액의 유산을 상속받은 착한 남자로 등장해 열연을 펼친 [디즈씨 도시로 가다]는 이들 콤비가 만들어낸 미국적 이상주의의 본보기와도 같은 작품. 이상주의의 범주를 한껏 넓혀 인류가 오래도록 꿈꾸어온 이상향을 탐구한 작품이 저 유명한 [잃어버린 지평선]. 티베트 고원지대에 불시착한 극동지영 외교관 로버트 콘웨이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이 작품은 ‘샹그릴라’(이상향)라는 단어를 세계적으로 유행시키기도 했다.
컬럼비아와의 10년 전속계약이 끝나자 아예 카프라와 함께 독립프로덕션을 차려 만든 첫 작품이 [존 도우를 찾아서]인데, 흥행과 비평 모두에서 성공했지만, 어이없게도 엄청난 세금을 징수당하는 바람에 두 사람 모두를 파산지경으로 몰고 갔다.이후 빙 크로스비를 주연으로 기용한 뮤지컬 코미디 [성공이야]와 [신랑이 온다]에서 간신히 명맥을 유지하긴 했지만 안타깝게도 두 사람의 결별은 이미 기정사실이 돼버린 상태. 리스킨의 사망 직후 개봉된 마지막 작품 [도망칠 수 없어]는 [어느 날 밤에 생긴 일]의 뮤지컬 버전이다. 리스킨은 과연 카프라 및 그와 함께 꿈꾸었던 미국적 이상주의로부터 벗어날 수는 없었던 것일까?
[img3]시나리오 필모그래피
1931년 [플래티넘 블론드](Platinum Blonde)
1932년 [미국의 광기](American Madness)
1933년 [하루동안의 숙녀](Lady for a Day) ★
1934년 [어느날 밤에 생긴 일](It happend one Night) ★★
[브로드웨이 빌](Broadway Bill)
1936년 [디즈씨 도시로 가다](Mr. Deeds Goes to Town) ★
1937년 [잃어버린 지평선](Lost Horizon)
로버트 리스킨의 [사랑에 빠질때](When you're in Love)
1938년 [가질 수 없어](You can't Take It with You) ★
1941년 [존 도우를 찾아서](Meet John Doe)
1950년 [성공이야](Riding High)
1951년 [신랑이 온다](Here comes the Groom) ★
1956년 딕 포웰의 [도망칠 수 없어](You Can't Run Away from It)
★는 아카데미 각본(색)상 후보작
★★는 아카데미 각본(색)상 수상작
[씨네21] 2000년 12월 19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