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심산 등록일: 2006-07-12 20:39:38 IP ADRESS: *.51.1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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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리오를 쓰며 함께 늙어가다
프랜시스 굿리치(Frances Goodrich, 1890~1984) & 앨버트 해킷(Albert Hackett, 1900~1995)

프랜시스 굿리치는 한국 근대사적 어법으로 말하면 신여성이다. 19세기 말에 태어나 일찌감치 연극에 뜻을 두고 브로드웨이에 진출하여 26살 때 처음으로 무대에 선 연극배우이자, 삼십대 중반에 이르기까지 두번에 걸쳐 결혼과 이혼을 반복했을 만큼 자유연애사상(?)을 몸소 실천한 선구적인 여성이었다. 그런 그녀가 배우생활에 염증을 느껴 작가로의 방향전환을 모색하고 있을 즈음 10살 연하의 영계가 나타나 열렬한 구애를 펼친다. 그가 앨버트 해킷이다. 해킷은 유서깊은 연극인 가문의 아들이다. 초창기 브로드웨이의 스타였던 플로렌스 해킷을 엄마로 두었던 덕에 겨우 6살 때부터 줄곧 무대를 지켜온 베테랑급 연극배우이지만 그 역시 작가로의 방향전환을 모색하고 있던 터였다. 열애에 빠져든 두 남녀가 동거를 하면서 쓴 첫 번째 희곡작품이 [업 팝스 더 데블]이다. 이 작품이 브로드웨이에서 대히트를 기록하자 두 사람은 정식으로 결혼하여 부부가 된다. 굿리치가 마흔, 해킷이 서른이 되던 해인 1929년의 일이다.

굿리치에 대한 해킷의 사랑은 자못 감동적이다. 그는 [업 팝스 더 데블]의 영화용 각색을 위해 할리우드에서 초청을 받았지만 응하지 않았다. 혼자만이 초청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아내가 단지 ‘작가의 아내’라는 이유만으로 할리우드에 입성하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다. 결국 할리우드는 두 사람 모두를 작가로 모셔온다. 그뒤 이들 부부는 공식적인 은퇴작 [파이브 핑거 엑서사이즈]에 이르기까지의 30여년 동안 약 30여편에 달하는 최고의 흥행작들을 양산해내면서 할리우드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듀오작가로서 활동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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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한 장르들을 소화해냈지만 가장 두각을 나타냈던 장르는 단연 뮤지컬. 전설적인 뮤지컬 콤비 지네트 맥도널드와 넬슨 에디가 주연한 [노티 마리에타]부터 국내에서도 크게 히트했던 스탠리 도넌의 [7인의 신부]에 이르기까지 10여편을 썼다. 진 켈리, 프레드 아스테어, 주디 갈란드 등이 주연을 맡았던 유쾌한 뮤지컬 [해적](1948)이나 [이스터 퍼레이드](1948)는 당시의 스튜디오 시스템을 십분 활용한 달러박스였다.

대표작으로 꼽히는 [신 맨] 시리즈는 코믹터치의 미스터리물. 영민한 사립탐정 닉(윌리엄 포웰)과 그의 아내이자 사교계의 여왕으로 나오는 노라(미르나 로이)가 이끌어 가는 영화인데, 정식 부부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불륜의 정부들인 것처럼 서로를 자극하는 육감적인 대사와 위트 넘치는 말싸움으로 유명하다. 영화사에 길이 남을 이 닉과 노라의 캐릭터는 이 듀오작가 부부의 절친한 친구였던 추리소설가 대시얼 해밋과 릴리언 헬만으로부터 따왔다는 혐의가 짙다. 불과 14일 만에 촬영을 끝낸 저예산영화였으나 엄청난 흥행성적을 거두어 TV시리즈와 라디오 드라마로까지 확장되었으며 그뒤 만들어진 5편의 속편들(1936∼1948)도 모두 크게 히트하였다.

또다른 대표작은 가슴 따뜻한 코미디 [신부의 아버지]와 그 속편. 빈센트 미넬리의 오리지널판은 구해보기 힘들지만 1990년대에 만들어진 찰스 샤이어의 리메이크판은 국내에도 출시되어 있다. 스펜서 트레이시-조앤 베넷-엘리자베스 테일러가 스티브 마틴-다이앤 키튼-킴벌리 윌리엄스로 대체되었을 뿐 시나리오는 그대로이니 아쉬운 대로 원작의 향기를 맡아볼 수 있다.

이들 듀오작가 부부의 자존심과 고집은 할리우드의 전설이다. 이들은 당대 최고의 감독이었던 프랭크 카프라가 자신들이 쓴 [멋진 인생]의 시나리오를 수정하자 면전에서 저주를 내뱉었을 뿐 아니라 죽을 때까지 그를 씹고 다녔다. [안네의 일기] 역시 고집불통의 개가. 할리우드가 너무 어두운 내용이라며 제작을 보류하자, 무려 2년 동안이나 갈고 닦은 끝에 브로드웨이 무대에 올려 퓰리처상을 수상한 다음, 기어코 영화로 만들어 전세계인의 심금을 울렸다.

이 멋진 듀오작가는 은퇴 뒤 뉴욕의 호화찬란한 아파트에서 행복한 노년을 보내다가 각자 천수를 다하고 세상을 떠날 때까지 더없이 금실 좋은 부부로 살다 갔다. 모든 편견과 장애물들을 극복해내고 끝까지 함께 같은 길을 걸어간 이들의 사랑이야말로 프랜시스 굿리치와 앨버트 해킷이 만들어낸 가장 경이롭고 아름다운 작품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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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리오 필모그래피

1931년 에드워드 서덜랜드의 [업 팝스 더 데블](Up Pops the Devil)
1934년 W. S. 반 다이크의 [신 맨](The Thin Man) ★
1935년 W. S. 반 다이크의 [노티 마리에타](Naughty Marietta)
1935년 클라렌스 브라운의 [아, 윌더니스!](Ah, Wilderness!)
1936년 W. S. 반 다이크의 [신 맨2](After The Thin Man) ★
1944년 존 패로의 [히틀러 갱](The Hitler Gang)
1946년 프랭크 카프라의 [멋진 인생](It’s a Wonderful Life) ⓥ
1949년 로버트 Z. 레너드의 [즐거운 여름](In the Good Old Summertime)
1950년 빈센트 미넬리의 [신부의 아버지](Father of the Bride) ★
1951년 빈센트 미넬리의 [신부의 아버지2](Father's Little Dividend)
1954년 스탠리 도넌의 [7인의 신부](Seven Brides for Seven Brothers) ⓥ★
1958년 장 네귈레스코의 [어떤 미소](A Certain Smile)
1959년 조지 스티븐스의 [안네의 일기](The Diary of Anne Frank) ⓥ
1962년 대니얼 맨의 [파이브 핑거 엑서사이즈](Five Finger Exercise)

ⓥ는 비디오 출시작
★는 아카데미 각본(색)상 후보작

[씨네21] 2000년 9월 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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