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처 없는 영혼의 그녀
[타인의 취향]의 마니
그녀는 세련된 섹시함으로 남자를 끌어당긴다. 문제는 그 다음에 발생한다. 그녀 안에 머무는 것이 편안하지만은 않은 것이다. 떠나버리면 되지 않느냐고? 그것도 쉽지 않다. 떠나버리기에는 너무나도 매력적이다. 한 마디로 진퇴양난이다. 그녀가 누군지를 술직히 고백하자면 내 기억 속에 아직도 생생하게 자리잡고 있는 옛애인들 중 한 사람이다.
영화는 다양한 방식으로 관객의 가슴에 여운을 남긴다. 아귀가 꼭 맞아떨어지는 플롯이나 불가능해 보이던 문제의 속시원한 해결도 좋게 느껴진다. 때로는 어떤 캐릭터의 존재 자체가 가슴을 칠 때도 있다. 영화가 캐릭터를 발전시키지도 못했고 그가 안고 있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는데도 내 가슴에 공명을 일으킨다면 사태는 자명하다. 내가 잘 알고 있던 캐릭터가 화면 위에 재현된 경우다.
나는 영화 [타인의 취향]에 나오는 마니(아네스 자우이)를 보며 극히 개인적인 이유로 전율했다. 그녀의 눈빛, 그녀의 말투, 그녀의 몸 동작 하나 하나가 내가 알고 있는 한 여자를 빼다 박았기 때문이다. 공명이 크면 이해도 쉽다. 브루노(알랭 샤바)를 스쳐 지나가는 것도 고개를 끄덕이게 만들고, 한 마디도 지지 않고 되받아치는 것도 씁쓸한 미소를 머금게 만들며, 프랑크(제라르 랑뱅)가 끝내 그녀의 아파트 입구에서 돌아서고 마는 것마저도 이해가 된다.
나는 [타인의 취향]을 보면서 새삼스럽게 예술의 기능에 대해 생각했다(솔직히 말하자면 영화가 예술인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지만). 예술은 어떤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노력이 아니라 그것을 이해하려는 노력이다. 예술은 스스로 극히 개인적이고 내밀한 체험이라고 믿고 있는 것들이 실은 객관화될 수 있는 보편적 체험들의 한 유형임을 확인시켜준다(그 확인의 과정은 위안과 동시에 서운함을 준다. 아, 나만 그런 게 아니었구나 하는 위안과 나만의 것인 줄 알았던 것을 대중과 공유하게 되는 데서 오는 서운함).
마니를 생각한다. 그녀는 자유분방하고 제 멋대로인 것 같지만 자신만의 스타일을 가지고 있다. 그녀는 사랑이 모든 것을 해결해 주리라는 손쉬운 믿음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 삶의 스타일을 바꾸라고 요구하는 애인에게 그녀는 고개를 가로 젖는다. 어떤 뜻에서 삶의 스타일이란 곧 삶 그 자체일 수도 있는 것이다. 마니는 자신의 스타일을 고수하고, 그래서 그녀는 외롭다. 그녀의 주위에는 늘 사랑을 노래하는 이성들이 득시글대고, 그녀는 그들 사이를 유유자적하게 헤엄쳐 다니는 듯 하지만, 정작 사랑에 가장 목말라하는 것은 그녀 자신이다. 그녀는 결국 누구에게도 소유되지 않는 대신 누구도 소유하지 못한다.
마니의 영혼에는 ‘정처’가 없다. 그것이 그녀가 매혹적인 이유다. 동시에 프랑크가 돌아서는 이유이기도 하다. 순환되는 모순 투성이의 이 상황을 종식시킬 방법을 나는 알지 못한다. 마니를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다. 그리고 그립다. 마니, 오 마니, 너는 지금도 여전히 너처럼 살고 있겠지? 이 글을 읽는다면 연락줘. 서로를 위해 아무 것도 해줄 게 없다는 것쯤이야 나도 알아. 그냥 묵묵히 마주 앉아 와인이나 몇 병 눕히자구. 창틀을 뒤흔드는 이 미친 장마 빗줄기나 바라보면서 말이야.
[동아일보] 2001년 8월 3일
그러면 아닌줄 알면서도.. 작가, 스탭.. 샅샅이 다 살펴보게 되죠..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