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심산 등록일: 2006-07-24 21:43:44 IP ADRESS: *.237.82.116

댓글

8

조회 수

2591


[img1]

하릴 없는 빈둥거림의 미학
[모아이블루]/사진작가 이해선의 이스터섬 체류기/그림같은 세상/2002년   

내가 가장 즐기는 일은 여행이다. 매주 즐기고 있는 산행 역시 여행의 특수한 한 형태일 따름이다. 어떤 때 나의 삶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것은 매순간 여행과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다. 여행을 준비하고 있거나, 남들이 남긴 여행의 기록들을 읽고 있거나, 실제로 여행을 즐기고 있거나. 

덕분에 내 서가를 가득 메우고 있는 책들이란 온통 이런 부류의 것들뿐이다. 산악문학 분야에 이어 가장 많은 선반들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이른바 여행서들인데, 이제는 도무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차고 넘쳐서, 불현듯 내게 막막한 절망감을 선사하기까지 한다. 맙소사, 이 많은 책들을 언제 다 읽는담? 아니, 저 많은 산과 도시와 유적지들을 도대체 언제 다 돌아본담? 단언컨대 흡족하게 놀고 가기에는 우리에게 주어진 삶의 시간들이 너무도 짧다. 그러니 별 수 없다. 이번 삶을 못다놀고 끝마친다면 다음 삶에 다시 와서 마저 놀아야지.   

여행서들만을 전문적(?)으로 읽어오다 보니 이젠 나름대로 풍월도 생겼다. 가장 한심한 여행서? 이른바 '최신여행정보'들을 빼곡히 모아놓은 책이다. 어디서 어떤 비행기를 타고 무슨 방향으로 몇 시간 가면 어디가 나오는데…하는 식으로 써놓은 책들 말이다. 활자매체가 인터넷의 속도를 따라갈 수는 없다. 시시각각 변하는 여행정보를 책의 형태로 묶어놓겠다는 발상 자체가 우습다. 이 방면의 최악은 '증명사진파'와 '요점정리파'의 결합이다. 유럽9개국을 보름만에 여행하는 방법이라든가 인도와 네팔을 결합하여 일주일만에 해치우는 방법에 대하여 마치 쪽집게 과외선생처럼 쌈빡하게 정리해놓은 저 위대한 책들!   

[img2]

여행을 통해서 무엇을 추구하느냐? 사람마다 제각기 다른 답안지를 제출할 수밖에 없는 질문이다. 내 답안지는…조금 썰렁하다. 나는 무언가를 추구한다면 그것은 여행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에펠탑 앞에서 기념사진 찍기가 무섭게 곧바로 루브르를 향해 달려가야 한다면 그것은 여행이 아니다. 여행은 "쓸데없는 짓"이어야 한다. 여행을 사랑한다는 것은 곧 "쓸데없이 빈둥거리는 자만이 이따금씩 축복처럼 누릴 수 있는 내면 가득한 행복감"을 사랑한다는 뜻이다. 이 하릴없는 빈둥거림의 미학이야말로 여행의 핵심이다. 이 핵심을 제대로 낚아채어 빛나는 문장과 잊지 못할 이미지로 담아낸 책은 흔치 않다.     

여행사진작가 이해선을 나는 꼭 한번 만나본 적이 있다. 자신의 사진작품만큼이나 선이 굵고 분방하면서도 한없이 겸허한 인상이었다. 일찍이 그녀가 필름에 담아온 만다라나 카일라스를 볼 때마다 찬탄을 발해왔던 터라 서점에서 [모아이블루]를 집어드는 데에는 아무런 망설임도 없었다. 그리고 햇살 나른한 오후, 베란다의 긴 소파에 누워 나는 지구 저 반대편, 남태평양의 절해고도 이스터섬으로의 여행을 꿈꾼다. 서두를 필요 없다. 이해선의 말투는 느리다. 기념사진을 찍을 필요도 없다. 이해선의 카메라는 민박집 라파누이 여인네의 여유로운 미소를 설핏 잡을 뿐이다. 책을 뒤적거리다 보니 졸립다고? 책을 잠시 저쯤 밀쳐두고 낮잠이나 한숨 때리면 그만이다.     

