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민지 밤노래] 수록시 몇 편
요 아래 '기형도의 추억‘이라는 글을 올려놓으니
온라인과 오프라인에서 별의별 질문들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정말 예전에 시를 썼어요?
시집도 냈단 말이죠?
그때 썼던 시들 좀 보여주세요...
...아니 이런 왕싸가지들 봐라?
80년대 중반에 가장 주목 받았던 청년시인이 누군지 모르고...!
(뭐 믿거나 말거나...ㅋㅋㅋ)
그런데...놀라운 것은
나도 기억이 가물가물댄다는 것이다
마치 전생의 일인듯 아마득하다
그래서...오랫만에 내 시집을 찾아 읽었다
(죽은 기형도가 20년 만에 내게 준 선물이라고 생각한다)
내게도 딱 한 권 밖에 남아 있지 않은 시집이다
책 앞의 헌사를 보니 “부모님께 바칩니다”라고 쓰여있다
어머님께 드린 건데...그 양반이 돌아가시고 나서
유품을 정리하다가 발견(!)한 시집이다
(나는 당시 그 시집을 내면서
다시는 뒤돌아 보지 않겠다고 결심했고
실제로 내 기억 속에서 지워버렸다...ㅠㅠ)
[식민지 밤노래](세계, 1989)는 ‘세계시선’의 두 번째 책이다
첫 번째 책은 아래 밝혔듯 박래전 유고시집 [반도의 노래](세계, 1989)다
세계시선은 이 두 권으로 끝났다
세계라는 출판사 자체가 ‘빨갱이 출판사’로 찍혀서 없어진 것이다
(80년대 친구들은 혹시 세계의 [강좌철학] 시리즈를 기억할런지...^^)
출판사 대표는 물론이거니와 저자들의 대부분이 수배되어
한 동안 정신없이 ‘도바리’쳤던 기억이 난다 ㅋㅋㅋ
[식민지 밤노래]의 맨 앞 장은 당시 내가 좋아했던
그리고 지금도 좋아하는 에두아르도 갈레아노의 산문 한 구절이 인용되어 있다
“컴퓨터 프로그램은 은행가에게 경보를 울리고 은행가는 대사에게 경고하고 대사는 장군과 저녁을 같이 하고 장군은 대통령을 호출하고 대통령은 장관에게 알리고 장관은 국장을 위협하고 국장은 경영자에게 창피를 주고 경영자는 사장에게 고함을 지르고 사장은 고용인을 모욕하고 고용인은 노동자를 욕하고 노동자는 아내를 학대하고 아내는 아이를 때리고 아이는 개를 차고.”
절묘하지 않아?
이 해괴하고 코믹하며 더러운 먹이사슬은
2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다는 게 내 생각이다
[식민지 밤노래]에서 그래도 읽을만한 시 몇 편을 올린다
뭐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즐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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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時習
使者의 느닷없는 出沒을 닮은
내 時代의 武術이
戰利品인양 가두고 은밀히 죽이는 나의 詩術은
수리산 나뭇잎을 말리는 바람처럼
汚川에 빠뜨려 죽인 내 韻이 귀향할 제 首陽아
누룩 익는 냄새를 끼친다니깐!
네 삭은 唾液은 저 아래 이랑에서 찰랑일 제
내가 심은 독버섯은 醉氣를 發한다니깐!
그래 首陽아
더 큰 朝廷이 나를 부른다니깐!
더 더 커단 朝廷이 날 부른다니깐!
