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심의 위헌 판결, 부산국제영화제 시작, 그리고 각기 다른 개성을 지닌 신인감독들의 대거 등장. ‘한국영화의 르네상스’라는 수식어가 유난히 많이 오르내렸던 1996년은 1980년대 이후 한국영화계에 있어 가장 중요한 변화의 해였다.
1996년의 한국영화를 회고할 때 가장 상징적으로 연상되는 장면은 송일곤 감독의 모 통신회사 CF다. 폴란드 국립영화학교 우츠의 어느 영화 촬영현장, 한국에서 온 어머니의 전화를 받고 눈물을 흘리던 한 영화 유학생의 모습이 공중파를 탔다. 흔히 영화로부터 연상되는 ‘딴따라’라는 선입견을 넘어 영화 ‘공부’와 ‘유학’이라는 시선, 그리고 마치 한 편의 예술영화에서 편집된 듯한 CF 화면이 단순한 ‘일반인 출연 CF’ 그 이상의 묘한 정경을 자아냈다. 당시 앞서 폴란드 우츠에 유학 중이던 선배 문승욱 감독을 만나 폴란드 유학을 결심했던 송일곤 감독은, 어느 날 한국으로부터 걸려온 한 통의 전화에 고민했다. 처음에는 광고 모델 제의를 거절했지만 학비와 영화 제작비 마련을 위해 출연을 결심했던 것. 그렇게 다른 전공 유학생의 일상과 별 다를 바 없을 한 영화 유학생의 모습이 광고에 담겼다. 더불어 박종원, 박철수 감독 등 국내 유수 중견감독들이 함께 참여한 ‘명품TV' 광고의 한 토막처럼 영화감독이라는 직함이 어떤 브랜드로 다가오는 시기가 바로 그 즈음이었다. 국제영화제라는 타이틀을 국내 최초로 내건 부산국제영화제도 1996년 막을 올렸고, 기존 외화의 흥행 판세와 다른 극장가 지형도가 그려지게 된 것도 역시 이 즈음이다.
1996년의 한국영화를 설명할 때 가장 빈번하게 사용된 유행어는 바로 ‘한국영화의 르네상스’였다. 더불어 많은 영화인들이 주장해온 사전검열제도 폐지에 대해 헌법재판소가 당시 영화법이 위헌이라는 결정을 내리면서 중요한 변화를 모색하게 된 시기이기도 했다. 흥행 면에서도 강우석 감독의 <투캅스 2>와 강제규 감독의 <은행나무 침대>가 할리우드 대작들을 따돌리고 서울에서 각기 63만 명과 45만 명의 관객을 동원하며 주도권을 쥐기 시작했고 임권택 감독의 <축제>, ‘박철수 식 영화찍기’라는 말을 유행시켰던 박철수 감독의 <학생부군신위>, 여전히 젊은 감각을 모색했던 배창호 감독의 <러브 스토리>, 광주 민주화 운동의 심장부로 들어갔던 장선우 감독의 <꽃잎>, 스튜디오 촬영의 새로운 질감을 보여줬던 이명세 감독의 <지독한 사랑> 등 기존의 명망 있던 작가들도 활발한 활동을 보였다. 그 변경에서 박재호 감독의 두 번째 작품 <내일로 흐르는 강>은 동성애를 중요한 논쟁의 장으로 끌어냈다. 더불어 영화와 TV 사이에서 고석만, 김종학, 황인뢰 등 내로라하는 방송가 PD들의 영화감독 데뷔 계획이 알려진 가운데 결국 그 첫 번째 주자로 MBC 출신 이진석 PD가 <체인지>(1997)를 데뷔작으로 결정하고 촬영에 들어갔다. 신구 할 것 없이 1996년은 그야말로 용광로처럼 한국영화의 갈증이 끓어오르던 해였다. 물론 정지영 감독의 <빅토르 최> 제작이 무기한 연기되는 등 아쉬운 순간들도 있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먼저 1996년 한국영화의 가장 큰 흐름과 변화는 유례 없이 호황을 누렸던 각 신인감독들의 데뷔전에서 왔다.
홍상수와 김기덕, 새로운 작가주의의 출현
홍상수와 김기덕의 등장. 이 두 사람의 이름만으로 1996년 한국영화계가 지금에까지 지니는 의미의 대부분은 설명된다. 홍상수 감독은 동아수출공사에서 영화를 준비하던 중 구효서 작가의 <낯선 여름>을 추천 받고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을 떠올렸고, 김기덕 감독은 영화진흥공사 시나리오 공모전에서 김지흠이라는 가명으로 제출했던 <무단횡단>의 당선 소식을 들으면서 본격적인 영화계 데뷔를 하게 된다. 여기서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의 돌출은 1990년대를 통틀어도 한국영화계의 가장 인상적인 데뷔라 할 만하다. 그것은 한국영화사의 그 이전과 이후 어디로부터도 빚지지 않은 채 시작된 새로운 시간이었다. 완성 역시 순조롭지는 않았다. “전주에서 촬영이 시작되고 일부 촬영을 마치고 서울에 왔더니 영화 하지 말자는 얘기가 다시 나왔다. 그래도 영화사 대표님의 신뢰로 영화는 계속 만들어질 수 있었다. 현장에서 촬영할 때 곁눈질로 보면 가끔씩 스탭들이나 배우들이 뜨악해 하거나 ‘저 사람 왜 저래?’ 하는 식으로 바라본다는 느낌을 받기도 했다. 그냥 모른 척하고 따라주기를 기대하면서 간 것 같다. 그 사람들이 익숙해 하는 영화와는 다르기도 하니까 사실 그런 반응은 당연하다고 생각했다”는 게 홍상수 감독의 얘기다.
김기덕 감독의 사례는 말 그대로 더욱 입지전적이다. 유학이든 도제든 일체의 영화수업을 받지 않고 시작된 그의 시작은 한국영화가 전혀 새로운 곳에서, 전혀 다른 화법으로 만들어질 수도 있음을 증명했다. 무작정 프랑스로 떠나 개인적인 그림 공부를 하고 돌아와서는 시나리오작가협회에서 운영하는 시나리오 수업을 들으며 시나리오 습작을 시작한 게 1993년 즈음이었다. “사실 시나리오가 뭔지도 모르면서 타자기로 그냥 내 이야기를 쓰는 것에서부터 시작했다. 처음 몇 번은 예선 탈락을 거듭하다 차츰 32강, 24강에 들면서 성적이 좋아졌다. 그리고 <이중노출> 시나리오는 8강에 들었고 당선이 된 작품인 <무단횡단>은 여섯 번째 출품작이었다. 방송용 각본까지 포함하면 내가 써본 열 번째 작품이었다”는 그의 얘기다. 하지만 역량이 부족했던 영화사가 판권을 사면서 <무단횡단>은 영화화될 기회를 놓쳤고 대신 그는 다른 영화사에서 <악어>로 데뷔할 수 있었다. “<무단횡단>의 당선이 없었으면 <악어>도 있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때 시나리오를 들고 영화사에 직접 어필할 수 있는 방법도 알았고, 그렇게 ‘나도 되는구나’ 하는 자신감도 얻을 수 있었다”는 게 김기덕의 당시 기억이다. 그렇게 만들어진 초저예산 영화 <악어>는 안타깝게도 시작부터 개봉까지 저주받은 운명을 끌어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영화의 곳곳에서 보이는 독창적인 시선과 기발한 상상력은 한국영화의 빈틈을 충실히 메워주었다. 안정적인 시스템과 체계적인 유통구조를 거치지 않은 비운의 영화였지만, 그것은 그 자체로 이후 지금에 이르기까지 김기덕 감독만의 놀라운 생존방식으로 자리매김했다.
지금에 와서 생각하면 다소 낯설지만 양윤호 감독의 데뷔작 <유리>도 이들 못지 않은 주목을 받았다. 칸국제영화제 비평가 부문에 진출했기에 오히려 그들보다 더 인상적인 기록을 남겼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개념으로 가득 찬 불교 영화 <유리>는 조계종과의 마찰을 겪기도 하면서 역시 개봉의 큰 상처를 안았지만 한국영화의 새로운 시선을 또 한번 감지하게 했다. 이듬해 나온 영화들의 주인공이긴 하지만 PD 출신 이진석 감독의 <체인지>와 소설가 출신 이창동 감독의 <초록물고기> 촬영이 시작된 것도 외부로부터의 동력이라는 점에서 1996년의 중요한 기억이다. 특히, 기존 충무로 영화감독들과 전혀 다른 좌표에서 시작한 이창동 감독이 <그 섬에 가고 싶다>(1992) 조감독을 지나 여균동, 명계남과 함께 차린 이스트필름에서 <초록물고기>의 촬영에 들어간 것은 의미심장한 기억이다. 본인조차도 과연 시작할 수 있을까, 의문부호를 달았던 영화에 한석규로부터 출연하겠다는 전갈이 오면서 <초록물고기>는 난관 없이 시작될 수 있었다.
