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 무섭다
장-클로드 브리소 [하얀 면사포](1989)
마틸드(바네사 파라디)는 문제아로 낙인찍힌 열일곱 살의 여고생이다. 학교는 물론 세상에 대해서도 냉소적이며 그 결과 성격조차 삐뚤어지고 되바라졌다. 프랑수아(브뤼노 크레머)는 이 학교의 철학담당 교사다. 그는 마틸드를 바로잡으려 무진 애를 쓴다. 여기까지만 읽어보면 무슨 전교조 영화 같지만 장-클로드 브리소의 [하얀 면사포(Noce Blanche, 1989)]는 뒤통수를 친다. 본래 연애감정을 다루는 데 있어서는 막가파(!)적 전통을 자랑하는 프랑스영화답게 이 두 남녀는 서로의 나이와 직분을 잊은 채 뜨거운 사랑에 빠져드는 것이다.
유부남인 남성교사와 날라리 여고생의 원조교제? 돈이나 학점이 거래된 것은 아니니까 원조교제라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일단 몸을 섞고 나자 그들은 대책 없이 뜨거워진다. 방과 후의 교실에서 정사를 나눈 다음 프랑수아 앞에서 다시 자위를 하는 마틸드의 모습은 너무도 고혹적이다. 실제로 내러티브가 빈약한 이 영화를 떠받들고 있는 것은 바네사 파라디의 놀라운 연기다. 개봉 당시 프랑스 최고의 10대 여가수였던 그녀는 신들린듯한 연기로 스크린을 완전히 압도한다. 그 결과 이 도발적인 사랑영화 [하얀 면사포]는 1989년의 프랑스 박스오피스 1위를 차지했고 유럽 전역을 강타했다.
마틸드는 과연 프랑수아를 사랑했을까? 선뜻 대답하기 힘들다. 프랑수아가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가정으로 되돌아가려 하자 마틸드는 표독스러운 암표범으로 변한다. 그녀는 프랑수아의 아내를 만나 모든 사실을 폭로함으로써 기어코 가정을 파탄시키고야 만다. 그 결과 둘 다 학교에서 쫓겨나지만 마틸드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여기까지 보면 그녀는 지독한 팜므파탈 정도가 아니라 거의 악마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하얀 면사포]는 또 한번의 충격적인 반전을 준비해 놓았다.
직장과 가정을 잃고 사회적으로 매장된채 허름한 소도시에서 외롭게 살아가던 프랑수아는 어느날 뜻하지 않았던 선물을 받는다. 자신의 집이 빤히 내려다보이는 길 건너편 2층집에 살던 사람이 유언으로 전해달라며 남긴 편지들이다. 편지를 읽고 그 2층집을 방문한 프랑수아는 뒤늦은 회한과 깨달음으로 짐승처럼 통곡한다. 마틸드는 그렇게 오랜 세월 동안 가까운 곳에서 남 몰래 프랑수아를 지켜보며 저 홀로 절망적인 사랑을 하다 죽어간 것이다. 마틸드는 정말 프랑수아를 사랑했던 것일까? 사랑이란 정말 그런 것일까? 알 수 없다. 겁난다. 사랑이 무섭다.
[동아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