[모아이블루]는 1급여행서다. 이 책에는 여행의 꿈이 있고 향기가 있고 여백이 있다. 책 속의 작가는 여행지의 일상 속으로 녹아든다. 영리한 작가는 그래서 이 책에 '여행기' 대신 '체류기'라는 문패를 달아놓았다. 시새움에 겨운 나는 책을 뒤적거리며 계속 투덜댄다. 쳇, 여기 사람들은 정말 할 일도 되게들 없군! 흥, 이 작가는 정말 빈둥빈둥 잘도 노는군! 제기랄, 무슨 놈의 석상과 바다가 이리도 잘 어울린담?

[필름2.0] 2005년 2월 9일

임현담

2006.07.25 09:14
*.95.252.176
지지난 달인가, [행복이 가득한...] 잡지사에서 찾아와 [히말라야] 운운할 때 참 이상한 일은 히말라야보다 두 사람 얼굴이 먼저 생각이 났는데, 하나는 심산샘이고 하나는 이해선샘^^ 그래서 얼른 두 사람 전화번호 알려주고 적당히 뒤로 물러났어요. 마운틴의 경우 김선미 기자의 특유의 들이댐이 있어 할 수 없이 얼굴 찍고 기타 등등. 이해선 샘도 참 빛깔 좋게 살아요. 때되면 가고 뭐, 거기서 그러면 또 되돌아오고. 꾼들의 일상이란...여기저기 뭐 분별이 없어요^^ 차 안에서 옆에서 떠드는 어떤 두 사람 이야기 들었는데 외국 어딘가 간 모양인데 첫날 투숙해서 조금 불편했는지, '아 글쎄 그냥 집에 가고 싶더라고, 첫날인데 말이지...' 이런 이런! 어디까지 갔는데 그것도 첫밤인데 되돌아올 생각이라니! 여행이란 게 때로는 가야할 사람들에게는 박탈되고, 가도되고 안 가도 별일 없는 사람들에게 도리어 주어지고.

여름도 오고, 하루에 많은 시간은 놀기 위한 투자로 생각하고. ^^
[None다]는 말이 이제 철학으로 자리 잡아가고 있는 이 나이. 한 발 더 나가 삶의 목표를 [None다]에 두고 있는 이 나이. 이 나이 정말 맘에 든다^^

이유정

2006.07.25 09:26
*.196.95.2
[모아이 블루] 저도 정말 좋아하는 책입니다. 어스름의 석상 얼굴에 박혀 있던 허연 눈이 아직도 잊혀지지 않아요.
profile

심산

2006.07.25 09:47
*.147.6.158
하하하 임샘이 "논다를 삶의 목표로 둔다"고 하니 안심! 실은 저 가끔 "야 산, 너 너무 노는 거 아니야?"하며 제 발 저려 하는데...그럴 필요 없군요? 아닌가? 아직은 더 일해야 되는 나인가...?^^

김선미

2006.07.25 12:14
*.103.13.122
아...임 선생님 말씀하시는 저의 특유의 들이댐이 뭘까요...저 얼마나 소심한대...임선생님 인터뷰하고 챙피해서 한동안 숨어 지내고 있었는데....이해선 선생님은 개인적으로 고모라고 부르는 분입니다. 드디어 오랜 밥벌이였던 까페 '동인'을 정리하시고, 지금 인생의 감기 같은 걸 앓고 계십니다. 그거 나으려고 또 새로운 여행을 준비하고 계시죠...캠핑카로 요세미테에서 한 달 동안 놀기....우리가 모두 부러워 하는 일이죠....저는 이번에 책 하나 내고도 차마 '들이댈' 용기가 없어서 그냥 우체부 아저씨 일 시켜드리려고요... 참, 남영호씨에게도 주소를 알려줘야 하는데....심산스쿨로 하는 게 낫겠죠? ....사막의 먼지 묻은 엽서가 날아 올 겁니다.