강우석과 강제규의 흥행 양강 구도
지난 2004년 초, 한국영화 초유의 천만 관객 신화를 나눠 썼던 <태극기 휘날리며>의 강제규 감독과 <실미도> 강우석 감독의 박스오피스 대결은 지난 1996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투캅스>로 ‘충무로 파워맨’ 입지를 다진 강우석 감독의 <투캅스 2>가 그해 흥행 1위를 기록하고, 시나리오 작가 출신 강제규 감독이 데뷔작 <은행나무 침대>로 2위를 차지하면서 새로운 흥행 구도를 만들어냈다. 한국영화 흥행 3위를 차지한 장선우 감독의 <꽃잎>부터는 그해 한국영화, 외화 합산 흥행 10위권에 아예 들어가지도 못하기에 두 사람은 확연한 흥행 투톱이었다. 독학으로 시작해 도제제도 하에서 영화를 공부한 강우석 감독과 달리 강제규 감독은 중앙대 영화학과에서 영화를 공부하고 시나리오 작가로 영화계에 입문, 교과서적 단계를 밟아온 영화 인력이었다. 더구나 강제규 감독은 강우석 감독의 <누가 용의 발톱을 보았는가>(1991)의 시나리오 작가이기도 했으니 그 인연은 오래다. 여기서 <투캅스 2>의 연이은 성공으로 시네마서비스를 중심으로 한 이른바 ‘강우석 사단’은 탄탄한 입지에 서게 됐고, 다소 위험해 보이기도 했던 프로젝트 <은행나무 침대>가 성공을 거두면서 강제규 감독은 이후 <쉬리>를 꿈꿀 수 있었다. 이렇게 두 사람의 양강 구도는 이후 한국영화 활황의 도화선이 됐으니 1996년은 산업적으로도 남다른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해다.
1990년대만 해도 한국영화의 고질적인 문제로 지적된 것 중 하나는 항상 ‘장르의 다변화’였다. 그리고 한편에서는 정체불명의 ‘한국형 블록버스터’ 담론이 떠돌았다. <은행나무 침대>는 그 두 가지 화두를 이으면서 어떤 단초를 제공한 작품이다. 과거와 현재가 교차되는 복잡한 이야기 구조, 시대극의 시효가 다했다고 여겨지던 시점에서 디자인된 무국적적인 사극의 모양새는 분명 한석규 등 톱스타들의 캐스팅을 제외하고 전혀 흥행 코드를 읽을 수 없는 영화였다. ‘<사랑과 영혼>의 한국판’이라 할 만한 <은행나무 침대>는 기존 한국영화의 흥행 장르인 멜로적 요소에다, 한국영화의 고질적인 기술적 문제점을 몇 단계 개선한 세련된 특수효과로 관객의 기호를 파고들었다. 한편, 과거와 현재가 교차하는 시대극이라는 측면에서 <은행나무 침대>와 유사한 갈림길 위에 서 있던 배우 이경영의 감독 데뷔작 <귀천도>도 눈길을 끌었다. 볼거리로서 뮤직비디오 같은 화면과 홍콩 무협영화 스타일을 적극적으로 차용하고, 가수를 겸하는 배우 김민종의 주제곡 ‘귀천도애’를 내세워 새로운 흥행 전략을 제시했다. 이 모두가 적극적으로 분화하고 있던 당시 한국영화산업의 중요한 단면이라 할 것이다.
박헌수와 김용태, 유보된 장르영화 진화의 꿈
<은행나무 침대>의 성공 이면에서 가장 아쉬운 실패로 기억되는 영화는 박헌수 감독의 두 번째 영화 <진짜 사나이>와 김용태 감독의 데뷔작 <미지왕>이다. 두 영화 모두 기존 한국영화의 시스템 안에서 (긍정적인 의미에서) 다소 황당무계한 모험으로까지 나아갔다. <구미호>(1994)를 통해 한국적 괴담과 현대적 특수효과의 만남이라는 쉽지 않은 시도를 했던 박헌수 감독은 <진짜 사나이>를 통해 한 발짝 더 나아갔다. 일상에 찌든 자동차 외판원의 로드무비인 이 영화에서 그는 각각 서로 다른 색깔의 악당들인 ‘빨노파’라는 범죄조직에 쫓기게 된다. <은행나무 침대>와는 또 다른 의미에서 할리우드 스타일의 추구였던 이 영화는, 자동차 추격전과 총격 신 등 순수 ‘오락영화’라는 차원에서 당대 한국영화의 최대치에 가 닿으려 했다.
같은 해 <축제>를 제작하며 <장군의 아들> <서편제> 등 임권택 감독 영화의 중심무대였던 태흥영화사는 모처럼 신인감독 영화에 착수한다. 과거 태흥영화사가 제작했던 이두용 감독의 <돌아이>(1985)가 현대적 액션영화를 시도하며 흥행의 새로운 국면을 만들어냈다면, 10여 년이 지나 대대적인 홍보와 더불어 시작된 김태용 감독의 <미지왕>은 코미디영화의 새로운 지점을 보여주리라 기대를 모았다. 당시 태흥영화사 홍보를 맡았던 현 PL엔터테인먼트 송혜선 대표는 “몇 년 뒤 만들어진 정병각 감독의 <세븐틴>(1998)과 더불어 <미지왕>은 태흥영화사로서는 쉽지 않은 시도였다. 시대의 변화, 충무로의 변화와 더불어 젊은 감각과 접속하려는 시도였다”고 말한다. 그만큼 1996년을 전후해 충무로의 전통적 영화사들도 끊임없이 변화의 길을 모색하고 있었던 것이다. 서강대 신문방송학과에서 학부와 대학원 과정을 마치고 뉴욕대학교 영화과 대학원에서 영화를 공부한 김용태 감독은 서태지와 아이들의 ‘환상속의 그대’ 뮤직비디오로 이름을 알린 상태였다. “맨 처음 떠올린 제목은 섹스 코미디 장르라는 생각에서 <떡>이었다. 그런데 한국에 온 뒤 나중에 한 대학생에게서 들은 ‘미친놈 지가 왕자인 줄 알아’가 떠올라 엉겁결에 <미지왕>이라는 제목을 달았다.” 당대의 유행어로부터 불현듯 시작된 <미지왕>은 분명 한국영화계 안에서 전대미문의 영화였지만, 바꿔 말해 UFO의 운명을 지닐 수밖에 없는 영화이기도 했다.
‘젊은 영화’라는 관점에서 보자면 이병헌이라는 당대 청춘 스타의 이름으로 귀결되는, 또한 ‘미디어 스타=흥행의 보증수표’라는 공식이 들어맞지 않았던 당시 상황을 증명해주는 두 개의 또 다른 실패가 있다. 바로 김성수 감독의 <런어웨이>(1995년 12월 30일 개봉)와 임종재 감독의 <그들만의 세상>이다. 각각 1980년대 한국영화 작가주의를 양분해온 박광수 감독과 장선우 감독 연출부 출신이라는 점에서 그 데뷔작의 무게는 커 보였다. 기본적으로 필름 누아르의 자장 안에 있는 이 영화들에서 배경은 도시이고, 주인공 남녀는 누군가로부터 쫓기고 있으며, 완결된 스토리텔링보다 스타일리스트로서의 현란한 감각이 전면에 부각되고 있었다. ‘도시’를 감각하는 그 시선은 한국 장르영화에 있어 전에 없던 것이었지만 공감할 만한 정서는 어디론가 표류하고 있었다. 결국 두 사람은 1996년 같은 길에서 겪은 시행착오를 지나 자기만의 길을 찾게 된다. 김성수 감독은 장르영화, 액션영화의 자의식을 더욱 밀어붙여 이듬해 <비트>(1997)의 성공을 거두었고, “나에게 솔직하지 못한 영화라는 생각이 들어 늘 마음이 무거웠다”고 데뷔작을 회상하던 임종재 감독은 <스물넷>(2001)으로 돌아오게 된다.
