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인 하프 위크>의 섹시 가이 미키 루크가 망가졌다. 얼굴도, 몸매도, 경력도 두루두루 망가졌다. 해를 거듭할수록 차근차근 망가졌다. 일관되게 망가졌다. 총체적으로 망가졌다. <씬 시티>는 망가진 배우 미키 루크에게 천사 같이 다가왔다.
찢어 발기려다 오려 두었다. 밑을 닦으려다 스크랩을 했다. 이건 진실이 아니니까. 먼 훗날 읽어 보면 껄껄 웃을 수 있을 테니까. 이깟 종이 조각 하나에 상처받을 이유는 하나도 없으니까. 1991년 4월 22일 모 스포츠 일간지에는 “자기 무덤 자기가 판다”는 제목 하에 미키 루크에 대한 기사가 실렸다. 내용인 즉 이러했다. “할리우드 통신 64회와 65회에서는 스타가 될 수 있으리라고 큰 기대를 모았던 여배우들 중 스타 문턱에서 주저 앉아버린 8명을 소개했다. 이번에는 모두들 다음의 말론 브랜도가 될 것이라 예측했으나 브랜도는커녕 그 아류 대열에도 못 들고 계속 고전하는 남자배우 6명을 상, 하 두 차례로 나누어 소개한다.” 그 상편 명단에는 숀 펜, 톰 베린저, 그리고 미키 루크가 올라 있었다. 근거 없는 험담이었다. “문자 그대로 길바닥에서 시작해(싸구려 권투 선수였다) 스타덤에 올랐던 미키 루크는 요즘 와서 어찌나 나쁜 영화에만 나와 나쁜 연기를 하는지 관객은 물론이요 비평가들도 도저히 못 봐주겠다고 고개를 내젓고 있다. (중략) 틀림없이 말론 블랜도의 영향을 받은 그는 <나인 하프 위크>나 <엔젤 하트>같은 영화에서 기형적이고 과다한 섹스에 정력을 쏟으며 자기 재주를 소모했고 그 후로 터무니없는 나르시시즘에 빠져들었다. 최근 미키 루크는 <할리와 말보로맨> 촬영을 마쳤는데 얼마 전 LA 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과거를 뉘우치는 듯한 발언을 해 할리우드 주류로 돌아오고픈 뜻을 비쳤다.”
지나간 후에, 애닮다 어이하리
중상 모략도 이런 중상 모략이 없었다. 미키 루크가 <나인 하프 위크>와 <엔젤 하트>에서 얼마나 멋있었는데 도대체 뭐가 기형적이란 말인가. 과다한 섹스에 정력을 소모했다니 도대체 이 작자(기자라고 부르고 싶지도 않았다)는 섹스와 섹스 신도 구분 못하는 바보 천치 아닌가. 할리우드에서 보낸 기사는 이렇게 건방져도 실어준단 말인가. 책임감 없는 언론에 대한 분노는 쉽게 사그러들지 않았지만 세월은 진실을 가려줄 거라 믿었다. 진실은 마지막에 승리하는 법이니까. 세월은 흘렀고 역시 그 작자가 틀렸다. 할리우드 통신원은 할리우드를 몰랐다. 스타 문턱에서 주저앉았다던 숀 펜은 말론 브랜도에 필적하는 대배우가 되었고, <할리와 말보로맨> 촬영 후 과거를 뉘우치는 듯했다던 미키 루크는 과거를 뉘우치기는커녕 더 심각한 과거를 만들어나가기 시작했다. 미키 루크가 할리 데이비슨을 타고 다니는 껄렁한 건달로 나왔던 <할리와 말보로맨>은 돈 보고 출연했다는 소문이 파다했던 영화다. 그해 8월 23일 개봉한 이 영화로 미키 루크가 거센 혹평을 듣기 딱 세 달 전, 미키 루크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넜다.
