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심산 등록일: 2009-03-30 02:28:24 IP ADRESS: *.110.20.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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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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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30

요 아래 [기형도의 추억]과 [식민지 밤노래]의 시들을 올려놓으니까
이번에는 또 이런 오해가 빗발친다


-넘 무서워요
-정말 과격하시군요

 

사실...나 안 과격하다(예전에는 좀 과격했지...ㅋㅋㅋ)

...그래서 과격하지 않은 시는 없나...찾아보다 보니까
[식민지 밤노래] 이후에 발표한 시들도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1994년 5월에 [문학정신]이라는 문학 월간지에 발표한 시들이다

...그런데 솔직히
저 시들을 언제 쓴 건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식민지 밤노래](1989) 이전인지 이후인지...

[식민지 밤노래]를 엮을 때
연애시들은 대부분 버렸다
왜? 그때가 1980년대였으니까...^^
이제 와 돌이켜 보면 너무 아깝다
다시는 그런 연애시들을 쓸 수 없을 테니까

하지만...뭐 아무려면 어떠냐?
어차피 지나간 일인데...
그리고 "한번 지나간 일은 영원히 지나간 일"인데...

애니웨이, 심산이 예전에는 이런 시도 썼다...정도에서 즐감!^^

 

비가 새던 방

 

난곡 비탈 위의 비가 새던 방
어설픈 국화무늬로 메꾸어 놓은
창틀은 찬바람에 부르르 떨고
언제나 빗물을 머금은 채로
담배연기 너머로 떠오르던 천장

 

너는 단 한번도 찡그리지 않았지
이렇게 빗물이라도 훔치니 좀 좋아?
설익은 쌀을 뜸들이다가도 돌아앉으며
설거지를 하다가도 들어와앉으며
이렇게 빗물이라도 훔치니 좀 좋아?
내의를 풀어헤쳐 만든 걸레를 들고
무표정한 얼굴로 익살 맞은 목소리로
이렇게 빗물이라도 훔치니 좀 좋아?

 

세상에서 추방당한 너와
세상을 추방해버린 내가
고단하고 주린 살림을 꾸려가던 곳
난곡 비탈 위의 비가 새던 방

 

우리 언제까지 같이 살 수 있을까?
어리고 어두운 목소리로 입을 떼면
운을 맞추듯 빗방울이 떨어져 내리고
이렇게 빗물이라도 훔치니 좀 좋아?
헐떡이며 사랑하는 도중에도 어리석게
날 사랑해? 사랑하냐고? 다그쳐대면
운을 맞추듯 빗방울이 떨어져 내리고
이렇게 빗물이라도 훔치니 좀 좋아?

 

난곡 비탈 위의 비가 새던 방
너는 단 한번도 찡그리지 않았어
대신 언제나 못들은 척 이렇게 말했지
무표정한 얼굴로 익살 맞은 목소리로
이렇게 빗물이라도 훔치니 좀 좋아?

 

([문학정신], 1994년 5월호)

 

잠과 꿈
-불쌍한 내 허리

 

너랑 같이 살 때는
다른 아무 짓도 하고 싶지 않아서
잠 없는 꿈을 꾸고 또 꾸었다
허리가 저리도록 아파와서
더는 사랑할 수 없을 때까지

 

네가 떠나간 지금은
다른 아무 짓도 하고 싶지 않아서
꿈 없는 잠을 자고 또 잔다
허리가 저리도록 아파와서
더는 누워있을 수 없을 때까지

 

(미발표작)

 

 

개차반으로 취한 겨울 새벽
얼어붙은 토사물 위에 자빠져
킬킬거리며 별을 본다
또렷하지도 못한 놈들
뿌옇게 흐려지는 놈들

 

야 이 씨발 놈들아
또 무슨 시를 주절댈려고 왔냐
또 어떤 새끼 인생을 조져놀려고

 

([문학정신], 1994년 5월호)