유학파, 단편영화제 출신 감독 집단
1996년은 이른바 ‘유학파’라는 이름으로 분류할 수 있는 신인감독들의 전성시대였다. 앞서 나온 홍상수 감독, 김용태 감독 모두 유학파라 할 수 있으며 <세친구>의 임순례 감독과 <시간은 오래 지속된다>의 김응수 감독도 여기에 이름을 더한다. 1994년 1회 서울단편영화제에서 <우중산책>으로 최우수작품상 및 젊은 비평가상을 수상했던 임순례 감독은 진중한 드라마 <세친구>로 장편 데뷔했다. 그 전에 한양대 불어불문학과를 졸업하고 파리 8대학에서 영화를 공부한 그는 귀국 후 여균동 감독의 데뷔작 <세상 밖으로>(1994)의 스크립터로 경력을 쌓았다. ‘여성감독’이라는 이상한 용어 자체가 꽤 큰 울림을 지녔던 당시 상황에서 그의 등장은 신선했다. 더구나 학교와 부모, 사회와 군대 속에서 세 남자가 체험하는 지독한 폭력성과 획일성을 통해 보여준 주변인들에 대한 애정 어린 시선에서 역시 당대 한국영화가 잊고 있던 비판적 리얼리즘의 정서를 일깨울 수 있었다. “김구 선생을 암살한 안두희에 관한 영화를 준비하다 <세친구>를 시작하게 됐다. 여자감독이 만드는 남자들의 이야기라 낯설어하는 사람들도 있었는데, 기본적으로 어두운 청년기를 보낸 공통된 기억이 그리 다르지 않다고 봤다”는 게 그의 얘기다. 한편, 낯선 땅 러시아에서 어렵게 <시간은 오래 지속된다>를 완성해 귀국한 김응수 감독 역시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흑백영화인 <시간은 오래 지속된다>는 영하 30도가 넘는 모스크바의 혹한 속에서 다시 만난 동창생들의 회합을 통해, 1980년대의 정서와 시대정신을 끌어안는다. 영화제작소 ‘청년’에서 <어머니 당신의 아들>의 시나리오를 썼던 김응수 감독은 1991년 러시아로 유학을 떠나 모스크바 국립영화학교에 입학한 유일한 한국유학생이었다. 또한 헝가리 국립영화학교를 수료하고 돌아온 장윤현 감독은 1996년 <접속>의 촬영을 시작한다.
또한 여기에는 1994년 시작돼 1996년에 이르러 최고조에 달했던 서울단편영화제 출신 감독들의 리스트를 더할 수 있다. 서울단편영화제는 삼성영상사업단 주최로 단편영화 제작의 활성화와 신인작가 발굴을 취지로 시작됐으며, 부산국제영화제가 생겨나기도 전인 당시 영화제에 대한 일반 관객들의 관심은 놀라울 정도로 뜨거워서 매회 행사 때마다 장사진을 이루는 진풍경을 연출했다. 1996년 서울단편영화제의 본선 진출자들은 당시로선 주목받는 단편영화 감독들이었지만 이후 보여준 장편영화 데뷔 행보는 현재 한국영화계의 주요한 자산이 됐다. 먼저 임순례 감독은 1회 최우수작품상 수상자이고, 김용태 감독은 1995년 출품된 김본 감독의 <모범시민>의 촬영감독이었으며, 문승욱 감독은 1회 때 <어머니>로 심사위원상을 받고 2회 때 <오래된 비행기>로 예술공헌상을 받았으며 1996년 드디어 장편 데뷔작인 <이방인>의 촬영에 들어갔다. 서울예대 졸업 후 <오필리어 오디션>이라는 작품으로 역시 1회 서울단편영화제에 참가했던 송일곤 감독은 당시 폴란드에 유학 중이던 선배 문승욱 감독을 만나 우츠에 입학했고 1996년 <광대들의 꿈>을 출품한다. 당시 1996년 최우수작품상 수상자는 <해피엔드> <사랑니>의 정지우 감독의 <생강>이었으며 <소름> <청연>의 윤종찬 감독이 <플레이백>, <여고괴담> <아카시아>의 박기형 감독이 <과대망상>, <내 생에 가장 아름다운 일주일>의 민규동 감독이 <허스토리>, <여고괴담 4: 목소리>의 최익환 감독이 <살아있다는 증거>, <하얀방>의 임창재 감독이 <오버 미>, <새는 폐곡선을 그린다>의 전수일 감독이 <내 안에 우는 바람>을 출품하며 주목받았다. 서울단편영화제로서도 1996년은 가장 막강한 감독들의 격전장이었다.
10월 4일, 영화계 독립의 날
이상 신인감독들의 러시를 지나 무엇보다 1996년 최고의 이슈는 헌법재판소(이하 ‘헌재’)의 영화심의 위헌판결이다. 문제의 발단은 부산국제영화제로 거슬러 간다. “3개국 이상이 참여한 3년 이상 된 국제영화제가 아니면 초청작 모두 한국공연윤리위원회(이하 ‘공윤’)의 심의를 받아야 한다”는 1996년 당시 영화진흥법(이하 ‘영진법’) 시행령은, 첫 회 부산국제영화제를 개최하는 영화제 스탭에게 곤혹스러운 일이었다. 사전심의라는 이름으로 자행되던 검열의 압력에도 불구, 영화제는 ‘검열의 해방구’가 되었다. 여성의 과다노출을 관리하는 법이 만들어지던 시대, 부산의 극장에서는 <브레이킹 더 웨이브>의 성기 장면이 공개된 것이다. 정작 문제는 엉뚱한 곳에서 발생했다. 데이비드 크로넨버그의 신작 <크래쉬>를 수입한 영화수입사가 자체 검열한 프린트를 영화제에 출품한 것이다. 결국 <크래쉬>는 자동차와 섹스하는 장면이 삭제된 채 상영됐다. 수입사의 자체 검열이라고 하지만 <크래쉬> 사건은 한국영화 역사와 함께 해온 사전검열제도의 곪은 뿌리를 확인하는 수치스러운 결과였다.
부산영화제에서 명백히 확인된 사전검열제도의 모순은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은 1996년 10월 4일 해결의 실마리를 봤다. 흔히 ‘한국영화의 독립기념일’로 간주되는 이날, 헌법재판소의 심의위헌 판결이 내려진 것이다. “영화진흥법 제12조 제1항 및 제2항, 같은 법 제 13조 제1항 중 공연윤리위원회의 심의에 관한 부분은 각 헌법에 위반된다.” 영화의 사전심의를 규정한 영화진흥법 제12조에 대해 93년 위헌제청 신청을 했던 <닫힌 교문을 열며>와 90년 위헌제청 신청을 했으나 기각되어 91년 헌법소원심판을 청구한 <오! 꿈의 나라>가 헌법재판에 계류된 지 각 3년과 5년 만에 재판관 전원의 만장일치로 내려진 판결이었다. 이로서 한국영화 역사와 함께 시작된 사전검열이 마침내 사라지게 됐다. 영화 상영 전에 공륜의 심의를 받도록 하고, 심의를 받지 않은 영화의 상영을 금지하며, 필요한 부분을 삭제할 수 있도록 한 영화진흥법 조항은 이날로 효력을 상실했다.
검열 철폐를 주장해온 영화인들은 곧 ‘완전등급 분류를 위한 범 영화인 준비기구’를 구성했다. 민간자율심사기구와 등급외 전용관 설치문제가 핵심 사안이었다. 그러나 등급외 전용관을 포르노 전용관이라고 매도, 음란, 폭력물의 범람으로부터 청소년을 보호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면서 헌재의 기본 정신을 희석시키는 움직임이 대두됐다. 또한, 대책마련이 급해진 당시 문화체육부가 관련법규가 개정될 때까지 공윤으로 하여금 등급결정 업무를 진행하겠다고 발표해, 실제로 과거와 다를 바 없는 공윤의 심의가 자행되고 있었다. 결국 헌재 결정에 대한 상반된 반응은 당시 신한국당과 국민회의의 영진법 개정안에 그대로 반영됐다. 여야가 팽팽히 맞서는 가운데 10월 헌재 결정의 혁명성도 바래버렸다.
2001년 개정된 영진법에 의해 2004년 생겨난 제한상영관이 상영작과 홍보 방법이 없어 현재 모두 폐관이나 휴관한 것도 문제로 지적된다. 하지만 1996년 관계 당국의 영화검열에 관해 위헌판결을 내린 헌재의 결정이 이후 영화제작에 영향을 준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실미도>에서 적기가를 부를 수 있는 토대는 이때 마련된 것이라 할 수 있다. 광범위한 표현의 자유에 대한 논의도 이때부터 폭발했다.
외화시장의 다채로운 변화의 기운
2005년, 9년 만에 한국을 찾은 <비포 선셋>을 본 한국의 관객들은 남다른 감회에 젖었다. 이젠 제법 주름이 진 에단 호크와 줄리 델피가 자신들의 잃어버린 사랑을 추억하는 <비포 선셋>의 장면들은 단순히 영화 속 인물의 감상에 머물지 않았다. <비포 선셋>을 찾아보는 많은 관객들은 9년 전인 1996년, <비포 선라이즈>에 열광했던 그들이었다. <비포 선라이즈>는 당시 미국의 신세대 배우로 떠오르던 에단 호크와 프랑스 배우 줄리 델피가 유레일 기차에서 만나 짧고 순수한 사랑을 나누는 이야기다. 그러나 <비포 선라이즈>는 기존 멜로영화가 보여주었던 아름답고 동화 같기만 한 사랑이야기에 머물지 않은 색다른 멜로였다. 두 배우의 신선한 연기는 세상에 대한 숙고를 녹여낸 재치 있는 대사들과 잘 빚어놓은 듯 어우러졌다. 미국독립영화 최대의 축제인 선댄스영화제 출신 리차드 링클레이터 감독은 탄탄한 시나리오와 재기 있는 연출로 단박에 한국의 젊은 관객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저예산 영화인 <비포 선라이즈>는 관객 14만 7천 명을 동원하며, 흥행에 성공한 독립영화로 기록되었다.