1991년 5월 23일 미키 루크는 프로 복서로 링에 올랐다. 플로리다에서 열린 라이트 헤비급 데뷔전에서 미키 루크는 판정승으로 스티브 파웰을 누르고 승리의 기쁨을 안았다. 그러나 그것은 재앙의 전조였다. 10년이 넘게 어렵게 쌓아온 모든 것들이 하나 둘 무너지기 시작했다. 체육관을 운영하는 등 복싱에 돈을 쏟아붓느라 재산을 탕진했고, <와일드 오키드>(1990)에서 만난 두 번째 부인 캐리 오티스에게 주먹질을 해 이름을 더럽혔다. 간간히 <화이트 샌드>(1992) <미키 루크의 추적자>(1994), <미키 루크의 FTW>(1994) <미키 루크의 풀 타임>(1994) 등 허접한 영화에 출연했지만 마음은 콩밭에 가 있었다. 복싱 연습으로 망가진 얼굴로 촬영장에 나온 그를 모두들 한심하게 생각했다. 망가진 얼굴을 복구하느라 성형을 했는데 성형한 얼굴에 펀치를 맞으니 얼굴이 더 망가져갔다. 얼굴만 망가진 게 아니라 뇌도 망가졌다. 뇌 손상이 심각한 지경에 이르자 의사가 한 마디했다. “미키, 돈을 얼마나 벌길래 복싱을 하지? 이봐. 이 테스트 결과 좀 봐. 당신 뇌는 당신이 번 돈을 셀 수도 없는 지경이라고!”
1995년 미키 루크는 프로 복서로서 은퇴했지만 복싱은 그에게 돈이 아니라 꿈이었다. 그는 글러브를 완전히 벗지 않았고, 경력은 완전히 회복되지 않았다. 어쩌면 조금도 회복되지 않았다. 1998년 캐리 오티스와 이혼을 했다. 그의 말로는 “아내도 잃고 집도 잃고 친구도 잃고 영혼도 잃고 혼자 외로웠다.” 그렇지만 미키 루크는 소 잃고 외양간을 고치지도 않았다. 머리카락이 빠져가는 와중에 탄탄하던 배가 불러왔고 주먹만하던 팔각형 얼굴이 점차 늘어졌다. 외모는 점점 요상 망측해졌고, 필모그래피는 점점 괴상 망측해졌고, 별볼일 있던 스타 인생이 별볼일 없는 패배자의 인생으로 가속도를 밟으며 추락했다.
모두가 놀라 버린 9 1/2
본명이 필립 앙드레 루크 주니어인 미키 루크는 1956년 뉴욕에서 태어났다. 일설에 의하면 1950, 혹은 1952년생이라는 설이 있다. 밑바닥에서 시작한 배우들 대부분이 나이를 엄청 깎기 때문에 1950년 생, 현재 우리 나이로 56세일 가능성이 크다. 그의 부모는 일곱 살 때 이혼했고, 이듬해 그는 엄마를 따라 마이애미로 이주했다. 의부의 오형제와 함께 한 집에서 살았으니 당연히 유년기가 평탄치 않았다. 학교는 다니는 둥 마는 둥 하고 축구, 농구, 야구, 오토바이, 그리고 복싱에 빠져들었다. 열세 살 무렵부터 글러브를 꼈다. 20여 차례 아마추어 경기에 출전했던 그는 배우의 꿈을 안고 나이 열아홉에 뉴욕에 상경한다. 눈물 젖은 글러브는 체육관 벽에 걸어둔 채로. 숱한 잡일을 하며 ‘배우 명가’ 뉴욕 액터스 스튜디오에서 5년간 연기 수업을 받은 미키 루크는 1979년 스티븐 스필버그의 <19417gt;로 데뷔한다. 이후 마이클 치미노의 <천국의 문>(1980), 로렌스 캐스던의 <보디 히트>(1982), 배리 레빈슨의 <청춘의 양지>(1982),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의 <럼블 피쉬>(1983) 등에서 두각을 나타내다 주연을 맡은 마이클 치미노의 <이어 오브 드래곤>(1985)과 에드리언 라인의 <나인 하프 위크>(1986)로 전성기를 맞는다.
