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의 변방에 비껴 선 박제된 청춘
-기형도의 추억
심산(심산스쿨 대표)
기형도에 대한 글을 써달라기에 처음에는 몇 번이고 손사래를 쳤다. 나는 적당한 사람이 아니야. 차라리 그의 문학회 동기나 선후배들에게 부탁하지 그래. 성석제나 원재길 혹은 공지영. 이 친구들은 할 이야기가 많을 거야. 나는 별로 없어. 하지만 원고청탁자는 완강했다. 문인들의 회고담은 이미 많이 나와 있잖아요. 우리는 지금 영화인에게 청탁하려는 거에요. 그리고 이왕이면 같은 편이 아니라 다른 편의 이야기를 듣고 싶은 거고요.
다른 편? 그 단어에서 문득 혼돈이 느껴졌다. 우리는 다른 편이었던가? 어쩌면 그랬을지도 모른다. 그와 나는 동시대를 살았다. 이른바 격동의 80년대다. 그리고 80년대는 우리의 20대였다. 그는 나보다 한 살이 많았고 학번은 조금 더 빨랐으나 같은 대학을 다니며 글을 쓰고 있었다. 하지만 삶이나 글을 대하는 태도나 기질에서 현격히 달랐던 것은 사실이다. 어떻게 달랐는가? 그것을 이해하려면 우리가 공유했던 시대를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1980년대 초중반은 야만적인 군부독재의 시대였고 동시에 학생운동의 시대였다. 이 시기에 학생운동을 했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도 아니지만 자랑스러운 일도 아니다. 왜? 그냥 그것이 ‘대세’였고 어떤 뜻에서는 일종의 ‘유행’이기도 했던 것이다. 당신은 왜 청년시절에 공산당에 입당했소? 누군가 그렇게 물었을 때 밀란 쿤데라는 덤덤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때는 그것이 가장 ‘모던한’ 일이었으니까. 80년대의 학생운동 역시 이와 다르지 않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그래서 80년대의 운동 경험을 마치 훈장처럼 내세우며 도덕적 우월감을 내비치거나, 그것을 보상받아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는 부류들을 나는 내심 경멸해왔다.
80년대의 운동 경험을 회상할 때 나의 태도는 이렇다. 목에 힘주고 뽐낼만한 일은 아니다. 하지만 반성도 하지 않으련다. 80년대 후반부터 90년대 초반에 이르기까지 봇물처럼 쏟아져 나왔던 이른바 ‘후일담 문학’에 대하여 내가 마뜩찮게 여기는 것은 그 때문이다. 80년대를 다룬 나의 시집 [식민지 밤노래](1989)와 장편소설 [사흘낮 사흘밤](1994)이 ‘뻔뻔스러울만큼 당당하게’ 당대를 증언하고 눈꼽 만큼의 반성도 내비치지 않는 것 역시 같은 맥락에서이다. 그리고 이제부터 하는 이야기는 이런 태도의 연장선상에 있다.
1980년대 초중반의 연세대학교에는 ‘글 잘 쓰는 친구들’이 많이 있었다. 이른바 ‘연세문학의 르네상스 시대’이다. 그들의 대부분은 연세문학회 소속이었다. 기형도, 성석제, 원재길, 박래군, 우상호, 공지영, 나희덕 등. 어떤 뜻에서 이들과 대(對)를 이루는 그룹이 있었다. 연세문학회에는 속해있지 않았는데 글을 곧잘 쓰고, 문학보다는 학생운동 혹은 노동운동에 보다 골몰하고 있었던 부류들이다. 위기철과 나 그리고 김인숙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이 두 부류 사이에는 서로를 백안시하거나 무시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들은 우리를 ‘운동권 떨거지’ 정도로 여겼고, 우리는 그들을 ‘문학회 자폐아’ 정도로 폄하했던 것 같다.