 

시인

 

그는 평론가들과 시에 대해서 긴 토론을 했다
그는 애인들과 사랑에 대해서 긴 토론을 했다
그는 혁명가들과 혁명에 대해서 긴 토론을 했다
그는 상인들과 돈벌이에 대해서 긴 토론을 했다

 

그들이 모두 돌아가 홀로 남게 되자

그는 비로소 긴 울음을 토해냈다

 

([문학정신], 1994년 5월호)

이정환

2009.03.30 18:41
*.222.56.32
마지막 <시인> 이라는 詩.. 울컥 하네요.. ^^
profile

심산

2009.03.31 00:43
*.110.20.70
이제 와 읽어봐도 다 내 맘에 드는 시들이야...

[비가 새던 방]의 주인공은 [심산의 와인예찬]에 나오는 '립프라우밀히'고...
지금도 이 시를 읽으면 눈시울이 붉어지고...
[잠과 꿈-불쌍한 내 허리]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시!
저 [별]은 [식민지 밤노래]에 나오는 [별]과 비교해서 읽어야 되는데...
그러면 그 사이에 한 청년이 얼마나 망가졌는지(!)를 잘 알 수 있는데...ㅋㅋㅋ
[시인]...어떤 시인이 1990년대 초에 이 시를 읽고
사흘 동안 울면서 술만 퍼마셨다고 전화해준 기억이 나네...^^

어제 저녁 [더 리더-책 읽어주는 남자]를 보다가
문득 그녀 생각에 한 동안 가슴이 저릿했다는...

이윤호

2009.03.31 00:46
*.231.51.91
산이가 저릿하는 순간을 한번 보고싶은걸.... 어떨까.... 사물과 사람에 대해 불가원불가근하는 사람이 언제나 홀로 '저릿'할테지.... 에이 그냥 그러다가 콱 죽어라....할 수 없다...

강지숙

2009.03.31 04:12
*.148.222.52
읽다보니 15년전 정말 청년이셨을 선생님이 그려집니다.
오늘은 개차반으로 취하지 않고, 혼자 울지 않고, 꿈 있는 잠으로 편안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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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산

2009.03.31 08:48
*.110.20.70
푸하하 윤호야 내 policy가 불가근 불가원인가...?
뭐...not so good not so bad...^^
지숙 꿈 있는 잠은 재미없어...^^
profile

오명록

2009.03.31 22:01
*.49.219.63
이사하면서 책정리하다가 십수년전 글모임하면서 만든 문집이 보이더군요.
그 중에 한편 올려봅니다.
시를 처음 배우면서 쓴 것이라 지금 다시 보니 좀 어처구니가 없네요..^^

이제 잔치를 시작하자

서른 잔치는 끝났다고
시집이 많이 팔렸다고
작가가 최영미라고 했나
운동권 출신이라고

이제 잔치를 시작하자
나이 서른 최영미가 행주를 들고
잔치상을 치울때
찌끄러기만 남은 잔치상에
소주 한 병을 놓고
나는 잔치를 시작하겠다
지나간 잔치상이 훨씬 더 풍족했을지라도
화려했던 간판이 떨어져버린 지 오래라 해도
모두가 떠나버린 그 자리에서
나는 소주 한 병을 놓고
잔치를 시작하겠다
어린 후배들을 잡아 놓고
술병을 들이 밀겠다.