당시 한국영화 관객의 선택은 여전히 UIP, 월트디즈니, 20세기폭스, 콜럼비아, 워너브러더스 등 5대 직배사가 수입하는 할리우드 액션영화에 머물러 있던 때였다. <인디펜던스 데이> <더 록> <미션 임파서블> <쥬만지> <이레이저> <트위스트> 등 볼거리로 무장한 할리우드 화제작들은 극장가의 중심이었다. 관객 63만 명을 동원한 <투캅스 2>와 45만 명을 동원한 <은행나무 침대>가 관객동원 베스트 10에 포함되어 수입 외국영화 흥행수익이 전해의 79.6%에서 77.6%로 줄어들었음에도 불구하고, 5대 미국 직배사의 수입영화들의 수익은 여전히 증가추세였다. 여름시장 대작전쟁을 벌이는 블록버스터 영화사들의 성장은 직배사들의 관객 동원력을 실감하게 해주었다. 여름 블록버스터 한 편의 성공만으로 1년의 수입이 보장되는 이런 추세 때문에 극장들은 저마다 블록버스터를 극장에 걸기 위해 직배사들의 B급 영화들을 소화해야 했다.
이런 시장구조에서 저예산 영화의 <비포 선라이즈>가 주목을 끌 수 있었던 것은 단순히 작품 한 편의 흥행성공이라는 돌출적 결과로 해석되지 않는다. 비디오 시장을 잠식했던 홍콩영화가 이미 95년 <옥보단>의 성공 이후에 쇠퇴의 기운을 띠고 있었고, 중국작품은 단 한편도 소개되지 않았다. 새로운 영화에 목말라하는 관객들의 눈은 이제 중국, 홍콩을 벗어나, 유럽과 미주 지역으로 넓어졌다. 미국의 독립영화들, 개봉관에서 좀체 상영되지 않았던 유럽영화들은 갈증을 해소할 좋은 처방전이었다. 우디 앨런의 <브로드웨이를 쏴라>가 국내 극장에 처음 개봉한 건, 아카데미 작품상을 수상했음에도 <애니홀>이 개봉하지 않은 것과 비교해보면 무척 고무적인 사건이었다. 2월 동숭시네마텍, 코아아트홀, 그랑프리 3곳의 예술영화관에서 개봉한 <브로드웨이를 쏴라>는 관객 5만 명을 동원하며 비주류 영화의 관객 동원의 가능성을 열었다. 제작비를 줄이기 위해 영화 전체를 16mm로 찍어 블로업한 마이크 피기스의 <라스베가스를 떠나며>, 브라이언 싱어의 저예산 스릴러영화 <유주얼 서스펙트>, 선댄스 출신의 네 감독이 모여 만든 옴니버스영화 <포룸>, <아이다호>로 미국 독립영화계에서 인정받은 거스 반 산트의 블랙코미디 <투 다이 포>, 팀 로빈스 감독의 <데드 맨 워킹> 등이 개봉되는 대로 모두 관객의 사랑을 받았다.
백두대간과 동숭시네마텍의 꽃이 피다
1996년 이렇게 관객들의 욕구가 제 자리를 찾아 분출할 수 있었던 데에는, 앞서 예술영화 전문 수입사인 백두대간과 우리나라 최초의 예술영화 전용관인 동숭시네마텍 개관의 공이 컸다. 그 노력의 결실이 1996년에 이뤄졌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백두대간의 이광모 대표는 1994년 에어컨 하나 없는 열악한 사무실에서 시작, 좋은 영화를 소개한다는 신념하나로 유럽 각국의 영화들을 수입했다. 비가 죽죽 내리는 화면으로 골방에서 비디오를 보며 만족하던 비디오 세대들이 제대로 설비를 갖춘 큰 화면의 극장에서 영화를 볼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이다. 1995년 11월에 개관한 동숭시네마텍은 매달 평균 1편씩 12편의 작품을 꾸준히 상영하며, 문화를 향유하고자 하는 이들의 충전소 역할을 했다. 그리스의 거장 테오 앙겔로풀로스의 <안개속의 풍경> <율리시즈의 시선>이 상영됨으로써 유럽 예술영화들에 대한 환기가 이루어졌고, 국내에 처음 소개되는 유럽의 감독들이 늘었다. 핀란드 감독 아키 키우리스마키의 <레닌그라드 카우보이 미국에 가다>, 스웨덴 감독 잉마르 베리만의 <화니와 알렉산더>, 러시아 감독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노스탤지어>가 사랑을 받았다. 또 레오스 카락스(프랑스)의 <소년, 소녀를 만나다>, 스티븐 프리어즈(영국)의 <나의 아름다운 세탁소>, 데이비드 린치(미국)의 <이레이저 헤드> 등도 소개됐다.
기존 상업 외화들의 울타리에서 벗어나 이들 영화의 심미적인 스타일과 철학적인 주제의식들은 관객에게 영화가 단순히 오락의 수단이 아닌 해석의 여지를 남겨주는 하나의 텍스트라는 의식을 확산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다. 흥행 성적도 나쁘지는 않은 편이어서 이란 감독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는 5만 5천 명, <안개속의 풍경>은 4만 5천 명의 관객을 모으며 장기간 인기를 얻었다. 영국영화들의 소개도 활발했다. 대니 보일의 <트레인스포팅>, 피터 그리너웨이의 <영국식 정원살인사건>, 마이크 리의 <비밀과 거짓말>, 안토니아 버드의 <프리스트>등이 국내 극장가에 처음 선보이며 신선한 충격을 안겨주었다. 프랑스 장 주네의 <잃어버린 아이들의 도시>, 베트남 트란 안 홍의 <씨클로>, 캐나다 아톰 에고이얀의 <엑조티카>등도 소개됐다. 대다수의 관객들이 기존에 인지하기 힘들었던 미지의 새로운 영화가 극장에서 상영되고 화제가 됐다. 관객들의 지지를 얻었던 이들 감독들의 다른 작품들 역시 1996년 이후에도 화제를 모으며 소개됐다.
서울이 아닌 ‘부산’국제영화제
1996년 9월 13일부터 21일까지 총 9일간 부산에서 국제영화제가 열렸다. 부산국제영화제가 태어나게 된 계기는 1992년 이탈리아 페사로영화제였다. 한국영화특별전에 참석했던 당시의 부산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인 이용관, 김지석, 전양준은 그곳의 소박한 영화제 분위기에 감동 받았다. ‘우리도 영화제를 만들자’라는 의지가 불끈 솟은 것이다. 시도는 좋았으나, 실행까지는 결코 쉽지 않은 과정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건 분명 지각변동이었다. 영화제가 전무한 한국에서 국제영화제를 개최한다는 발상 자체도 쉽지 않은 결심이었지만, 그보다 더 큰 장벽은 ‘서울’이 아닌 문화의 불모지 ‘부산’을 개최지로 결정한 데 있었다. 언제나 대한민국 문화의 중심은 세계화 담론의 무대가 된 ‘서울’이었다. 서울에도 존재한 적 없는 국제영화제를 부산에서 개최한다는 것은 실로 아니 될 발상이었다. 부산국제영화제 개최에 대한 곱지 않은 시선은 비단 국내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당시 <패왕별희>(1994)로 중국이 칸국제영화제의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것을 비롯, 이마무라 쇼헤이 감독이 <우나기>(1996)로 황금종려상을 수상하는 등 중국, 일본이 아시아 영화계에서 주목받던 것에 비해, 국제영화계에서 한국영화의 위상은 미미하다고 할 수 있었다. 수상은커녕 한국영화는 비경쟁부문에 정말 드물게 출품되던 시절이었다. 낯선 한국이라는 국가, 그보다 더 낯선 부산이라는 도시, 그리고 그들에게 생소한 한국영화. 전통과 권위가 있는 세계 유수의 국제영화제들이 이미 자리 잡고 있는 마당에 감히 ‘월드 프리미어’상영을 고집하고 나선 이들의 도전은 무모해 보이기까지 했다.
