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심산 등록일: 2006-05-18 17:41:10 IP ADRESS: *.254.86.77

댓글

8

조회 수

2670

산에 오르는 백수들

우리나라에서 지역감정은 정계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이 비좁아 터진 문화판에서도 엄존한다. 가령 문단으로 범위를 좁혀보자. 이곳에서 장르는 난공불락의 요새와도 같다. 시인과 소설가는 내심 서로 경멸하며 행여 누가 자신의 영역을 침범(!)하기라도 할라치면 눈알을 부라리며 짖어댄다. 저 자식은 명색이 시인이라는 놈이 왜 동화를 끄적거리고 지랄이야. 희곡이나 써대던 놈이 소설을 쓴답시고 깝죽대다니 어이가 없군.

영상분야로 눈길을 돌려봐도 사정은 매한가지다. 영상분야는 대체로 영화와 텔레비전 그리고 광고로 나뉘어지는데 이들 역시 서로를 못잡아 먹어서 안달이다. 네가 방송쪽에서는 좀 잘나가던 드라마 피디였던 모양인데 여기 충무로에 와서는 어림도 없을 걸. 영화감독이면 영화나 찍지 무슨 광고를 찍겠다고 까불어. 이런 식이다. 미디어 자체가 달라지면 이 해괴한 지역감정은 극한적인 몰이해와 근거없는 폄하로 연결된다. 문학인은 영화인을 돈만 밝히는 천박한 화류계 자식들 정도로 받아들이고, 영화인은 문학인을 골방에 쳐박혀 궁상이나 떨어대는 폐인들 정도로 우습게 보는 것이다.

이 유치찬란한 골목대장 놀이를 도대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모르겠다. 어쨌든 한심한 것만은 사실이다. 레너드 코헨이 쓴 소설은 미국 대학의 영문학 교재로 쓰인다. 밀란 쿤데라가 희곡도 쓰고 소설도 쓴다 해서 비난하는 사람들은 아무도 없다. 볼보 자동차 광고는 언제나 장 자크 아노가 찍는다. 무라카미 류에게 네가 뭔데 영화를 찍고 음반을 내느냐고 시비걸지 않는다. 장 클로드 카리에르는 시인이자 소설가이자 문화비평가이자 만화가이자 시나리오작가이며, 샘 셰퍼드는 극작가이자 시나리오작가이자 영화감독이자 영화배우이자 록밴드의 드러머다.

한때 나는 우리의 이 해괴한 “정체를 밝혀랏!”식 문화풍토가 주민등록증을 만들 때 지문날인을 해야된다든지 경찰의 불심검문에 걸리면 제까닥 관등성명(!)을 밝혀야 된다든지 하는 따위의 군사문화와 관련이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본 적이 있다. 결론은 모르겠다. 어쨌든 우리는 재빨리 정체를 밝히고, 주어진 임무(!)에 충실해야 하고, 행여라도 정체불명의 침입자가 나타나면 파블로프의 개처럼 짖어대야 하며, 지정된 골목 안에서 대장이 시키는대로 선착순 놀이를 하며 살아야 한다. 만약 그렇게 살기가 싫다면? 일찌감치 꿰찬 기득권을 마치 무슨 무소불위의 권력처럼 제멋대로 휘두르며 군림하는 골목대장의 판결에 따라 ‘주류사회’에 끼지 못하고 ‘낭인신세’로 전락하게 된다.

하지만 어느 동네에나 허파에 바람 든 놈들이 있기 마련이다. 네가 여기 골목대장인데 나를 인정하지 못하겠다고? 나도 너 인정 안해! 너희들끼리 선착순 놀이를 하든 서로 상을 주며 박수를 치든 그건 너희들 마음대로 해. 난 신경도 안써, 어차피 너희들끼리 하고 노는 마스터베이션이니까. 난 누가 뭐래도 내멋대로 살 거야. 내가 왜 옆동네로 놀러가면 안돼? 거기도 내 동네야. 아니, 내게 주어진 동네란 아예 처음부터 없어. 나는 온세상을 떠돌면서 내멋대로 살 테야.

별로 추천하고 싶은 삶의 태도는 아니다. 이렇게 살면 몹시 외롭다. 하지만 외로움은 자유의 또다른 이름이 아니었던가? 나는 그렇게 살기로 했다. 내가 모든 일을 잘할 수 있을만큼 유능해서가 절대로 아니다. 다만 권위 앞에 고개 숙이기가 싫고 내가 품고 있는 가능성을 지레 짓밟아버리기가 싫어서일 뿐이다. 문단의 선후배들이 내게 묻는다. 너는 시인이야 소설가야 에세이스트야? 나는 대답한다. 나는 나야. 영화판의 선후배들도 내게 묻는다. 너는 문인이야 영화인이야 워크숍 전문가야? 나는 역시 대답한다. 나는 나라니깐!