<나인 하프 위크>는 미키 루크의 할리우드 출세작인 동시에 전세계적인 스타덤의 튼튼한 발판이 됐다. 검열이 미풍양속을 지키는 데 앞장섰던 1986년의 대한민국도 예외는 아니었다. <나인 하프 위크>는 2분 정도 자진 삭제한 상태에서 ‘연소자 관람가’로 개봉했다. 하지만 그 시절 연소자들에게 <나인 하프 위크>는 성교육 참고서와 같았다. 야하다는 소문이 중고등학교에 파다했다. 웬만한 남학생들은 볼 만큼 다 봤다고 했고, 웬만한 여학생들도 질세라 다 봤다고 했다. <나인 하프 위크>는 변두리 재개봉관과 ‘XX 예술극장’이라던 소극장을 돌며 1990년 무렵까지 극장 상영을 했고, 남대문에서 카피한 LD 디스크 복사본 비디오가 끈끈한 우정과 함께 돌고 돌았다. 미키 루크보다는 킴 베이싱어의 육감적인 몸매가 화제였지만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는 특유의 미소 덕에 미키 루크는 곧장 섹시 가이의 대명사가 되었다. 홍콩 스타들의 급부상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할리우드 중심의 팬덤을 가지고 있던 한국 청소년 영화 문화에서 미키 루크는 반(反)람보파 청소년들에게 절대적인 지지를 얻으며 스타로 등극했다. 반경 10km 이내 학교에서 제일 섹시한 남학생의 별명이 미키 루크였다. 이름을 알 길 없는 그 남학생의 별명을 여학생들은 그렇게 불렀다.
언젠가 <지구를 지켜라!>의 장준환 감독이 ‘고백할게. 실은 나 이 영화 좋아해’라는 모 영화지 특집 기사에서 <나인 하프 위크>를 꼽았던 적이 있다. 정말 반가웠다. 천재 감독과 나는 동시대를 호흡한 청소년이었던 것이다. 내용인즉 이러했다. “중학교 때였다. 영화가 너무 야해서 전주 시내 최초로 주민등록증 검사를 한다는 뉴스는 이제 막 2차 성징이 시작된 아이들의 호기심을 필요 이상으로 자극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극장 뒷문이 열린 것을 보았다. 그 문으로 극장에 들어가다 붙잡힌 아이들은 간판 그리는 아저씨가 옷을 벗기고 고추에 페인트를 바른다는 둥, 온몸에 페인트를 바른 어떤 아이는 피부가 숨을 못 쉬어서 숨을 거두었다는 둥 별별 해괴한 괴소문으로 유명한 그 문이 열렸다. (중략) 영화는 입에서 단내가 나도록 충격적이었고 아마도 그때 충격이 나의 이상 성격을 형성하는 데 적지 않게 기여했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지옥의 링으로 인도한 자작극
충격은 멈추지 않았다. 장준환 감독에게 <나인 하프 위크>가 ‘고백할게. 실은 나 이 영화 좋아해’였다면 나에겐 미키 루크의 후속작인 <엔젤 하트>(1987)가 그런 영화였다. <나인 하프 위크>에서 달걀, 올리브, 체리, 체리 토마토, 딸기, 푸딩, 우유, 샴페인으로 이어지는 블라인드 패팅과 기기묘묘한 SM 장면으로 순진한 여고생의 성에 대한 고정관념을 산산이 부숴놓았던 미키 루크는 ‘할리우드 탄생 100주년 기념작’과 ‘알앨런 파커’라는 기품 있는 카피에 속아 <엔젤 하트>를 본 그 순진한 여고생을 다시 한 번 충격으로 몰아 넣었다. 일요일 아침마다 온 가족이 즐겨 봤던 <코스비 가족 만세>의 예쁜 딸 리자 보넷이 출연한 것까진 좋았으나, 나이 차가 좀 많이 나는 이 흑백 커플이 벽에 기대지도 않고 서서도 할 수 있다는 걸 보여 준 섹스 신은 충격 그 자체였다. 게다가 반전은 말해서 무엇하리. 이제와 돌이켜 보면 <엔젤 하트>는 <올드보이>와 <식스 센스>를 뒤섞은, 굳이 말하자면 근친상간 더하기 친족 살해라는 이중의 금기를 건드린 영화였다. 순진한 여고생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미키 루크는 주정뱅이 시인으로 출연했던 바벳 슈로더의 <술고래>(1987)와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IRA 요원으로 출연한 마이클 호지스의 <죽는 자를 위한 기도>(1987)로 필모그래피를 이어가며 충격의 수위는 낮추고 멜랑콜리한 분위기를 높이는 선택을 한다. 그리고 에릭 크랩턴의 멜랑콜리한 블루스로 안 되는 영화를 쳐 바른 <홈보이>(1988)로 극장가에 나타났다 곧바로 비디오 가게로 직행한다. 한적한 바닷가 마을에 나타난 떠돌이 복서 얘기 <홈보이>는 영화적으론 할 말이 거의 없는 졸작이다. 팬이랍시고 ‘프로 테이프’를 산 나조차도 15년 넘게 다시 보지 않았다. 하지만 이 영화는 미키 루크의 지나온 삶과 앞으로의 삶이 교차하는 이정표로 무척 의미심장하다.