‘될까?’라는 머릿속 물음표 대신, 영화제 스탭들은 그 의구심을 현실화시키는 데 노력했다. 영화제가 열리기 1년 전부터 혼돈과 열정의 나날이 계속됐다. 김동호 집행위원장을 비롯 프로그래머들이 칸영화제, 홍콩영화제 등에 참가, 부산영화제의 개최 소식을 알렸다. 예산을 위한 십시일반 모금도 진행됐다. 부산광역시의 지원과 후원자들의 도움으로 우여곡절 끝에 15억 원의 영화제 예산이 마련됐다. 또한 각 해외영화제에 참가, 한국영화에 대한 인식이 전무한 미주 유럽지역의 영화관계자를 만나 작품의 초청을 의뢰했다. ‘듣도 보도 못한 영화제의 사람을 만날 만큼 한가하지 않다’라는 이유로 문전박대도 겪어야 했다. 극장 전산망이 없던 시절, 부산은행의 전국 지점을 빌어 입장권 전산망도 마련했다. 그럼에도 1회 부산국제영화제의 결과는 ‘성공’이었다. 당시 할리우드 장르영화가 아닌 색다른 영화를 맛보고자 했던 젊은 관객들의 갈증은 부산국제영화제에 대한 열띤 호응으로 여실히 입증됐다. 잡지에서만 볼 수 있었던 세계의 화제작들이 부산에 모였다. 여러 외신들은 대체적으로 부산을 ‘젊은 영화제’로 평가하면서 ‘영화제에 희망이 보인다’는 코멘트를 덧붙였다. 1996년 우여곡절 끝에 개최된 부산국제영화제는 결국 1990년대부터 불고 있던 한국영화계의 새로운 바람을 확인하는 장이었다. 2006년 현재 한국영화를 이끌어 가는 감독들의 단편영화와 다큐멘터리가 초청됐고 지금 세계영화계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 아시아의 감독들의 신작이 이미 부산국제영화제를 거친 다음이었다. 심사위원으로 초빙된 각 영화제 위원들이 한국과 한국영화를 재발견하는 값진 계기가 마련됐다.
1회 영화제를 끝낸 뒤, 프로그래머들은 세계영화제에서 ‘부산’의 위력을 실감할 수 있었다. 그들은 더 이상 미지의 나라에서 온 외계인이 아니었다.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왔다는 소개는 자신감의 표현이었다. 11회를 맞는 부산영화제의 예산액은 첫해의 5배가 넘는 74억 원이다. 아시아영화제에 대한 전 지구적인 관심이 ‘부산’을 주목하게 만들었고, 허우 샤오시엔의 <쓰리 타임즈> 등 PPP 프로젝트들이 영화화돼 국제영화제에 선보이면서 부산국제영화제는 우수한 아시아영화들을 가장 먼저 만날 수 있는 공간이 되었다. 부산은 곧 ‘영화의 도시’의 다른 말이었다. 해외 작품들이 부산 현지 촬영을 추진하는가하면, 1999년 창설된 시네마테크 부산도 영화 도서관으로 자리했다. 부산국제영화제에 한 번이라도 초청되었던 아시아 감독들은 1~2년마다 신작을 들고 다시 돌아왔다. 10년이 지난 지금, 부산은 단순히 아시아영화를 발견하고 보여주는 것에 머무르지 않고, 새로운 영화들이 만들어질 수 있는 길을 열고, 그 영화들이 부산 이외의 다른 곳에서 상영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고 있다.
계속된 영화제의 홍수
당시 부산의 성공적인 국제영화제 입성은 무수히 많은 국제영화제들을 창설할 수 있는 촉매제가 됐다. 11월 처음으로 개최된 1회 인권영화제와 3회 서울단편영화제는 예상을 압도하는 커다란 지지를 얻었다. 특히 ‘인권’이라는 테마로 마련된 인권영화제는 ‘지역’을 넘어 ‘테마’로 묶이는 영화제로 발상의 전환을 가져왔다. 인권운동사랑방에서 주관한 인권영화제는 11월 2일부터 8일까지 이화여대 강당에서 개최됐으며, 엠네스티 창립 30주년 기념작인 <잊지 말자>를 개막작으로 전 세계의 인권 실태를 직시하게 하는 31편의 비디오 작품을 전 회 무료로 상영했다. 3회 서울단편영화제의 인기도 여전해서 씨티극장에서 11월 8일부터 시작돼 15일까지 매진사태를 기록하며 열렸다. 베트남 출신 기록영화 작가 트린 T 민하가 초대됐고, 영화제작소 ‘청년’의 정지우 감독이 <생강>으로 최우수작품상의 영예를 안았다. 1994년 시작과 동시에 독립영화의 최대 잔치로 부상한 서울단편영화제는 개봉 극장가를 가득 메운 상업영화들의 홍수 속에서, 대안적 영화를 꿈꿔온 사람들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기능을 했다. 또한 장차 영화인을 꿈꾸는 예비 영화인력들의 소통과 교류의 장이기도 했다.
이렇게 1996년을 전후한 한국영화계의 중요한 화두는 ‘신인감독들의 약진’, ‘사전심의 철폐’와 더불어 바로 ‘영화제’였다. 이후 농담처럼 ‘한국에서 영화제를 하면 무조건 성공한다’는 말이 돌 정도로 이후에도 다양한 영화제들이 생겨났고 저마다의 성공을 거뒀다. 이듬해 1997년에는 서구 중심이 아닌 우리 중심의 여성 정체성을 찾아간다는 취지 아래 ‘서울여성영화제’가 열렸으며 비주류 및 판타지영화들을 소개하는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도 시작됐다. 특히 부산국제영화제와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의 성공은 지방자치단체의 문화활동 가능성을 입증하면서 이후 전주국제영화제와 광주국제영화제 등 서로 다른 국제영화제들이 잇따라 개최되는 데 중요한 구심점이 됐다. 부산국제영화제를 중심으로 1996년이 보여준 ‘영화제의 도전’이 이후 수많은 영화제들의 산파 역할을 하며, 한국의 영화산업을 세계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선도 역할을 한 것이다.
주성철, 이화정 기자
1996년 한국영화계 10대 사건
1. 영화심의 위헌 결정
10월 4일, 헌법재판소가 영화사전심의 위헌제청사건에 대해 위헌 결정을 내렸다. 이후 민간자율심사기구와 등급외 전용관 설치를 골자로 한 대안이 제시됐지만, 공륜의 사전심의 체제유지를 주장해온 정부 여당과 영화인협회, 극장주 그리고 검열을 의무화한 청소년 보호법의 제정 등으로 10월 헌재 결정의 혁명성은 희석됐다.
2. 부산영화제 개최
96년 9월 14일부터 21일. 9일간 부산에서 1회 부산국제영화제가 개최됐다. 영화인 일부만의 축제라는 우려와 첫 행사의 미숙에도 불구, 부산영화제는 젊은 관객들이 참여하는 아시아 최고의 영화제로 평가받았다. 150만 이상의 관객이 부산을 찾았고, '영화를 보려면 부산으로 가라'는 말이 생겨났다.
3. 이태원. 곽정환 구속
영화배급업계의 비리가 드러나면서 그동안 영화배급망의 요로를 쥐고 있던 영화계 거물 (주)합동영화의 곽정환 (주)태흥영화의 이태원 대표가 구속됐다. 충무로의 영화사 대표 10명에 대한 소환조사가 있었고, 검찰 수사는 영화관계자 6명의 구속으로 일단락됐다. 삼성 대우 등 배급물량을 확보한 대기업들이 직접 극장 배급망을 짜기 시작하면서 충무로 토착자본이 흔들린 단적인 예.
4. 국내 애니메이션의 새로운 살길
<아기공룡 둘리>가 국내 애니메이션의 살길을 모색해줬다. '둘리'는 94년 <블루 시걸>, 95년 <헝그리 베스트 5>등 애니메이션들의 기대작들이 흥행 실패하고 난 뒤 거품을 빼서 성공작이었다. 주관객 층을 유아, 어린이로 한정하고 캐릭터를 통한 적극적인 마케팅을 펼쳤으며, 30만 명의 극장관객을 유치했으며 비디오 판매와 캐릭터 라이센싱비 등의 부가 수입도 얻었다.
5. 대종상 파문
4월 27일. '<애니깽> 한판 승리설'로 대종상이 떠들썩했다. 영화제 전 극장개봉은 물론 기자시사회도 하지 않았던 <애니깽>이 작품상과 감독상 등을 수상하자, 비난의 목소리가 불거진 것. <애니깽>은 낡은 형식에 NG 컷이 들어 있는 등, 완성도 마저 의심스러운 수준이었다. 대종상의 공정성 시비가 일었고 이 사태로 삼성문화재단이 발을 빼, 이듬해 대종상은 스폰서 구하느라 진땀을 빼야했다.
6. 푸른영상 압수수색
6월 14일 '푸른영상'의 압수수색과 음비법 위반으로 김동원 대표가 긴급구속. 이 사건은 영화인들을 연대시키는 동인이 되었고, '표현의 자유 쟁취 및 음반 및 비디오에 관한 법률 폐지를 위한 대책위원회'를 발족시키는 계기를 마련. 검열철폐를 위한 움직임의 기폭제가 되었다.
