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심산 등록일: 2006-07-25 15:06:36 IP ADRESS: *.51.162.1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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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성영화시대를 통과하여 살아남은 장인
벤 헥트(Ben Hecht, 1893∼1964)

1929년 5월26일 할리우드의 루스벨트호텔에서 열린 제1회 아카데미영화제는 초라하고 어수선하기 짝이 없었다. 아직 아카데미상이라는 것이 그 위상과 권위를 획득하기 이전의 실험적 이벤트 수준이었고, 때마침 무성영화에서 유성영화로 넘어가는 혼란스러운 과도기였던데다가, 이미 3개월 전에 수상작(자)들을 발표해버렸던 까닭에 정작 시상식 자체는 4분22초(!) 만에 끝나버린 졸속행사였던 것이다 초창기에는 격년제(이후 제6회까지)로 개최되었던 까닭에 그 이전 2년(1927∼28) 동안 제작된 영화들을 대상으로 했는데, 이날 사상 최초의 아카데미 각본상을 수상한 사람이 바로 무성영화시대 갱스터누아르의 걸작으로 손꼽히는 [지하세계]의 작가 벤 헥트다. 이 고집불통의 사나이는 그러나 조셉 스턴버그의 연출이 자신의 시나리오를 망쳤다고 불만을 토로하면서 시상식장에는 나타나지도 않았다.

설사 그가 이날 각본상을 수상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벤 헥트는 최초의 시나리오작가로 기록되기에 충분할 만큼 불멸의 업적을 남긴 인물이다. 그보다 먼저 시나리오를 쓴 사람도 있을 테고 그와 동시대를 살다간 작가들도 여럿 있었지만 그들 중 누구도 벤 헥트만큼 “나는 시나리오작가다”라는 아이덴티티를 분명히 가지고 오랜 세월 동안 직업적으로 시나리오를 써온 사람은 없는 것이다.

뉴욕 토박이인 벤 헥트는 무성영화가 한창 유행하던 1920년대 중반부터 일흔이 넘은 나이로 세상을 떠나던 1964년에 이르기까지 무려 100편이 넘는 시나리오들에 참여했고, 그 중 분명하게 자신의 크레디트를 남긴 작품 수만도 50편이 넘는다. 그는 틈틈이 브로드웨이를 위한 희곡 작품들도 발표해왔는데, 그의 대표작인 [20세기]와 [프론트 페이지]는 훗날 각각 당대 최고의 감독으로 손꼽히는 하워드 혹스(1934)와 빌리 와일더(1974)에 의해 동명의 영화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img2]

벤 헥트의 필모그래피에는 미국영화사가 농축돼 있다. 무성영화와 유성영화가 겹쳐지는 접합점에 위치한 영화가 [위대한 가보]. 무성영화시대의 위대한 감독으로 손꼽히던 에릭 폰 스트로하임(빌리 와일더의 [선셋대로](1950) 에서 그의 모습을 볼 수 있다)이 [여왕 켈리](1929)로 완전히 파산한 다음 배우로 전업하여 첫 번째로 주연을 맡은 영화로서 초창기 토키영화의 어수룩한 매력을 보여준다. [스카페이스]는 너무 잔혹한 장면들이 많아 제작자인 하워드 휴즈가 개봉을 미루고 미적댔던 탓에 [리틀 시저](1930)에 ‘최초의 토키 갱스터’라는 영예의 자리를 빼앗긴 전설적인 갱스터누아르. 우리에게는 브라이언 드 팔마가 알 파치노를 기용해 리메이크한 작품(1983)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어쩔 수 없이 경찰의 정보원 노릇을 하게 되는 가석방 죄수의 이야기 [죽음의 키스] 역시 웨스턴 형식의 [서부로 간 악마](1958), 현대에 걸맞게 손질한 [이중노출](1994, 영어원제는 그대로이다) 등으로 끊임없이 리메이크되고 있는 필름누아르의 걸작이다.

멕시코의 혁명영웅 판초 빌라의 일대기를 다룬 [비바 빌라!], 로렌스 올리비에의 명연이 돋보이는 [폭풍의 언덕], 더글러스 페어뱅크스와 리타 헤이워즈가 각각 사기도박사와 요염한 탕녀로 등장하는 [브로드웨이의 천사], 히치콕이 만든 스파이 스릴러의 대표작 [오명] 등은 모두 오스카 각본(색)상 후보에 오를 만큼 완성도 높은 작품들. 그에게 두 번째로 오스카를 안겨준 [악당]은 평생 여자들을 울리던 못된 녀석이 한 여인의 저주를 받고 죽게 됐으나 “너를 위해 울어줄 여자를 한명이라도 찾아낸다면 살려주겠다”는 조건으로 환생하여 사랑을 찾아 헤맨다는 스토리라인의 코미디. 앨런 바킨이 주연했던 [스위치](1991)의 원안 정도로 이해하면 된다.

그가 사망하던 해에 개봉된 [지상 최대의 서커스]를 보면 웨스턴의 대명사 존 웨인이 시대의 변화에 뒤처지지 않으려 안간힘을 써대는 우직하고 고집스러운 서커스단장으로 나온다. 존 웨인의 캐릭터 속에서 변화무쌍한 세월을 헤치고 꿋꿋이 살아남은 최초의 시나리오작가 벤 헥트의 그림자를 읽어내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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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리오 필모그래피

1927년 조셉 스턴버그의 [지하세계](Under World) ★★
1929년 제임스 크루즈의 [위대한 가보](The Great Gabbo)
1932년 하워드 혹스의 [스카페이스](Scarface)
1933년 에른스트 루비치의 [디자인 포 리빙](Design for Living)
1934년 잭 콘웨이의 [비바 빌라!](Viva Villa!) ★
1935년 찰스 맥아더의 [악당](The Scoundrel) ★★
1939년 윌리엄 와일러의 [폭풍의 언덕](Wuthering Heights) ★
1940년 리 가메즈의 [브로드웨이의 천사](Angels over Broadway) ★
1945년 앨프리드 히치콕의 [망각의 여로](Spellbound)
1946년 앨프리드 히치콕의 [오명](Notorious) ★
1947년 헨리 해서웨이의 [죽음의 키스](Kiss of Death)
1954년 마리오 카메리니의 [율리시즈](Ulisse)
1957년 찰스 비더의 [무기여 잘있거라](A Farewell to Arms)
1964년 헨리 해서웨이의 [지상 최대의 서커스](Circus World) ⓥ

ⓥ는 비디오출시작
★는 아카데미 각본(색)상 후보작
★★는 아카데미 각본(색)상 수상작

[씨네21] 2000년 11월 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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