기형도를 떠올릴 때 최초의 인상은 그런 것이다. 문학회의 자폐아. 예민하되 섬약한 시인. 시위 대열에서 멀찌감치 떨어진 벤취에 홀로 앉아 코트 깃을 세우고 플라톤의 [시학]을 뒤적거리던 문학청년. 오해 마시라. 인상은 사실과 다르다. 다만 문학회 사람들에 대한 나의 편견(!)이 그러했다는 말이다. 위에 언급한 문학회 소속 학생문인들 중의 몇몇은 전혀 다른 길을 걸어갔다. 박래군은 강제징집되어 학교를 떠나갔다가 훗날 씨티은행의 유리창을 깨부수며 일간신문의 1면 톱기사를 장식했다. 그와 함께 강제징집되었던 내 친구 정성희는 군대에서 시체로 발견되었다. 박래군은 이후 교도소를 제 집처럼 드나들었고 현재 인권운동사랑방을 이끌고 있다. 군대에서 돌아온 우상호는 연세대 총학생회장으로서 1987년의 유월항쟁을 성공적으로 이끌었고 훗날 이른바 386세대를 대표하여 국회로 진출하였다.
그렇게 서로를 소 닭 보듯 했던 기형도와 내가 처음으로 마주 앉아 술잔을 기울인 것은 1983년 연세문화상 뒤풀이 자리에서였다. 연세문화상 시부문을 ‘윤동주문학상’이라고 한다. 당시 기형도의 시 [식목제]([문학사상] 1987년 4월호에 재발표된 후 시집 [입 속의 검은 잎]에 수록)가 당선작이었고, 나의 시 [시]가 가작이었다. 기형도가 말했다. 심사해주신 정현종 교수님께 인사라도 가지 그래. 속이 뒤틀린 나는 짐짓 실소를 내뱉었다. 됐어. 정현종은 한 해 전인 1982년 외문문화상(한국외국어대학교) 시부문과 이듬해인 1984년의 윤동주문학상에서도 나의 시를 당선작으로 뽑아준 바 있다. 하지만 나는 끝끝내 그에게 인사를 하러가지 않았다. 이제 와 돌이켜보면 그 파렴치함에 얼굴이 화끈거린다. 사실 나는 고교시절에 이미 정현종 시집 [고통의 축제]에 실려 있는 전작품들을 행가름 하나 문장부호 하나 빼먹지 않고 달달 외웠을 만큼 그의 작품세계에 심취해 있었다. 그런데 왜 그에게 존경과 감사의 표시를 하지 못했는가? 얼토당토않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이유는 단 하나, 그때가 80년대였기 때문이다. 나의 대학시절은 그토록 강퍅하였다.
그렇다면 기형도의 대학시절은 어땠을까? 슬픔과 외로움 그리고 혼돈으로 가득 차 있었다. “나무의자 밑에는 버려진 책들이 가득하였다/은백양의 숲은 깊고 아름다웠지만/그곳에서는 나뭇잎조차 무기로 사용되었다/그 아름다운 숲에 이르면 청년들은 각오한 듯/눈을 감고 지나갔다, 돌층계 위에서/나는 플라톤을 읽었다, 그때마다 총성이 울렸다/목련철이 오면 친구들은 감옥과 군대로 흩어졌고/시를 쓰던 후배는 자신이 기관원이라고 털어놓았다/존경하는 교수가 있었으나 그분은 원체 말이 없었다/몇 번의 겨울이 지나자 나는 외톨이가 되었다/그리고 졸업이었다, 대학을 떠나기가 두려웠다”([대학시절] 전문).
대학을 졸업한 기형도는 중앙일보사에 취직했다. 그것마저도 ‘우리’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선택이었다. 현재의 시점에서 보자면 ‘우리’를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당시의 우리는 그렇게 생각했다. 우리에게 주어진 길은 몇 갈래 안 된다. 군대나 교도소로 끌려가거나, 공장에 들어가거나, 수배되어 떠돌다가 죽임을 당하거나. 실제로 대부분의 친구들은 그렇게 청춘을 탕진했다. 그런데 대기업에 그것도 중앙일보사에 취직을 하다니! 게다가 그는 1985년의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부문에 당선되어 정식으로 시인의 칭호를 얻었다. 이른바 기득권 혹은 제도권 안에 안전하게 똬리를 튼 것이다. 어느 모로 보나 다시는 만날 일이 없는 사람처럼 보였다.