할리우드에서 먹고살 만해진 미키 루크는 <엔젤 하트> 때 촬영감독 마이클 세레신과 엉뚱한 일을 꾸민다. 지금은 <해리 포터와 아즈카반의 죄수> 촬영감독으로 제자리를 찾아갔지만 당시 앨러 파커의 전속 촬영감독으로 명성을 떨치던 마이클 세레신은 아마도 연출에 대한 욕심이 있었나 보다. 아니면 돈에 욕심이 있었거나. 미키 루크는 자신이 10년 동안 쓴 시나리오로 복서 영화를 만들 테니 당신이 연출하는 게 어떻겠냐고 세레신을 꼬셔 <홈보이>를 제작한다. 시나리오 작가 에디 쿡은 미키 루크의 필명, 여자 주인공 데브라 파우어는 그의 첫 번째 부인. 척 봐도 <홈보이>는 졸지 스타의 한풀이용 자전적 무비가 되겠다.
<태양은 없다>에서 삼류 복서 도철(정우성)을 그토록 측은하게 묘사했던 시나리오 작가 심산은 한 칼럼에서 “하지만 나는 이 영화를 좋아한다. 알코올 중독에다 펀치 드렁크 증세까지 앓고 있는 삼류 복서 조니(미키 루크)의 희망 없는 눈동자가 못내 잊혀지지 않는다. (중략) 배우로서의 전성기는 그렇게 끝나버렸다. 전적도 형편없다. 하지만 그는 후회 없다는 듯 비참하게 일그러진 얼굴로 힘겹게 웃으며 링에서 내려오곤 했다. 수백 억 연봉의 할리우드 스타가 무명의 권투 시절을 그리워한 것이다. 미키 루크는 멋진 남자다.” 나도 그렇게 믿고 싶었다. 정말 그렇게 믿고 싶었다. 사이비 속편 <나인 하프 위크 2>(1997)를 보기 전까진 말이다.
오늘은 주먹이 울어도
예전에 미키 루크와 브루스 윌리스를 헷갈리는 사람을 보면 도무지 이해가 안 됐다. 미키 루크는 브루스 윌리스보다 머리카락도 많고, 눈도 예쁘고, 몸매도 좋고, 연기력도 출중한, 한마디로 더 멋있는 배우라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브루스는 여전히 톱 스타고, 미키는 한물 간 스타인 요즘은 두 배우를 혼동하는 사람은 눈 씻고 찾아봐도 없다. <씬 시티>에선 한 영화에 출연했지만 지금은 아무것도 닮아 보이지 않는다. 비교적 팽팽한 얼굴로 32세 연하의 린제이 로한과 뻐기듯 염문을 뿌리는 브루스 윌리스와 얼굴을 알아보는 사람이 있을까 전전긍긍하며 슈퍼마켓에서 직접 카트를 밀었다는 미키 루크는 이제 부와 명예, 모든 면에서 급이 다른 배우가 되어버렸다. 자기 무덤은 자기가 판 것이라지만 세상은 참 냉정하다. 성형 부작용으로 오묘한 표정을 잃어버린 미키 루크의 얼굴도 냉정하다.