임현담

2006.07.25 12:24
*.95.252.176
우악! 김선미 기자가 여기까지^^ 세상은 너무나 좁아요. 어디선가 소근대는 소리가 모두 들린다니까요^^ 들이댐이라는 단어가 부정적이 아닌 거 아시죠? 들이댄다면 그거 코수염 기른, 한때 십대가수에 올랐다는 호랑나비 때문에 완전히 이상한 말로 되버렸는데요. 굉장이 좋은 말이에요. 인터뷰 기사는 고마웠어요. 너무 잘 써주어서요. 사진이 문제라 늘 요리저리 피했는데요. 아, 나는 너무 얼굴이 커^^;; 무슨 책 내셨어요? ㅎㅎ 유목생활! 딸내미 둘 데리고 곤지암에서 마라도까지 가는 이야기^^ 흠 벌써 주문해서 기다리고 있는 중 아닙니까. 제게는 보내지 마세요. 출판기념회는 이미 했나요?
profile

심산

2006.07.25 13:17
*.254.86.77
으윽, 고수들을 만나니 꼬랑지가 절로 아래로...^^/김선미님은 직장 때려치고 본격적으로 놀고, 이해선님은 캐러반 빌려서 요세미티에서 놀고, 남영호님은 자전거로 유라시아 대륙을 가로지르는 중이고, 임현담샘은 담달이면 파키스탄으로 나르고...나 이거 정말 혼자 서울을 지키고 있는 느낌...^^/제가 좋아하는 [윈디시티]라는 그룹 노래가사 중에 그런 게 있어요..."어릴 땐 세상이 정말 좁은 줄만 알았지, Maestro, 세상은 넓고 형님들도 많아..."^^...요즘의 제 심정이 꼭 그런 겁니다. 세상이 별로 살만한 곳은 아니라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지만, 그런 세상조차도 멋지게 살아내는 '형님들'이 많더라고요...^^

조숙위

2006.08.03 00:14
*.234.41.188
또 담습니다. 장바구니에.

김해원

2006.09.27 03:09
*.122.105.1
샘...이 글이 아주 좋아요. 여백과 욕망이 잘 어우러져 있는 듯해요...^^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33 한국시나리오작가조합 양수리수련회 + 7 file 심산 2006-06-06 3567
32 여의도에서 신촌까지 걸어다니기 + 6 file 심산 2006-06-01 2963
31 시내 한복판에서 전세계의 산을 보는 방법 + 1 file 심산 2006-05-22 2475
30 김반장이라는 매혹적인 뮤지션 + 8 file 심산 2006-05-12 2426
29 하늘이 이렇게 맑아도 되는 겁니까? + 11 심산 2006-05-08 2287
28 드라마 [식객]팀의 즐거웠던 나날들 + 4 file 심산 2006-05-04 2868
27 하얀 영원 속으로 사라져가던 그 길 + 1 file 심산 2006-04-24 2387
26 나홀로 야간산행의 즐거움 + 1 심산 2006-04-23 2656
25 산이 산을 말하다? 심산 2006-03-25 3957
24 보름간 제주도에 머무릅니다 + 22 file 심산 2006-09-20 3097
23 비나미코 9월 정모의 와인들 + 9 file 심산 2006-09-16 3031
22 나팔꽃 피는 창가에서 + 5 file 심산 2006-08-20 3009
21 아이들은 길 위에서 자란다 + 5 file 심산 2006-07-31 2423
» 하릴 없는 빈둥거림의 미학 + 8 file 심산 2006-07-24 2591
19 소설 [대부] 완역본 발간을 축하하며 + 1 file 심산 2006-06-19 2606
18 산에 오르는 백수들 + 8 심산 2006-05-18 2670
17 망고 + 3 file 심산 2006-05-15 2794
16 제 정신으론 못할 일들 세 가지 + 12 심산 2006-05-15 2358
15 약속 없는 아침 + 1 심산 2006-04-29 2321
14 우리가 잊고 살았던 무상의 가치 심산 2006-04-29 238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