나는 어떤 매체에 글을 쓸 때 직함을 잘 밝히지 않는다. 소설가나 시나리오작가 따위의 직함으로 나를 한정시키는 것이 싫기 때문이다(하지만 요즘은 주로 시나리오를 써서 밥을 먹기 때문에 그 직함이 ‘자동적으로’ 따라 붙는다). 밥을 먹기 위하여 나는 글을 쓴다. 상황과 취향에 따라 다양한 장르의 글을 쓴다. 시나리오는 그 중의 한 갈래일 뿐이다. 하지만 ‘오직 밥을 먹기 위해서만’ 글을 쓴다면 그만큼 쓸쓸한 일도 따로 없을 것이다. 실제로 나는 ‘돈이 되는’ 시나리오를 쓸 때보다 ‘돈이 전혀 안되는’ 에세이를 쓸 때 보다 만족감을 느끼는 경우가 많다.

어찌되었건 내가 ‘글 쓰는 사람’임에는 틀림없다. 하지만 과연 그뿐인가? 나는 나다. 하지만 굳이 내게 어떤 한정어를 붙여야 한다면 ‘글 쓰는 사람’이라는 것보다는 ‘산에 오르는 사람’이라는 것이 훨씬 더 잘 어울린다. 내가 직장생활을 하지 않고 글을 써서 먹고 살기로 결심한 가장 중요한 이유는 평일날 산에 오르기 위해서이다. 만약 내가 운이 좋게도 평생 돈 걱정 없이 살 수 있는 부잣집 아들로 태어났다면 결코 ‘밥을 먹기 위하여’ 글을 쓰는 따위의 일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저 이 지구라는 행성 곳곳에 가득 들어차 있는 온갖 산들을 오르내리며 한 평생을 보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기도 전에 집에서 독립해야만 했다. 백수가 되어 평생 놀고만 싶었으나 어쩔 수 없이 밥벌이를 해야만 되는 고단한 삶이 시작된 것이다.

내게 ‘외로우나 자유로운’ 삶의 태도를 가르쳐 준 것은 산이다. 내가 ‘삶의 선배’라고 여기는 사람들을 만난 곳은 문단도 영화판도 운동판도 아닌 산이다. 그들은 내게 세속의 시궁창 한 귀퉁이에 불과한 골목대장들의 갑론을박을 잊게 해주었고, 내게 주어진 이 짧은 삶 속에서 진정 무엇을 추구하며 살아야 할지를 온몸으로 가르쳐 주었다. 그들과 함께 자일을 묶고 산에 오를 때 나는 진정한 삶의 기쁨을 느낀다. 저마다 다른 방식의 삶을 살아가고 있지만 이 빛나는 개성들을 한 데 묶는 것은 다름 아닌 산이다. 그들의 삶을 지켜보고 있노라면 진정 ‘산에 오르는 백수’가 된다는 것이 얼마나 위험하고도 치열하며 아름다운지 새삼 전율을 느끼게 된다.

박인식은 국내에서도 몇 손가락 안에 꼽히는 마당발이다. 그에게는 직함이 너무 많다. 그는 산악인이며 소설가이고 미술평론가이면서 와인집 주인이다. 하지만 그 어떤 직함도 그를 다 설명해내진 못한다. 나는 그를 ‘자유인’이라고 생각한다. 산악인들 사이에서는 그가 쓴 산악칼럼들이 지나치게 과장되어 있다고 투덜거리고, 소설가들은 그가 쓴 소설을 한끗 모자란 그 무엇 정도로 폄하하고, 미술평론가들은 그가 쓴 미술관련 저서들을 거들떠 보지도 않지만, 정작 그 자신은 이런 사실들에 대하여 전혀 개의치 않는다. 그는 오늘도 지구 전역을 쏘다니며 산에 오르고 와인을 마시고 글을 쓴다. 나는 그의 자유분방한 삶의 태도를 사랑한다.