(외문문화상 당선작, [외대], 한국외국어대학교, 1983)
詩
그는 詩를 모른다
詩를 모르는 그는 여름날
느닷없이 불어닥치는 불륜한 겨울바람에 놀라
여린 낯말 몇 개 투척하지 않는다
값싼 취기에 실려 서투른
혁명아 흉내를 몸짓하지 않는다
도대체 그의 그리움의 출처에는
머리를 길게 빗어내리는 여인이 없다
고독이라든가 그 뭣이라든가
외로움이나 비애, 목마름이나 배고픔조차도
그를 괴롭히지는 못한다
그가 모르는 詩를 쓰는 詩人들이
두려움에 가위 눌리며 게워내는 말들을
그는 무심히 살아버린다
구체적인 근육 위로 구체적인 땀을 뿜으며
육중하게 가벼웁게 그러므로
자유롭게
현실적인 가슴으로 현실적인 피를 흘리며
그는 산다 움직이며 부딪히며
쓰러진다 쓰러져 신음도 없이
확실한 적에게 찔려 확실하게 죽는다
온몸으로 남김없이
그는 하늘을 背後로 나부낀다
그는 詩다
(윤동주문학상 가작, [연세춘추], 제974호, 1984)
눈
부당한 일이다
일찍 저문 거리로 쫓겨나온 아직도 가뿐 숨결들을
깃들지 못한 자들의 야윈 어깨들을
패인 가슴을 따라 낮게 흐르는 신음들을
눈이여, 씻어주지도 못하면서 그저 하얗게 덮어버리는 것은
부당하다
바래버린 그 色이나마 두르기 위해
황량한 늦가을에도 차마 못 죽인 바램들을
온통 희게 덧칠하는 것은 잔혹한 짓이다
눈이여
赦하여 주지도 못하면서
罪를 묻지 않는 어설픈 자비,
罪를 묻어버리는 사악한 망각이여, 눈이여
앉지 마라 그것은 주검이다 흙빛이다
숨기지 마라 그것은 증오다 핏빛이다
가리지 마라 사랑이다
그것은 사랑의 참담함 참담한
빛이다
(윤동주문학상 당선작, [연세춘추], 제1001호, 1985)
사랑歌
이 온전치 못한 혁명을 감싸기 위해
우리는 때때로 사랑을 이야기한다
휘두르지 못하여 가슴에 돋은
이제는 날빛도 바랜 칼을 입술로
젖가슴으로, 성기로만 내질러
참담히 고여 썩는 河口에 담근다
따스하고 어두운 까페에 숨어
지는 별의 미학을 논하고 詩를 쓰고
이중섭과 그의 황소의
저 부질없이 곤두 선 힘줄을 비웃는다
벽난로에 둘러 앉아 단두대를 바라다본다
나부끼며 떨어지는 친구들의 목을 감상하며
현대회화여 무모하다, 합창을 한다
영혼이 없어 순결한 자궁들마다
劣性의 꽃씨를 심는다 꽃피리라
살아남은 우리의 자식들은 꽃피어
세상은 온통 사랑歌로 일렁이리니
아으 태평성대, 우리 사랑은 영원하리니
이 온전치 못한 혁명을 감싸기 위해
마주치는 네 눈은 아름다워야 한다
겹쳐드는 네 허리는 노곤해야 한다
이 온전치 못한 혁명을 감싸기 위해
감싸기 위해
([일터의 소리], 지양사, 1985)
우리
우리 가장 고운 음성으로 노래를 할 때
하늘의 별자리들은 자리를 바꾸지 않았다
우리 고통을 못이겨 비명을 지를 때
저 찢겨진 시신들엔 부활이 깃들지 않았다
우리 어느 육교의 난간에서 동전 몇 잎을 떨굴 때
지폐는 막무가내, 한 곳으로만 쌓여갔다
우리 시름에 싸여 깊은 꿈 속으로 침잠해버릴 때
부평의 톱니들은 꿈꾸지 않았다
우리 칠판에 새겨진 이데올로기를 지울 때
휴전선의 길이는 줄어들지 않았다
우리가 곤봉과 장갑에 개차반이 될 때
선진조국의 시민들은 침을 뱉았다
우리가 통곡하며 감방문을 밀칠 때
몸 파는 누이의 문드러진 속살을 볼 때
더러는 분신하고 더러는 맞아죽을 때
그렇다면 대답하라 세월이여
우리는 도대체 무엇인가
말해보라 파렴치한 나날들이여
너희는 도대체 무엇인가
화해가 어떻게 해서 가능하며
전쟁은 어째서 불가능한가
(1985)
피와 말과 칼
너희는 우리 허리에 손톱을 두르고
우리 목에 이빨을 꽂았다
우리는 놓으라고 말한다
너희는 잡지도 않았다고 말한다
너희가 그렇게 말하는 것은
여유 있는 위선이며
우리 손에 칼이 잡혀있지 않아서이다
우리가 이렇게 말하는 것은
삐져나온 신음이며
우리 손에 칼이 잡혀있지 않아서이다
우리가 칼을 잡기 전에
우리 피를 모두 말려버려라
우리가 칼을 잡으면
우리가 칼을 잡으면
아무 말도 하지 않겠다
각을 뜨겠다, 움켜쥔 칼자루로
너희 목젖을 따고 두개골을 까부수고
창자를 뜯어 피를 마시겠다
노린내 나는 너희 살점, 갈기갈기 찢어발겨
씹어 먹겠다 갈아 먹겠다 아무 말도 하지 않겠다
우리가 칼을 잡으면
우리가 칼을 잡기 전에
말하는 것은 신음이며
말하는 것은 위선이며
너희는 오늘도 피를 빨고
우리는 오늘도 칼을 간다
([풍자와 해학전], 민족미술협의회, 198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