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는 죽고 나는 선원이 되었다"
배우 유덕화론
내게 있어서 홍콩영화를 이야기할 때 제일 먼저 떠오르는 배우는 유덕화다. 그가 최고의 미남이라거나 최고의 배우라는 뜻은 아니다. 외모로 말하자면 차라리 그에게선 어딘가 "없이 산 놈"의 이미지가 있다. 사회의 밑바닥에서 기어올라온 끈질긴 생명력의 사내 같다는 뜻이다. 하긴 내가 그를 좋아하는 이유가 이런 이미지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는 "성공했으나 그늘을 담고 있는" 얼굴을 가지고 있다. 게다가 영화 속의 그는 언제나 자신의 과거 혹은 세속에 발이 묶여있는 존재로 나온다. 홍콩영화의 전성기 시절, 그의 발목을 묶고 있는 것은 "의리"였다.
[지존무상]의 유덕화를 기억하는가? 친구의 애인을 위하여 독배를 마시고도 시치미를 뚝 떼며 죽음을 받아들인 남자. 내가 가장 좋아하는 캐릭터는 [열혈남아]의 소화다. 허풍장이에 사고뭉치일 뿐인 동생을 위하여 기꺼이 목숨을 내던지는 남자. 하지만 그의 의리에는 무언가 염세적인 파토스가 흐른다. 그는 지극히 현세적인 허무주의자다. 입 밖에 내어 발설하진 않지만 "본래 삶이란 별볼 일 없는 거야"하는 내밀한 믿음 같은 것이 그의 표정에 묻어나온다. 그렇다. 내가 사랑하는 것은 그의 현세적인 허무주의다.
유덕화는 장국영과 공연할 때 언제나 "한 수 접어주는" 역할을 맡는다. [지존무상]이 그렇고 [아비정전]이 그렇다. 그는 장국영이 버린 여자를 흠모하지만 손 한번 잡아보지 못한다. 울리지 않는 전화박스 앞에서 모자를 눌러쓰고는 어둠 속으로 사라지던 그를 기억하는가? 그는 무심하게 독백한다. "전화벨은 울리지 않았다. 얼마 후 엄마는 죽고 나는 선원이 되었다." 묘하게도 울림이 큰 대사다. 그는 엄마를 사랑했을까? 꼭 그럴 것 같지는 않다. 하지만 엄마의 병을 간호하기 위해서 하릴없는 방범대원으로 소일하는 청춘이 유덕화다. 의리 때문에 죽지만 내심 의리가 그토록 중요하지는 않다는 사실을 꿰뚫고 있는 염세주의자가 현세를 살아가는 방식이다.
그러나 [무간도]에서 유덕화는 말한다. "예전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지만 이제는 내 삶을 살고 싶어." 의리를 절대가치로 내세우던 홍콩누아르의 시대는 갔다. 엄마가 죽은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살아남은 유덕화는 고통스럽다. 무간지옥의 무기수는 죽은 양조위가 아니라 살아있는 유덕화인 것이다. 그의 발목을 묶었던 엄마는 죽었다. 무간지옥에 떨어진 천애고아는 양조위의 무덤 앞에 꽃을 바치며 자신을 연민하여 운다.
월간 [프리미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