7. 저예산 영화의 가능성 마련
제작비 10억 원도 못 미치는 저예산 영화가 속출.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 <세친구> <학생부군 신위> <악어>등이 제작되었다. 저예산 제작방식이 한국영화를 이끌 하나의 산업전략으로, 또 젊은 감독들의 실험을 할 수 있는 수단으로 점쳐짐.
8. 한국영화 세계 진출 원년
한국형 블록버스터의 가능성을 실험한 강제규 감독의 <은행나무 침대>가 45만 명 이상의 관객을 모으며 <투캅스 2>에 이어 흥행 2위에 올랐다.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에 버금가는 뛰어난 완성도를 이루진 못했지만, 한국영화도 한번 해볼 수 있다 라는 자신감을 심어주었다. 연말 홍콩을 비롯, 동남아시아에서 개봉한 영화는 한국상업영화의 해외진출에 대한 새로운 모델을 제시했다.
9. <유리>의 불교계 마찰
양윤호 감독의 <유리>가 본심의 단계에서 조계종의 압력을 받아 신성모독과 표현의 자유의 충돌을 불러왔다. <유리>는 이후 칸국제영화제 '비평가부문'에 진출, 해외에서 호평 받았지만, 내부적인 심의의 문제 등으로 얼룩진 사건이었다.
10. 한국 퀴어시네마 원년
1996년은 퀴어시네마의 원년이라 부를 만하다. 정식 개봉된 <나의 아름다운 세탁소>뿐만 아니라 지하시장의 불법유통을 통해 수많은 퀴어시네마들이 퀴어 담론의 확산과 함께 은밀하게 기지개를 폈으며, 국내에서는 박재호 감독의 <내일로 흐르는 강>이 개봉해 토니 레인즈를 비롯 국내 비평가들과 국내 동성애 운동가들 사이에서 첨예한 논쟁이 벌어졌다.
조영각은 1996년 첫 번째 인디포럼을 개최했다
인디포럼과 독립영화의 기억
조영각(독립영화인, 서울독립영화제 집행위원장) | 지난 10년을 회상하는 것은 앞으로의 1년을 내다보는 것보다는 쉬운 일이다. 다만 그게 어려운 것은 과거의 기억들이 현재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다시 우리를 옥죄기 때문이다. 우린 그때보다 나은 시대를 살고 있는지. 그렇기에 조금 힘겹지만, 과거의 기억을 통해 조금이나마 현재를 반성하고 미래를 전망할 수 있다면 의미가 있겠다.
지금으로부터 만 10년 전인 1996년, 문화학교 서울 운영위원이었던 나는 첫 번째 인디포럼에 참여했다. 김윤태, 김성숙, 임창재, 이성강 등의 독립영화 감독들이 문화학교 서울에 독립영화 상영회를 제안한 것이다. 연간 약 100여 편 가량의 독립영화들이 만들어지고 있다는데, 그 영화들이 어떤 영화들인지 알 수도 없고 도무지 상영할 공간이 마땅치 않아서 독립영화인들이 의기투합했던 것이다. 문화학교 서울 시절 우리는 외국의 예술영화들을 주로 상영하고 공부했지만, 한국영화 발전에 독립영화가 대안적인 역할을 할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또한 좋은 관객이 좋은 영화를 만든다는 신념이 있었고, 그것을 우리는 ‘수용자 운동’이라고 불렀다. 그런 열망을 바깥의 동지들과 함께 실천할 수 있는 기회가 온 것이었다. 그러나 우린 아무런 경험이 없었다. 우선 극장을 잡아야 했는데 당시의 심의조항들은 우리를 난감하게 했고, 누군가 잡혀갈지도 모른다는 약간의 두려움이 있었다. 때문에 상설 상영장이 아닌 공간을 빌리기로 했다. 연세대 백주년 기념관 등을 찾아갔지만 우리에게 극장을 빌려주지 않았고, 대관료는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여러 경로를 통해 세미나장으로 쓰이던 연세대 동문회관을 사정사정해서 빌릴 수 있었는데, 그곳에는 아무런 영사장비도 갖춰져 있지 않았다. 16mm 영사기와 빔 프로젝트를 직접 설치하고 어렵사리 모은 63편의 영화를 5일간 상영했다.
1996년 5월. 그때의 기쁨과 흥분은 지금의 어떤 경험과도 바꿀 수 없는 것이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관객들의 행렬과 지금보다 침울했지만 열띤 감독과의 대화를 경험할 수 있었다. 상영이 끝나고 뒷풀이까지 이어진 대화들은 잡담과 농담이 아니라, 열정을 토해내며 미래를 도모하는 장이었다. 선배들의 영화를 통해 영화를 좀 더 가깝게 느낄 수 있었고, 난 이미 독립영화인이 돼가고 있었다. 인디포럼은 당시 흩어져 있던 창작자들이 모이는 계기가 되었고, 독립영화의 여러 현안들을 논의하는 단초를 마련해가기 시작했다. 인디포럼을 마치고 다소 도취된 상황에 있을 때 예상치 못한 사건이 터졌다. 독립 다큐멘터리를 만들던 푸른영상의 김동원 감독이 심의를 받지 않고 비디오를 제작, 배포했다는 이유로 구속되었다. 독립영화인들은 서둘러 대책위를 마련하고 표현의 자유와 영상관련 악법 철폐를 요구하며 거리 시위를 벌였다. 하여튼 이때부터 표현의 자유 문제는 매년 독립영화인들을 괴롭히는 단골 사안으로 등장했고, 그때마다 뭉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그리고 그해 10월 감격적인 자리가 있었다. 영화에 대한 사전심의는 위헌이라는 헌법재판소의 판결이 나왔고, 영화인들은 그 결정을 환영하며, 명동성당에서 <파업전야>를 상영했다. 대학시절 바리케이드를 치고 잡혀갈 각오를 하고 보던 영화가 거리에서 상영된 것이다.
이렇게 10년이 지났다. 독립영화인들의 노력으로 1997년, 2000년 두 번에 걸쳐 사전심의와 등급보류 위헌판결을 이뤄냈고, 표현의 자유는 신장되었으며 탄압의 대상이던 독립영화가 이제 국가와 기업으로부터 지원의 대상이 됐다. 당시 연간 100편이라고 회자되던 독립영화는 현재 연 500편을 가늠한다. 인디포럼뿐이던 독립영화제가 이제는 거의 매달 전국 곳곳에서 열린다. 인디스토리 등의 독립영화 전문 배급사를 통해 극장에서 정식 개봉하는 경우도 늘고 있다. 그렇다면 세상 많이 좋아졌나? 별로 그런 것 같지는 않다. 당시 표현의 자유를 외치던 영화인들은 더 절박하게 광화문에서 스크린쿼터 사수를 외치고 있다. 그리고 새만금에서 평택에서 그곳을 지키기 위해 외치고 있다. 아무튼 세상이 번듯하지 않기에 독립영화가 더욱 필요한 것 아닐까? 그때를 돌이켜 보면 지금이 그때보다 못하다는 자괴감이 들기도 하고 추억에 잠기기도 하지만 해야 할 일이 점점 더 많아진다는 게 좀 암담하다.
이정우는 1996년 '동성애자인권운동가'로 활동했다
새로워지려던 게이의 욕망
이정우(미술·디자인 평론가, 월간 '아트인컬처' 편집장) | 1995년 내가 조직한 서울대 이반운동모임 ‘마음001’이 1996년 새해를 맞아 동성애자 인권수치를 003으로 올려 ‘마음003’이 됐고, ‘LA 한인동성애자협회’가 한국의 게이인권운동조직인 ‘친구사이’의 이름을 따라 모임 명칭을 ‘LA 친구사이’로 개칭했으며, 레즈비언인권운동조직인 ‘끼리끼리’가 잡지 '또다른세상'을 창간했다(언제나 느끼는 것이지만, 한국 게이레즈비언단체들의 네이밍 센스는 참으로 괴이하다).
1월 10일 박재호 감독의 <내일로 흐르는 강>이 개봉, ‘퀴어무비’로 홍보됐고, 응큼하기 짝이 없는 영화평론가 토니 레인즈가 지원에 나섰다. 같은 달 18일 통신서비스 나우누리에 동성애자 모임 '레인보우'가 정식 개설됐다. 2월 16일엔 하이텔에도 동성애자 인권운동모임 '또 하나의 사랑'이 정식 개설됐다. 3월 22일엔 서울대 고대 연대의 동성애자 모임을 주축으로 한 '대학동성애자인권운동협의회'가 여성민우회 소강당에서 공식 발족했는데, 신문기사를 본 민우회 간부들이 문제를 제기, 정기모임 때마다 빌려 쓰던 공간을 못 쓰게 됐다. 여성운동의 이미지에 해를 입혔다는 이유로 게이들을 내쫓은 것이었다. 3월엔 이태원지역의 세 번째 게이 바 ‘트랜스’가 문을 열었다.
