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그만 오토바이를 멈춰라
[비트]의 민
서울 강북의 신촌은 내게 있어서 정신의 고향이다. 껄렁했던 고교시절부터 중구난방의 대학시절을 거쳐 글을 써서 밥을 먹게된 이즈음에 이르기까지 나는 언제나 신촌 주변을 맴돌아 왔다. 하지만 이제 나는 내 고향의 ‘물을 흐리는’ 존재일 뿐이다. 신촌의 밤거리를 집 나온 소년들과 술 취한 소녀들이 접수하게 된 것은 오래 전의 일이다.
그 말썽많다던 수능시험이 끝난 직후여서 더욱 그런가. 요즈음 신촌의 뒷골목은 떼지어 거리를 휩쓰는 10대들이 게워낸 토사물들로 질펀하다. 이따금 화장이 안 어울릴만큼 앳된 얼굴을 한 소녀들을 옆에 끼고 한심한 패싸움에 몰두하고 있는 그들과 마주칠 때면 미소가 머금어지면서도 가슴이 짠하다. 그들 역시 20년 전의 내가 그랬던 것처럼 힘겨운 한 시기를 통과하고 있는 것이다.
미성년의 세계는 벗어났으나 성년의 세계에는 진입하고 싶지 않은 시기의 한복판에 민(정우성)이 있다. 대학사회든 깡패사회든 마찬가지다. 그는 기성사회의 그 어떤 부문에도 편입되고 싶지가 않다. 그래서 그는 나직하게 읊조린다. “나에겐 꿈이 없었다. 열아홉살이 되었지만 내겐 달리 할 일이 없었다.” 깡패조차 되기 싫었던 그에게 남달리 눈부신 싸움솜씨란 그저 떼어버리고 싶은 꼬리표였을 따름이다.
‘키 컨셉 신’(key concept scene)이라는 것이 있다. 캐릭터를 잘 드러내면서 영화가 표현하고자하는 바의 핵심을 비주얼(visual)하게 담아낸 신이다. 나는 영화 [비트]를 쓰면서 두 개의 키 컨셉 신을 만들었다. 하나는 오토바이를 탄 채 눈을 감고 두 손을 놓아버리는 신이다. 민의 뒷편으로 가로등과 터널이 멀어져갈 때 그 슬픔의 속도가 잘 느껴진다. 다른 하나는 노을지는 산동네 놀이터의 정글짐 위에 앉아 있는 신이다. 민은 이미 정글짐에서 놀기에는 어울리지 않는 나이다. 놀이터의 의미를 상실해버린 정글짐은 그래서 하나의 철창처럼 보인다. 홀로 그 위에 넋 놓고 앉아 노을을 바라보고 있는 민의 실루엣이 쓸쓸하고도 위태롭다.
신촌의 밤거리에서 민을 생각한다. 이제 곧 추운 겨울이 닥쳐올 것이다. 할 수만 있다면 오토바이를 멈추고 그를 정글짐에서 불러내려 술 한잔 따라주고 싶다.
[동아일보] 2001년 12월 11일
처음부터 끝까지 스타일이 넘친다고 해야하나.. 정우성이 고소영과도 너무나 잘 어울렸구요..
로미 캐릭도 매력적이죠.. 자신은 공부를 하고 민에게 야구장 갔다오게 했던 부분.. 재밌고, 슬프고, 멋지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