임현담의 공식직함은 진단방사선과 전문의이다. 하지만 나는 그를 ‘위장취업한 의사’라고 부른다. 그의 본질은 ‘히말라야의 순례자’이다. 그는 1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매년 몇 달씩 병원문을 걸어 잠그고 히말라야로 떠난다. 경제적 손익계산서를 뽑아본다면 정신 나간 짓거리이다. 하지만 개의치 않는다. 그는 히말라야의 신화와 철학 속으로 한 없이 걸어들어가는 구도자이다. 그 구도행각의 치열함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도록 만든다. 이미 출간되기 시작한 그의 ‘히말라야 순례 8부작’들은 감히 자신있게 말하건데 ‘세계적인’ 수준이다. 그가 운영하는 개인 홈페이지는 히말라야를 사랑하는 사람들만의 정겨운 사랑방으로 자리를 잡은 지 오래이다. 나 역시 세속의 고단함에 진저리가 쳐질 때마다 이곳을 찾아가 히말라야의 맑은 기운을 한껏 들이마신다.

손재식은 국내 최고수준의 산악사진작가이다. 나는 그를 ‘한국의 갤런 로웰’ 혹은 ‘바위의 선비’라고 부른다. 내 나이 또래에서는 백수 혹은 한량으로 한 가닥 한다는 나도 그의 앞에 서면 한 없이 작아진다. 그는 일주일에 사나흘을 산에서 산다. 이 산의 바위에 붙어있는가 하면 저 산의 숲 속에 웅크리고 있고 알프스에서 스키를 타나보다 하면 히말라야의 빙벽 위에서 카메라 셔터를 누르고 있다. 내가 그에게 늘 감탄하는 것은 ‘백수로서의 성실함과 여유’이다. 나는 그처럼 ‘치열하게 노는’ 사람을 따로 보지 못했다. 나는 그처럼 ‘놀이’와 ‘일’을 완벽하고도 조화롭게 결합시킨 삶을 사는 사람을 따로 알지 못한다. 이따금 그와 함께 산에 오를 때마다 나는 내 삶을 조율해본다. 내가 너무 돈벌이에만 미쳐 돌아다니고 있는 것은 아닌지. 내가 너무 편협하고 옹졸한 생각에만 사로잡혀 있는 것은 아닌지.

백수가 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것은 자유롭되 외로운 삶이다. 그는 세속의 권위에 고개 숙이지 않고 타인의 잣대로 자신을 한정하지 않는다. 밥벌이? 결단코 세상에서 가장 성스러운 투쟁이다. 하지만 '오직 밥을 먹기 위해서만' 살아간다면 우리의 삶이 너무 초라해진다. 진정한 백수란 제대로 놀 줄 아는 사람이다. 게으른 자는 제대로 놀 수 없다. 백수는 성실하고 치열하게 논다. 그 결과 그들은 저 잘난 이른바 '주류사회'에서는 꿈도 꾸지 못할 만큼 독창적이고 아름다운 결과물들을 세상에 내놓는다. 그리고 나는 이들이 내놓는 작품들이야말로 진정한 예술이라고 생각한다. 아아 도대체 얼마나 더 열심히 놀아야 그런 경지에 오를 수 있을까?

[기전문화예술](경기문화재단) 2004년 11-12월

임현담

2006.05.19 11:12
*.95.252.173
전에 이 글을 읽고, [심산 샘이 나를 보고 '산악계에 위장취업한 의사'라고 하던데!]
이러니까 사람들이 맞아! 맞아! 모두 좋아하더군요.
흠...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정말 그랬나봐요. 위장취업한 걸 나만 몰랐어요.
여기에서 힌트를 얻어서 스스로 흠... '도시에 위장전입한 산사람'이라고 말해야지 ^^ 이러고 있어요.^^

요즘 뭐, 어디가 안 이쁠까마는 요즘 산들 많이 예뻐요.
profile

심산

2006.05.19 12:18
*.146.254.6
[깔깔][깔깔][깔깔] 여름 되기 전에 우리 어깨동무들...간단한 비박이라도 한번 해야되지 않겠습니까?

백소영

2006.05.19 22:30
*.212.95.83
선생님.. 저도 진정한 백수가 되고 싶어요.. 노력하면 가능하겠죠?? ^^*

박주연

2006.05.19 23:08
*.78.160.160
'치열하게 놀자'~ 오늘부로 인생의 좌우명으로 정했습니다. ^^
profile

심산

2006.05.19 23:57
*.254.86.77
소영/무지하게 노력해야돼...^^/주연, 아주 위험한 좌우명이지...^^

임현담

2006.05.20 09:48
*.95.252.160
법정스님의 [인도기행] 책, 이번에 4번째로 만든다고해요. 이걸 재판도 아니고 4판이라고 하나? 하여튼 나 같은 사람에게는 익숙하지 않은 일인데요. 3번째는 표지와 안의 사진을 김홍희 선생님, 유쾌한 사나이^^가 했는데요, 이번 4번째는 오리지날 초판처럼 법정스님이 찍은 사진을 그냥 넣으신다나봐요.