하지만 역사의 격랑은 그마저도 편안한 삶을 살도록 내버려두지 않았다. 1987년이 되자 교도소와 공장에 있던 친구들이 쏟아져 나왔다. 당시 국민운동본부에서 일하고 있었던 나는 중앙일보 기자였던 그에게 ‘어려운 부탁’을 했다. 그는 기꺼이 그 일을 해줬다. 문약한 시인인 줄만 알았던 그를 다시 보게 된 계기다. 자료를 넘겨받으며 내가 물었다. 요즘도 시 써? 기형도가 예의 그 해맑은 얼굴에 수심 가득한 미소를 띄우며 쓸쓸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가슴 한 켠이 저렸다. 브레히트였던가? 서정시가 불가능한 시대를 운운했던 사람은. 1988년은 더욱 고통스러웠다. 박래군의 동생 박래전이 분신해버린 것이다. 영안실 한쪽 구석에서 하염없이 눈물을 떨구고 있던 기형도의 모습이 내 기억 속에 선명히 남아있다. 나는 그 해 겨울을 박래전 유고시집 [반도의 노래](1989)를 편집하며 보냈다.
그리고 1989년이 왔다. 80년대의 끝자락이며 우리 20대의 끝자락이다. 그 지긋지긋했던 청춘에 어떤 식으로든 매듭을 짓고 싶었던 나는 시집을 냈다. 기형도가 전화를 걸어왔다. 나한테는 네 시집 안 주니? 1989년 2월 즈음이니까 그가 죽기 한 달 전이다. 중앙일보사 맞은편의 허름한 선술집에 마주 앉은 나는 그에게 [식민지 밤노래]를 내밀며 말했다. 읽지마, 쪽팔려. 그는 애잔한 미소를 지으며 소주 몇 잔을 비우더니 뜬금없이 이렇게 말했다. 대학시절부터 네 시를 좋아했어. 부러워, 이런 시를 쓸 수 있다니. 갑자기 말문이 막혔다. 그는 지금 비아냥거리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나도 안다. 내 시는 시가 아니라는 것을. 스스로 시가 되기를 거부하는 새된 외침에 불과하다는 것을.
소주병을 서너 병 쯤 뉘었을 때 내가 말했다. 난 아마 다시는 시를 쓰지 못할 거 같아. 이게 마지막이야. 기형도의 눈빛에 슬픔이 어렸다. 그는 한 동안 먼 산만 바라보더니 이렇게 답했다. 나도 그렇게 모두 다 토해내고 입을 다물었으면 좋겠어. 아마도 그 순간이었을 것이다. 그와 내가 결코 ‘다른 편’이 아니라 ‘같은 편’이라는 사실을 확연하게 깨달은 것은. 이 야만의 시대를 살아가면서 그라고 하여 어찌 분노를 느끼지 않았을 텐가. 그라고 하여 어찌 세상에 대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싶지 않았을 텐가. 그 이후에 무슨 말을 주고받았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그날 우리는 대취했다. 그리고 한달 후 나는 그의 부음을 들었다.
기형도 유고시집 [입 속의 검은 잎](1989)을 다시 읽으며 생각한다. 그는 청춘의 시인이며 동시에 80년대의 시인이다. 1980년대라는 야만의 시대를 배제한 채 그의 시를 읽고 논하려는 모든 시도에 나는 반대한다. 그것은 마치 일제시대를 배제한 채 윤동주의 시를 읽는 것과도 같다. 기형도는 스스로 시대의 변방에 서 있으려 하였으나 누구보다도 예민하게 시대의 중압을 견디어내야 했던 우울한 청춘의 표상이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쓴다. “나 가진 것 탄식 밖에 없어/저녁거리마다 물끄러미 청춘을 세워두고/.../나의 생은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단 한 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질투는 나의 힘] 부분).
이 우울하되 순수한 영혼은 20대에 서둘러 자신의 삶을 마감해버림으로써 ‘박제된 청춘’으로 우리 가슴에 남았다. 기형도는 그렇게 죽었다. 그의 시집 뒤에 애달픈 진혼가를 달았던 김현도 이듬해인 1990년 우리 곁을 떠나갔다. 그리고 이 글을 쓰고 읽는 우리만 살아 남아 이 오욕의 세월을 남루하게 견뎌내고 있는 것이다.
[씨네21] 2009년 3월 9일
요즘 저도 기형도 '입속의 검은 입' 을 다시 읽고 있어요.
읽으며 문득 그가 지금 살아있다면 어떤 시를 쓰고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