4월엔 건국대 동성애자 모임 ‘화랑’과 충북대 동성애자 모임 ‘동일인’이 조직됐고, 같은 달10일엔 ‘게이 엑티비스트’ 서동진의 책 <누가 성정치학을 두려워하랴>가 출간됐으며, 20일엔 폴 러셀의 게이 위인전(?)인 <게이 100>이 사회평론사에서 번역·출간됐다. 5월 10일엔 국내 최초의 레즈비언 바 ‘레스보스’가 마포에 오픈했고 5월 15일엔 ‘마음003’이 2회 이반영화제를 개최했다. 영화제란 아이템은 퀴어무비에 대한 관심보다는 가장 조직하기 쉬운 행사라는 이유 때문에 두고두고 지속됐다. 5월엔 친구사이가 153 전화사서함 서비스를 개설해 ‘숨은 게이’들의 ‘목소리 판타지’를 부추겼고, 대구·경북지역의 동성애자 모임인 ‘대경회’가 조직됐다. 6월 22일엔 이태원의 게이 클럽 ‘파슈2’에서 동인협 1주년 기념식이 스톤윌 항쟁 26주년에 맞춰 개최됐고, 6월엔 이태원에 게이 클럽 ‘스파르타쿠스’가 오픈, 바야흐로 이태원 게이 바의 전성기가 도래했음을 알렸다.
뜨거웠던 6월의 마지막 주엔 '씨네21' ‘서동진 씨의 시각 문제 있다’는 서브 카피를 단 토니 레인즈의 엉터리 평문이 실렸다. <내일로 흐르는 강>에 대한 격한 논쟁의 시작이었다. 나는 화가 났는데, 안하무인의 백인 평론가에게 화가 났다기보다는 그런 글을 좋다고 실은 기자들에게 화가 났다. 그래서 밤새 기자들 공부 좀 하라고 장문의 편지를 써서 이메일을 날렸는데, 그것을 읽은 기자들에게서 연락이 왔다. 만나서 밥을 먹으며 이야기를 좀 해보자고 했다. 기자 몇몇이 배석한 자리였는데, 대뜸 김영진 기자가 나의 편지를 평문 형식으로 조금 고쳐서 기사화하자고 제안했다. 나는 영화평론가가 아니라 싫다고 했지만, 결국 거듭된 요청에 고쳐보기로 했다. 그것이 7월 마지막 주 '씨네21'에 실린 “세기말의 동성애자는 영화를 믿지 않는다 - 토니 레인즈의 시각에 문제 있다”였다. 이 글은 영어로 번역돼 토니 레인즈의 재반론을 낳았고, 결국 9월 13일 개막한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좌담회(토니 레인즈, 서동진, 이정우, 크리스 베리 참가)까지 열렸다.
7월 첫째 주 '한겨레21'에 '성비파괴 가상 시나리오, 2020년 남성 대재앙'이란 기사가 실렸는데, 상당히 동성애자 차별적인 내용을 싣고 있었다. 나를 비롯한 인권단체 멤버들이 한겨레에 항의 방문을 갔는데, 결국 편집부에서 정정기사를 냈다. 8월 16일부터 18일 사이엔 ‘동성애자인권운동협의회’의 주최로 2회 동성애자 여름 인권캠프가 열렸는데, 장흥에서 열린 이 행사엔 130여 명이 참가했고, “우리는 한 가족”이 모토였다. 하지만, 1995에 열린 첫 캠프 때와는 달리 분위기가 그리 좋지 않았다. 행사 내내 게이 회원들과 레즈비언회원들이 싸우는 바람에 속이 상했던 기억만 난다. 일부 게이회원들은 캠프장의 빈방을 걸어 잠그고 섹스를 벌이는 ‘게이다움’(?!)을 과시하기도 했다.
10월 13일, 기존의 고루한 인권운동 형식에 갑갑함을 느낀 나는 대학로의 뮤지엄-바 ‘살’에서 해프닝 형식의 퍼포먼스를 벌였다. 제목은 '금호동 찬가'였는데, 사람들이 너무 많이 오는 바람에 즉흥적으로 공연 내용을 완전히 뒤바꿔야했다. 하지만 공연보다는 공연에 함께한 드랙쇼 걸 ‘마리’와 ‘고양이’의 뒤풀이 춤 대결이 더 재미있었다. 19일엔 동성애 신부의 이야기를 다룬 영국영화 <프리스트>가 개봉했다.
11월엔 동성애자 기독교인 모임 "로뎀나무그늘"이 발족됐고, 인권운동가로 활동하랴 디자이너로 일하랴 잠잘 시간도 모자라던 나는, 결국 애인에게 차였다. 그가 남긴 마지막 말은 “너는 애인을 배려할 줄 모르는 일 중독자.” 그간의 극심한 피로와 스트레스에 지친 나는, 12월 7일부터 11일까지 도쿄를 중심으로 활동하는 일본 게이·레즈비언 단체인 ‘오커’가 서울의 ‘친구사이’를 방문하고 떠난 며칠 뒤, 결국 독감에 걸려 쓰러졌다. 그러고 보니 다른 이들의 1996년은 어땠는지 궁금하다.
박무직은 1996년 청보법에 침을 뱉었다
만화강국 한국의 속살
박무직 (만화가) | 대한민국의 만화가들은 1996년부터 1997년까지를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 그 시절에 대한 회상은 1995년 12월부터 시작하는 것이 좋겠다. 그때 국내 애니메이션인 <헝그리 베스트5>와 <홍길동>이 개봉했다. 그리고 바로 1월에 <아마겟돈>이 개봉했다. 이들은 전부 한국 만화가 원작이었기에 만화와 애니메이션계 양쪽에서 경사였다. 당시 나는 한국 애니메이션 보기 운동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아마겟돈>을 보러 극장을 3번 가고, 총 7인분의 표를 샀었는데 유감스럽게도 <아마겟돈>을 포함한 국내 애니메이션이 전부 흥행에 참패하고 말았다. 세 편이 모두 실패하고 완성도에 대한 평가마저 좋지 않은 최악의 상황이었지만 여름이 되자 판세가 뒤집혔다. 1996년 6월 <아기공룡 둘리-얼음별 대모험>이 개봉했다. 극장에서 30만 명을 동원하고 그해 말 15만 장의 비디오를 팔아버렸다. 이 작품 역시 만화가 원작이었고 총감독 또한 만화가였다. 애니메이션은 둘리라는 캐릭터의 수명을 크게 연장시켰다. 훗날 둘리는 부천시 명예시민으로 주민등록증도 생기고 부천 송내역 근처에는 둘리 거리도 생겼다. 그해에는 시사만화계의 보물이던 박재동도 애니메이션을 하겠다며 ‘한겨레 그림판’ 연재를 그만두었다. 두 번째 서울만화애니메이션페스티벌(SICAF, 이하 시카프)이 열린 1996년은 만화와 애니메이션이 유래 없이 뒤엉키던 시기였다.
잠깐 일본 이야기를 해보면 그해 <슬램덩크>가 연재를 끝냈고 이후 <슬램덩크> 같은 작품이 없어서 한국의 만화잡지가 안 되는 거라는 괴주장을 종종 듣기도 했다. 1995년 말부터 투니버스에서 방영한 좀 삐뚤어진 애니메이션이 3월에 종방했는데 그때는 조용하다가 종방과 함께 서서히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이 위대한 작품을 전부 부르기 귀찮아서 그냥 ‘에바’라고 불렀다. 바로 <신세계 에반게리온>이다. 에바 붐은 ‘우리들’ 사이에서 타올랐지만 대외적으로는 월간 영화지 ‘키노’의 1996년 11월호 저패니메이션 대특집으로 물꼬를 텄다. ‘키노’는 에바 특집을 기획했지만 화보가 없자 나에게 연락해왔다. 나 또한 화보가 없어서 최찬정이라는 만화가를 소개했고 결국 무려 72페이지나 되는 대특집을 낼 수 있었다. 아무튼 에바 붐, 저패니메이션 붐은 오타쿠, 코미케, 코스프레 등을 알리고 일본만화에 대한 각계의 이해도 넓혀주었다.
여러 면에서 다사다난한 해였지만 만화계 최대 사건은 10월에 시작됐다. 신한국당 박종웅 의원이 청소년보호법(이하 청보법)이라는 법안을 국회에 제출했는데 그 법이 만화계를 작살낼 거라는 괴소문이 들렸다. 표현의 자유는 지켜져야 하므로 우리는 반대하기로 했다. 10월 꾸물대는 프로 만화가들보다 먼저 아마추어 만화단체 ‘아카’가 피켓 시위를 시작했다. 프로 만화가들의 시위는 11월 3일에야 열렸는데 1997년에 열린 3회 시카프는 11월 3일을 만화의 날로 제정했다. 모두 기억하라, 11월 3일을. 그건 정신의 날이다. 만화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청보법은 국회 통과됐고 1997년 7월 발효됐다.