그럼 4번째 [인도기행] 표지는? 누가?
정답은 제 사진입니다.
샘터사에서 스님이 이걸 표지로 하자고 결심하셨다는데, 그게 홈피에 있는 시킴 히말라야 사진중에 하나입니다. 이 홈피가 은근히 찾아오는 분들의 폭이 넓어서 심지어는....^^ 샘터사에서 사진값 얼마 받겠냐? 그래서, 아이고, 스님 일이신데 어떻게...안 받을까! 어때요, 그냥 드릴까? 사진도 꾸진데 말이야!
하다가 상징적인 의미에서 3만원 받았습니다. 이걸로 술 살께요^^ 풍류사랑에서 먹으면 3만원이면 푸짐...^^

15년쯤 되었나. 더 되었나. '인생이 뭐야!' '사는 게 도대체 뭐냐고!' 이러면서 지하철 타고 다녔는데요. 그때 동아일보, 맞나? 맞을 거야, 법정스님의 인도기행을 신문에서 연재했어요. 스님이 인도에 해답이 있다는 식으로 쓰셔서, 그냥 배낭 메고 인도로 갔다가, 인생이란 묘한 거야, 히말라야로 들어간 건데요. 그 스님의 [인도기행] 표지를 제가 찍은 히말라야 사진으로 장식한다니, 참, 인생이란게...^^ 흠...

사진은 너무 얼굴 팔리는건데^^;; 그것도 디카 4백만화소. 하여튼 표지를 보면 사진 때문에 얼굴이 화끈거리겠지만, 알 수 없어라, 세상 일. 글로 나를 이끌어준 구루의 책을, 많이 모자란 내 사진으로 소중하게 덮는 다는 일이.
profile

심산

2006.05.21 01:01
*.146.254.6
[원츄] 역시 고수들끼리의 멋진 일합 또 일합! 굳이 그 사진을 원하신 법정 스님도 멋지고, 더도 말고 딱 3만원에 넘기신 현담(역시 스님 아닌가...?^^)님도 멋지고...제가 멋질 수 있는 일은 딱 하나뿐이네요, 그 3만원으로 술 사실 때 악착 같이 참석하여 마시는 일...!![윙크]

박주연

2006.05.21 02:51
*.78.160.177
끼야.. 나의 이상형 법정스님...^^ (두 분의 심오한 대화에 호들갑 떨어 죄송합니다)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33 한국시나리오작가조합 양수리수련회 + 7 file 심산 2006-06-06 3567
32 여의도에서 신촌까지 걸어다니기 + 6 file 심산 2006-06-01 2963
31 시내 한복판에서 전세계의 산을 보는 방법 + 1 file 심산 2006-05-22 2475
30 김반장이라는 매혹적인 뮤지션 + 8 file 심산 2006-05-12 2426
29 하늘이 이렇게 맑아도 되는 겁니까? + 11 심산 2006-05-08 2287
28 드라마 [식객]팀의 즐거웠던 나날들 + 4 file 심산 2006-05-04 2868
27 하얀 영원 속으로 사라져가던 그 길 + 1 file 심산 2006-04-24 2387
26 나홀로 야간산행의 즐거움 + 1 심산 2006-04-23 2656
25 산이 산을 말하다? 심산 2006-03-25 3957
24 보름간 제주도에 머무릅니다 + 22 file 심산 2006-09-20 3097
23 비나미코 9월 정모의 와인들 + 9 file 심산 2006-09-16 3031
22 나팔꽃 피는 창가에서 + 5 file 심산 2006-08-20 3009
21 아이들은 길 위에서 자란다 + 5 file 심산 2006-07-31 2423
20 하릴 없는 빈둥거림의 미학 + 8 file 심산 2006-07-24 2591
19 소설 [대부] 완역본 발간을 축하하며 + 1 file 심산 2006-06-19 2606
» 산에 오르는 백수들 + 8 심산 2006-05-18 2670
17 망고 + 3 file 심산 2006-05-15 2794
16 제 정신으론 못할 일들 세 가지 + 12 심산 2006-05-15 2358
15 약속 없는 아침 + 1 심산 2006-04-29 2321
14 우리가 잊고 살았던 무상의 가치 심산 2006-04-29 238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