" 이 자식들 이제 잔치가 시작인데 어디 자리를 뜨려고"

창조주의 아픔

내 자식 중에 아주 똑똑하고 잘 생긴 자식이 하나 있었지 예쁘게 키우기 위해 무진 애를 썼고 훌륭하고 건장한 청년이 되었지 드디어 사회에 내보내야 했지 그러기 위해 꼭 거쳐야 될 신체검사가 있었어 속으로 걱정이 됐어 내 자식은 남들하고는 다른 부분이 많았거든 보다 자유롭고 비판적이었지 아니나 다를까
그들은 머리가 길다는 이유로 머리카락을 자르기 시작했지 남들보다 키가 크다는 이유로 다리를 잘라버리고 자기들 마음대로 이어버렸지 주먹이 커서 싸움을 잘하겠다고 한쪽 손은 압축기로 눌러 작게 만들고 한쪽 손은 아예 잘라버렸지 얼굴이 너무 잘 생겨 바람 피우게 생겼다고 얼굴을 인두로 지졌어 내 자식은 항의를 했지 이럴수가 있냐고 욕도 한 모양이야 그러자 바늘로 입을 꼬매 버렸어 드디어 합격판정이 났어 내자식은 걸레가 된 몸둥아리로 사람들 앞에 섰어 얼마안가 그 녀석은 죽고 말았어 다음부터 나는 자식을 낳으면 키가 자라지 못하게 역도를 시켰고 밥을 굶겼어 보자기로 손을 쏴 자라지 못하게 하고 심심하면 얼굴을 때려 못생기게 만들고 말대답을 못하도록 혓바닥을 잘라 반벙어리를 만들었지 신체검사는 무리없이 합격하고 아무 생각이 없이 살다가 사람들에게서 얼마안가 잊혀지고 나는 그때마다 자식을 낳았어 그리고 깨달았지
아무 생각없이 사는 게 장땡이라고.

"서른 잔치는 끝났다" 지금도 가끔 읽어보곤 하는데...그때는 왜그렇게 삐뚫어지게 읽었는지 모르겠네요.
아무 생각없이 사는게 장땡이라고 그때 깨달았으면 그렇게 살았어야 하는데...그렇게 살지 못해
지금 이모냥인가 봅니다.ㅋㅋㅋ
아~~ 그제 먹은 술을 생각하면 아직도 속이 미식거리는데...
샘의 시를 읽어나니 또 소주가 땡기네요.
" 세상에서 추방당한 너와
세상을 추방해 버린 내가"

이강영

2009.04.03 21:06
*.28.22.134
아.. 울컥하면서도 제가 느끼는 만큼 그립습니다. 요즘 젊은이들은 무슨 시를 쓸까 궁금하기도하고.. 순수? 정통이라고 할까 그러한 문학이 다시 많이 나왔으면 좋겠어요.

김영주

2009.04.05 13:28
*.187.167.85
비가 새던 방 읽으면서 눅눅한 단칸방의 어린 연인이 그려지네요.
맘이 따뜻해지면서도 맘 한켠에 바람이 쌩 불고 있는 느낌입니다.
그리구... 갠적으론 잠과 꿈을 읽으니깐 왠지 울컥울컥하는게...ㅎㅎ
감사합니다. 선생님. 좋은 시 써주셔서요.ㅋ
profile

명로진

2009.04.09 01:16
*.192.162.173
어? 저 '잠과 꿈'은 미발표 작인데
어째서 내 뇌리에 강하게 남아있을까요?

아마도
심샘의 인천 거주 시절,
저에게 슬쩍 보여 주셨던 게 아닌가 싶네요.

'잠을 많이 자니까 허리가 아파요'라고 말하자
샘이 저에게 '그렇다니까' 하며 보여 주신 것도 같고.....

그때 보고
20년 넘은 지금 또 봐도

좋네요~~~~
profile

명로진

2009.04.09 01:16
*.192.162.173
더불어....
심샘 시집 한 권 내세요.....

^^

조현옥

2009.04.13 00:36
*.237.170.92
너무 고통스러워서

'허리가 저리도록 아파올' 정도로 현실에서 도피했다가, '인생이 조져졌다는 걸' 깨달은 후
'비로소 긴 울음을 토해냈' 네요...

시간의 가장 아름다운 점은 흘러간다는 거지요...^^

심은

2010.01.23 14:54
*.110.20.12
아빠 나에게 <식민지 밤노래> 주지 않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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