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탕한 청춘에겐 핑계가 필요하다
[아비정전]의 아비
“발 없는 새가 있다더군. 늘 날아다니다가 지치면 바람 속에서 쉰 대. 평생에 꼭 한 번 땅에 내려앉는데, 그건 바로 죽을 때지.” 염훙잉(유가령)과 하룻밤을 보낸 다음날 아침, 아비(장국영)가 혼자 속옷바람으로 맘보춤을 추며 시니컬하게 내뱉는 대사다. 아비는 이기적이고 무책임한 바람둥이다. 아니, 그가 여자 헌팅의 귀재인 것은 사실이지만 정작 상대방 여자에 대해서는 별 관심도 없다. 그렇다면 그가 원하는 것은 뭘까? 단 한 번도 얼굴을 본 적이 없는 자신의 생모를 찾는 것이다.
흔히 ‘저주받은 걸작’이라는 관용어를 쓰는데 왕가위의 두 번째 영화 [아비정전]만큼 이 표현에 딱 맞아떨어지는 작품을 찾기도 쉽지 않다. 지금도 기억난다. 나는 이 작품을 개봉 당일 중앙극장에서 봤는데, 영화가 끝나자 몰려나오던 관객들이 끓어오르는 분노를 삭이지 못해 극장 유리창을 발로 차서 깨버린 것을 똑똑히 기억한다. 하긴 멋진 액션영화를 기대하고 표를 끊었는데 액션 장면이라고는 그야말로 고양이 눈물만큼 나오는 데다 유덕화는 방범대원으로 나와 빌빌대다가 사라지고, 양조위는 아예 정체도 알 수 없는 인물로 라스트씬에만 얼굴을 들이미니 환장할 노릇이다.
하지만 나는 이 영화가 너무 좋아 그 이튿날도 연거푸 극장을 찾았고 비디오테이프를 구입한 다음에는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마르고 닳도록 보고 또 본다. 이 영화에서 나를 사로잡은 것은 바로 아비라는 캐릭터다. 그가 저지르는 온갖 못된 짓의 핑계는 “나를 낳아준 어머니가 누구인지 모르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는 그것을 핑계로 양모를 괴롭히고 여자들을 울리며 될대로 되라는 식의 방종한 삶을 살아간다. 그런 뜻에서 이 영화에는 영어제목이 훨씬 잘 어울린다. [될대로 살아버린 날들](Days of Being Wild). [이유 없는 반항]이 홍콩에서 개봉될 때의 영어제목이기도 하다.
아비가 교활하게도 자신의 삶을 합리화하는 도구로 삼은 그 핑계가 의미하는 바는 도대체 무엇일까? 어떤 평론가는 아비가 곧 홍콩이며 생모는 중국을, 양모는 영국을 의미한다는 잔뜩 멋부린 해석을 제출한 바 있다. 웃기는 개소리다. 핑계는 핑계일 뿐이다. 그리고 우리 모두는 이 따분하고 비루한 삶을 버티고 합리화하기 위하여 어떤 종류의 것이든 자신만의 핑계를 필요로 한다. 우리는 시대를 핑계로 술을 마셨고 정치상황을 핑계로 난잡한 생활을 합리화했다. 첫 사랑에 실패해 여자에 대한 복수가 끓어오른다는 이유로 숱한 여자들을 울렸고, 지금은 힘을 기를 시간이라면서 변절과 치부를 일삼았다.
노신이 [아큐정전]에서 그린 것이 식민지 중국인민의 뒤틀린 삶이라면, 왕가위가 [아비정전]에서 보여준 것은 언제나 책임을 전가할 무엇인가가 필요한 청춘의 야비한 자화상이다. 그래서 어느날 갑자기 핑계거리를 상실해버린 아비가 필리핀 차이나타운의 더러운 대로변에서 개차반으로 술에 취한채 쓰레기처럼 무너져버리는 장면은 더 할 수 없이 가슴을 후벼판다. 아비는 죽어가는 순간에 이르러서야 자신의 삶을 객관적으로 바라본다. “그 새는 태어날 때부터 죽어 있었어.”
[동아일보] 2001년 4월 6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