오직 미키 루크가 출연한다는 이유로 219분짜리 고문을 견딜 수 있었던 <천국의 문>, 멋있는 스릴러의 멋진 조역으로 출연했던 <보디 히트>, 그늘진 청춘의 페이소스가 느껴졌던 <청춘의 양지>와 <럼블 피쉬>. 흐릿하게 빛나는 눈동자, 넓고 바른 이마와 콧날, 앞니가 빠져 입술을 다문 채 웃었다가 결국 ‘루크 스마일’이 되었던 그 미소, 그리고 비음이 섞인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까지 예전의 미키 루크의 것 중 지금도 미키 루크의 것은 거의 없다. 그래도 <버팔로 ‘66>(1998) <목요일>(1998) <플레지>(2001) <스펀>(2002) 등 인디영화에 출연하며 망가진 경력을 조금씩 회복하던 그가 프랭크 밀러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으며 <씬 시티>(2005)에 마브 역으로 출연하게 된 건 기적이다. 오랜만에 길게 출연하는 미키 루크를 보니 감회가 새롭다. “불결한 동네 불결한 방, 난 여신을 바라본다. 그녀는 날 원한다고 말한다. 분명 행운이다. 자비로운 천사가 아니었다면 나 같은 놈한테 누가 이런 밤 선사했겠나!”라고 읖조리는 마브의 내레이션이 마치 미키 루크 자신의 내레이션으로 들린다.
1989년 서울에서는 세계성체대회라는 천주교 행사가 열렸다. 얼마 전 세상을 떠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참석하기도 했던 이 국제 행사에 앞서 서울 허리우드극장에선 <프란체스코>(1989)라는 종교영화를 상영했다. 개인적으로 미키 루크의 출연작 중 가장 감명 깊게 본 영화다. 아씨씨의 성인 프란체스코가 누군지도 모르던 미키 루크는 이탈리아 감독 릴리아나 카바니가 <홈보이> 촬영장까지 삼고초려하자 출연을 결심했고, 이 영화로 난생처음 칸의 레드 카펫을 밟았다. 영화는 방탕한 삶을 살던 대부호의 아들이 “너희는 가진 것 다 팔아 가난한 자에게 나눠 주라”고 했던 예수의 말씀을 따라 청빈한 수도자가 되는 프란체스코의 일대기를 그렸다. 오늘 악으로 물든 도시 '씬 시티'에서 하룻밤 만에 사랑하게 된 여자의 원수를 갚으려 악전고투하는 마브 역의 미키 루크를 보면서 하고 많은 영화 중에 <프란체스코>가 떠올랐다. 얼굴은 몰라보게 변했지만 미키 루크에겐 여전히 타락과 순수가 공존한다. 반창고가 됐건 고행의 상처가 됐건 미키 루크의 얼굴에는 아픈 흔적이 보인다. 심산은 링에서 내려오는 미키 루크를 보고 멋진 남자라고 했다. 나는 <씬 시티>가 끝난 다음 멋진 배우라고 말하고 싶어졌다. 하지만 지금 말고 나중에. 하는 거 봐서 나중에. 고이 아껴두었다가 나중에.
필모그래피
<씬 시티>(2005) <맨 온 파이어> (2004) <가장과 익명>(2003)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멕시코>(2003) <스펀>(2002) <플로우>BMW 단편 프로젝트(2001) <플레지>(2001) <애니멀 펙토리>(2000) <겟 카터>(2000) <목요일>(1998) <버팔로 '66>(1998) <포인트 블랭크>(1997) <레인메이커>(1997) <나인 하프 위크 2>(1997) <더블 팀>(1997) <미키 루크의 엑시트 인 레드>(1996) <블렛>(1996) <미키 루크의 폴 타임>(1994) <미키 루크의 FTW>(1994) <미키 루크의 추적자>(1994) <화이트 샌드>(1992) <광란의 시간>(1990) <와일드 오키드>(1990) <프란체스코>(1989) <쟈니 핸섬>(1989) <홈보이>(1988) <죽는 자를 위한 기도>(1987) <술고래>(1987) <엔젤 하트>(1987) <나인 하프 위크>(1986) <이어 오브 드래곤>(1985) <럼블 피쉬>(1983) <그리니치의 건달들>(1983) <용의자>(1982) <청춘의 양지>(1982) <보디 히트>(1981) <살인 목격>(1980) <천국의 문>(1980) <1941>(1979)
한승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