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 아래 [기형도의 추억]과 [식민지 밤노래]의 시들을 올려놓으니까
이번에는 또 이런 오해가 빗발친다
-넘 무서워요
-정말 과격하시군요
사실...나 안 과격하다(예전에는 좀 과격했지...ㅋㅋㅋ)
...그래서 과격하지 않은 시는 없나...찾아보다 보니까
[식민지 밤노래] 이후에 발표한 시들도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1994년 5월에 [문학정신]이라는 문학 월간지에 발표한 시들이다
...그런데 솔직히
저 시들을 언제 쓴 건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식민지 밤노래](1989) 이전인지 이후인지...
[식민지 밤노래]를 엮을 때
연애시들은 대부분 버렸다
왜? 그때가 1980년대였으니까...^^
이제 와 돌이켜 보면 너무 아깝다
다시는 그런 연애시들을 쓸 수 없을 테니까
하지만...뭐 아무려면 어떠냐?
어차피 지나간 일인데...
그리고 "한번 지나간 일은 영원히 지나간 일"인데...
애니웨이, 심산이 예전에는 이런 시도 썼다...정도에서 즐감!^^
비가 새던 방
난곡 비탈 위의 비가 새던 방
어설픈 국화무늬로 메꾸어 놓은
창틀은 찬바람에 부르르 떨고
언제나 빗물을 머금은 채로
담배연기 너머로 떠오르던 천장
너는 단 한번도 찡그리지 않았지
이렇게 빗물이라도 훔치니 좀 좋아?
설익은 쌀을 뜸들이다가도 돌아앉으며
설거지를 하다가도 들어와앉으며
이렇게 빗물이라도 훔치니 좀 좋아?
내의를 풀어헤쳐 만든 걸레를 들고
무표정한 얼굴로 익살 맞은 목소리로
이렇게 빗물이라도 훔치니 좀 좋아?
세상에서 추방당한 너와
세상을 추방해버린 내가
고단하고 주린 살림을 꾸려가던 곳
난곡 비탈 위의 비가 새던 방
우리 언제까지 같이 살 수 있을까?
어리고 어두운 목소리로 입을 떼면
운을 맞추듯 빗방울이 떨어져 내리고
이렇게 빗물이라도 훔치니 좀 좋아?
헐떡이며 사랑하는 도중에도 어리석게
날 사랑해? 사랑하냐고? 다그쳐대면
운을 맞추듯 빗방울이 떨어져 내리고
이렇게 빗물이라도 훔치니 좀 좋아?
난곡 비탈 위의 비가 새던 방
너는 단 한번도 찡그리지 않았어
대신 언제나 못들은 척 이렇게 말했지
무표정한 얼굴로 익살 맞은 목소리로
이렇게 빗물이라도 훔치니 좀 좋아?
([문학정신], 1994년 5월호)
잠과 꿈
-불쌍한 내 허리
너랑 같이 살 때는
다른 아무 짓도 하고 싶지 않아서
잠 없는 꿈을 꾸고 또 꾸었다
허리가 저리도록 아파와서
더는 사랑할 수 없을 때까지
네가 떠나간 지금은
다른 아무 짓도 하고 싶지 않아서
꿈 없는 잠을 자고 또 잔다
허리가 저리도록 아파와서
더는 누워있을 수 없을 때까지
(미발표작)
별
개차반으로 취한 겨울 새벽
얼어붙은 토사물 위에 자빠져
킬킬거리며 별을 본다
또렷하지도 못한 놈들
뿌옇게 흐려지는 놈들
야 이 씨발 놈들아
또 무슨 시를 주절댈려고 왔냐
또 어떤 새끼 인생을 조져놀려고
([문학정신], 1994년 5월호)
시인
그는 평론가들과 시에 대해서 긴 토론을 했다
그는 애인들과 사랑에 대해서 긴 토론을 했다
그는 혁명가들과 혁명에 대해서 긴 토론을 했다
그는 상인들과 돈벌이에 대해서 긴 토론을 했다
그들이 모두 돌아가 홀로 남게 되자
그는 비로소 긴 울음을 토해냈다
([문학정신], 1994년 5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