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게 한계는 없다
티에리 도나르 ['97 K2](1994)
달새는 달만 생각하고 술꾼은 술만 생각한다. 내게 있어 그런 외골수적 집착의 대상은 산이다. 덕분에 중고 비디오숍을 뒤질 때에도 제목에 산 비슷한 것만 들어있으면 무조건 손이 간다. 티에리 도나르 감독의 [‘97 K2](1994)는 그런 경로로 내 손에 들어온 영화다. 이 영화의 한글 제목은 완전한 사기다. 1997년에 만들어진 것도 아니고 K2가 등장하지도 않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 낯선 제목의 중고비디오를 사는 데 전혀 주저하지 않았다. 니체주의 산악인으로 유명한 세계적인 극한등반가 마크 트와이트가 주연을 맡았던 까닭이다.
알프스 유럽영화 촬영소에서 제작한 이 작품의 원제는 [한계 끝까지 밀어붙이기](Pushing the limits)인데, 이는 영화 속에 등장하는 캐슬TV의 극한도전 생방송 프로그램의 이름이기도 하다. 영화는 이 프로그램의 여성진행자 피오나(피오나 젤린)가 샤모니 부근의 작은 시골역에서 알프스 지역 모험가 그룹의 리더인 지고르(마크 트와이트)를 만나면서 시작된다. 지고르는 피오나를 산악구조대용 헬기에 태우고 장쾌한 알프스의 하늘을 날며 그 아래에서 각자 자신의 한계에 도전하고 있는 모험가 그룹의 친구들을 하나 하나 소개한다.
[‘97 K2]는 결코 잘 만든 영화가 아니다. 플롯은 엉성하고 캐릭터의 탐구도 빈약하며 연기마저 어색하기 짝이 없다. 이유는 단순하다. 이 작품을 만들고 출연한 사람들이 모두 영화의 아마추어들인 까닭이다. 대신 그들은 각종 익스트림 스포츠의 세계 최정상급 프로들이다. 산악스키 텔레마크 회전의 일인자 크리스 피르스베르, 베이스점프의 달인 도미니크 글레즈, 극한 스노우보드의 기린아 에릭 벨랭…그 이름만으로도 가슴을 설레게 하는 이 멋진 사나이들의 숨막히는 퍼포먼스를 보는 것만으로도 내게는 충분히 황홀한 영화다.
지고르가 빙벽등반과 알프스 스키점프를 거쳐 빠져든 분야는 보드를 타고 하늘을 나는 스카이 서핑. 볼리비아의 티티카카 호수 위를 나르는 그의 모습은 그대로 자유를 향해 비상하는 한 마리의 독수리다. 영화의 클라이막스에 해당하는 지고르 최후의 도전은 하늘에서 뛰어내려 스카이 서핑을 하다가 낙하산을 펼치지 않은 채 알프스의 만년설 사면 위로 사뿐히 착지하여 그대로 스노우보드를 타는 것. 그것이 과연 가능할 것인가?
[한겨레] 2004년 1월 28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