그 결과는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만화에 대한 모든 것이다. 청소년보호법과 이를 지원하는 프로파간다는 서점에서 만화를 쓸어내 버렸다. 만화가 보고 싶은 독자들은(당연하지만 슬프게도) 대여점으로 몰렸고 대여점들은 폭발적으로 증가해서 시장의 구조를 바꾸었다.(물론 대여점 증가이유는 청보법이 다는 아니다. 비하인드 스토리는 좀 복잡하다) 1996년 ‘해적판 만화’에도 불구하고 국내 만화시장 규모는 당시의 영화시장 규모와 비슷했다. 그러나 청보법-대여점으로 이어지는 폭력으로 만화는 위기와 결혼하고 영화와 만화의 시장 규모 격차는 점점 벌어졌다. 한국의 성인만화 잡지는 다 망했다. 잡지를 중심으로 한 ‘메이저 만화’라는 만화의 유전자풀은 지금도 붕괴중이다. 그러나 한국만화는 강렬한 맛이 있다. 메이저 만화가 붕괴한 이후 인터넷 만화가 성장했다.(이 이야기도 좀 복잡하지만 결론은 그렇다) 한국의 인터넷 만화는 세계 최고를 자랑한다. 학습 만화가 시장에서 성장해 영화보다 먼저 1천만 독자 시대를 열었다. 한국의 학습만화도 세계 1위다.
메이저 만화계에서는 자리를 잃은 많은 만화가들이 혈혈단신 해외 진출을 시작했다. 1999년 양경일의 일본 진출 이후 ‘만화의 할리우드’인 일본만화계에 많은 작가들이 진출했고 미국만화계에도 진출했다. 1996년까지 메이저 만화계가 얼마나 거대한 에너지를 쌓았는지를 보여주는 증거다. 현재도 대여점 시장까지 합한다면(‘콘진’ 발표대로라면) 만화시장은 연간 극장 매출만큼이나 크다. 다만 그 규모가 산업적인 가치는 없고 산업적 재앙만 일으키는 게 문제다.(가치 있는 시장은 영화가 크다) 1996년 일어난 일련의 사건들이 한국만화계의 핵인 메이저 만화계를 붕괴시켰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만일 1996년 청보법 파동이 일어나지 않고 영화처럼 정부의 제대로 된 지원과 탄탄한 자본의 투자가 있었다면 어떻게 됐을까? 아직 늦지 않았다. 대여권, 표현의 자유, 쿼터제, 지원책, 투자가 있다면 꽤나 즐거운 일이 있을 것이다. 다만 더 늦어지면 곤란하다. 돌팔매질은 10년이면 족하다. 10년 넘으면 진짜로 골병든다.
신현준은 1996년 록 페스티벌을 기획했다
그리 소란스럽지 않았던 어떤 소란에 대한 기억
신현준(문화수필가, 성공회대 문화대학원 연구교수) | 최근 여기저기 돌아다니다가 받은 명함 가운데는 직업을 ‘문화기획자’라고 소개하는 명함이 종종 있다. 문화기획자란 ‘기획사’에 고용되어 각종 ‘이벤트’를 개최하는 사람을 지칭하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공공성’이 강한 문화행사를 조직하고 관리하는 활동가들이다. ‘문화’가 ‘기획’과 연관되는 현상에 대해 낯설게 느낀다면, ‘문화기획’이 시대의 대세라는 것을 모르고 살아가는 셈이다.
그런데 회고해보니 내 자신이 일종의 ‘문화기획자’였던 시절이 있었다. 지금부터 한 10년 전쯤의 일이다. 1995년 나는 알음알음으로 지내는 몇몇 친구나 후배들과 함께 얼트바이러스(alt.virus)라는 이름의 ‘음악 비평 동인’을 만들었다. 이 유령단체는 고정된 매체가 있는 것도 아니었고, 개인 자격으로 이런저런 지면에 기고를 하는 게 고작이었다. 당시 유행했던 PC통신에 소모임 하나를 만들어 새로운 회원들이 가입하기도 했지만, 그걸 가지고 번듯한 활동이라고 말하기는 힘들 것 같다. 그런데 이 별볼일없는 모임이 1996년 가을, 일을 저질렀다. ‘인디펜던트 록 페스티벌'이라는 거창한 이름을 걸고 몇몇 대학교를 빌려 '소란'이라는 행사를 개최한 것이다. 첫 회 소란의 무대에는 델리 스파이스, 크라잉넛, 노 브레인, 초코크림롤스(CCR: 자우림의 절반 혹은 전신) 등이 무대에 올랐다. “한국 최초로 인디펜던트 록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라이브 클럽 지하에서 어슬렁거리던 음악을 지상으로 끌어올렸다”는 자뻑에도 불구하고 이 행사가 많은 사람들의 기억에 남아 있는 것 같지는 않다. 내가 방금 자랑스럽게 언급한 밴드들도 ‘데뷔 초기에 섰던 수많은 무대들 가운데 하나’ 정도 이상으로는 기억하지 않을 것이다.
1996년에는 음반사전심의제도 폐지를 기념하여 '자유'라는 이름의 대형 음악 페스티벌이 개최된 일도 있다. 여기에는 베테랑과 신예를 막론하여 포크와 록 계열의 비중 있는 음악인들이 대거 출연해 많은 관중이 찾았다. '자유'는 이후 매년 개최되었고, 뒤에는 인디 밴드들도 라인업에 포함시키는 대형 행사로 발전했다. '자유' 역시 당시 나의 라이벌이었던(농담이다!) 음악평론가 강헌과 임진모가 주도적으로 조직한 행사였다. 비교할 대상이 아닌지 모르지만, '소란'도 '자유'도 2000년 이후에는 더 이상 개최되지 못했다. '자유'에 대해서는 내가 말할 입장이 아니지만, '소란'의 경우 아마추어 기획자로서는 더 이상 감당할 수 없는 일이 됐기 때문이다. 게다가 무릇 중요한 ‘사건’이란 ‘단 한 번’으로 끝나는 것이 낫다는 생각도 없지 않았다. 요즘 누군가를 만났을 때 그 사람이 가끔 “대학생 때 '소란'을 보았는데 저한테는 정말 충격이었어요. 한국에 이런 문화가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어요”라는 말을 듣고, 그때 맨땅에 헤딩했던 일이 그저 일장춘몽은 아니었음을 확인하는 것으로 족하다. 개인적으로는 그렇다.
그런데 삶은 오래 지속된다. 그때 30대 중반이었던 일개 지식인이 별다른 의도 없이 ‘그냥 이렇게 나이 들어가는 게 지겨워서’ 저질렀던 일과 비슷한 성격의 행사는 그 뒤 여기저기서 체계적으로 조직되기 시작했다. 1999년 마지막 소란이 저조한 흥행을 기록하기 직전 한 의류 브랜드 업체가 기획한 페스티벌은 성황리에 끝났고 지금까지도 연례행사로 자리잡고 있다. 이걸 두고 ‘자본의 위력’이라고 말하는 것은 매우 옹졸한 것인데, 그건 이 업체가 홍대 앞에 문화공간을 만들어 적자를 감수하면서도 수년째 운영하는 현실을 보고 있으면 틀림없다.
작년에는 수도권의 한 도시에서 관의 후원 하에 대형 페스티벌을 개최한 일도 있었고, 음악평론가를 비롯한 문화기획자들이 행사를 꾸렸다. 올해에는 서울시에서 주최하는 페스티벌에도 록 페스티벌이 열려서 괜찮은 라인업의 음악인과 밴드가 참여한다는 소문도 들린다. 이걸 두고 ‘관계의 위력’이라고 말하는 것도 역시 옹졸하다는 것은 굳이 설명하지 않겠다. 나같이 일을 저질렀던 사람이 있다면, 누군가 저지른 일을 잘 추스르고 시스템을 만드는 일도 당연히 중요하다. 나 역시 관이 주최하는 페스티벌에 이렇게 저렇게 관여하고 협조하게 됐으니 말이다. 그런데 지금 이루어지고 있는 일들이 ‘정말 재미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면 이야기가 조금 달라진다. 유치한 비유이지만 아무것도 모르고 저지른 일이 첫사랑과 연애하는 일과 비슷하다면(요즘도 그런지는 모르겠다) 체계와 자금과 인력을 갖추어 이루어지는 일은 결혼을 해서 머리에서 주판알을 튕기면서 살아가는 일과 비슷할 것 같다. 그렇다고 그때로 돌아갈 수는 없으니 그때보다 더한 애정과 노력으로 버텨나가는 수밖에… 이건 더 이상 절대적 재미의 문제가 아니다. 그런데 모른다. 지금도 누군가 어디서 무언가를 저지르고 있는지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