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든 살아남을 놈
[블랙레인]의 닉
때로는 영화가 도시를 익숙하게 만든다. 수년전 일본여행을 갔을 때 나는 굳이 오사카의 번화가와 뒷 골목, 그곳의 경시청을 돌아봤다. 무슨 그곳의 범죄집단이나 경찰과 거래할 일이 있어서는 아니었고 [블랙레인]의 촬영현장을 확인하고 싶었을 뿐이었다. 뉴욕 강력계 형사 닉(마이클 더글러스)을 오사카까지 끌어들인 인물은 일본 신세대 야쿠자의 두목 사토(마스다 유사쿠)다. 닉에게 체포된 사토는 일본으로 호송되는 도중 공항에서 유유히 도주하고 닉의 코 앞에서 그의 파트너 찰리(앤디 가르시아)를 살해함으로써 두 남자의 맞대결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이 된다.
그러나 모든 것이 닉에게는 너무도 불리하다. 영어는 한 마디도 통하지 않고, 총은 압수되었으며, 일본인 모두로부터 ‘가이진’(이방인에 대한 경멸적인 표현)으로 취급받아 따돌림을 당하는 것이다. 뉴욕에서는 횡령혐의로 그에 대한 내사가 진행 중이라는 사실도 커다란 부담이다. [블랙레인]은 이렇게 사면초가에 빠진 닉이 일본 형사 마사히로(다카쿠라 켄)와 더불어 사토의 일당들을 다시 체포하는 과정을 박진감 있게 그려낸다.
[블랙레인]은 볼거리가 많은 영화다. 리들리 스콧이 잡아낸 오사카의 밤풍경도 일품이고, 동서양의 문화적 충돌도 흥미로우며, 일본의 국민배우 다카쿠라 켄의 중후한 연기도 인상적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스크린을 압도하는 것은 바로 닉이라는 캐릭터다. 영화 후반부에 가서야 밝혀지지만 실제 그는 횡령을 일삼는 부패경찰이다. 그가 사토의 체포에 필사적으로 매달리는 것도 정의감이나 직업윤리 때문이 아니다. 간단히 말해 남자들끼리의 ‘맞짱뜨기’이고 복수심의 발현일 따름이다.
닉이 최후의 방법으로 선택한 것도 뒷골목의 논리다. 그는 사토 때문에 골치를 앓고 있는 야쿠자 오야붕 스가이를 직접 만나 막후 밀약을 성사시킴으로써 기어코 자신의 목표를 달성시키고야 만다. 닉은 좋은 사람도, 훌륭한 경찰도 아니다. 그는 부패한 현실을 지탱하고 있는 게임의 법칙을 훤히 꿰뚫고 있다. 그러나 그것에 대항하기 보다 그 속에서 적당히 함께 부패해가며 자기 몫의 밥그릇을 챙기는 회색지대의 인간이다. 그는 목표를 설정하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기어이 그것을 관철시킨다는 점에서 누구보다 사토와 닮아있는 캐릭터다. 차이점이 있다면 오직 하나, 사토는 범죄자이고 닉은 경찰이라는 것뿐.
이런 캐릭터들이야말로 현실세계의 강자다. 진흙에서 피어난 연꽃? 천만에! 닉은 쓰레기더미 속에 내동댕이쳐져도 기어코 살아남는 강인한 잡초다. 영화의 오프닝을 장식하는 그렉 올맨의 노래 [난 버틸 수 있어]는 바로 이런 강인한 잡초들의 주제가다. 나는 가끔씩 이 노래를 목청이 터져라 불러제낀다. “세상사람들은 날더러 어떻게든 살아남을 놈이라고 말하지. 내 인생은 엉망이 되고, 꿈들은 하나둘씩 사라져갔어도, 난 버틸 수 있어. 억수로 비가 퍼부어 길이 지워져도, 난 괜찮아, 버틸 수 있어. 홀로 남겨져도 추억 따위에 연연하진 않아, 모두가 다 나를 버려도, 난 버틸 수 있어.”
[동아일보] 2001년 4월 20일
역시 아는만큼만 보이나봐요. 이 영화를 오늘 처음 알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