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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레를 생각한다
[올레는 자유다] 저자서문
올레는 제주도에서 만들어지고 있는 어떤 길이다. 최근까지 통행이 빈번한 길도 있고, 예전에는 그러하였으나 이내 잊혀져버렸던 길도 있고, 아예 존재하지도 않았으나 새로 만들어진 길도 있다. 이 길들이 이어져 ‘제주올레’가 된다. 제주올레는 일단 ‘걸어서 제주 한 바퀴’를 목표로 계속 만들어지고 있다. 현재까지 절반을 조금 넘었으니 온전한 원을 그리기에는 하세월일 수도 있다. 올레는 그렇게 현재진행형의 길이다.
올레는 걷기 위한 길이다. 자동차를 타고 달리기 위한 길이 아니라는 뜻이다. 올레를 걷는 목표는 그 자체에 있다. 다시 말해 ‘걷기 위해 걷는’ 길이다. 언뜻 무의미한 동어반복처럼 들리는 이 명제 안에 그러나 올레의 혁명성이 있다. 올레는 전쟁을 준비하며 정찰 삼아 뚫어놓은 길이 아니다. 경제적 이익을 가늠하여 만든 길도 아니다. 하물며 종교적 이유로 생겨난 길도 아니다. 심지어 체력단련을 위해 낸 길조차도 아니다.
걷기 위해 걷는다. 이 단순한 명제 안에 올레의 아름다움이 있다. 신자유주의가 세계를 제패하고 있는 이즈음 우리의 시대정신은 속도와 실용만을 최선의 가치로 내세운다. 올레의 무용(無用)함은 바로 이러한 시대정신에 대한 작지만 유쾌한 반란이다. 모두가 더 빠른 속도와 더 많은 이윤을 추구하기 위하여 두 눈에 불을 켜고 미쳐 날뛰고 있는데 마치 자신만은 그런 세상사와는 무관하다는 듯 ‘느릿느릿 하릴없이’ 올레를 걷는 사람들이 있다. 이 책은 그 길과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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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레는 마을과 집을 잇는 작은 길이다. 집 뒤란의 장독대로부터 마을 어귀의 밭고랑까지를 잇는 그런 개인적인 길이다. 집에 고립되어 있는 개인은 올레를 통하여 비로소 세상으로 나아간다. 그 길의 한쪽 끝이 내 집 마당으로 이어져 있으니 그 길의 다른 쪽 끝은 다른 사람의 집 마당으로 이어져 있으리라. 그런 뜻에서 올레는 인연이다. 우리는 올레를 통해서 다른 사람들과 관계를 맺는다.
오래 전 한 시인은 이렇게 썼다.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그 섬에 가고 싶다. 나는 그 시에 빗대어 이렇게 말하련다. 사람들 사이에 길이 있다. 그 길을 걷고 싶다. 그 길이 올레다. 올레를 걸으면서 생각한다. 참으로 복잡하게 얽힌 인연의 실타래가 나를 이 길로 인도했구나. 올레를 걸으며 맺어진 새로운 인연들을 생각한다. 우리가 걷는 이 길이 새로운 인연을 만들어내고, 그 인연을 따라 걷다보니 몰랐던 사람을 알게 되는구나. 비로소 ‘사람’을 만나게 되는구나.
이 책이 쓰여진 배경 또한 그러하다. 처음에는 그저 걸으려 했을 뿐이다. 그런데 걷다보니 길동무가 생겼다. 그와 다정하되 무의미한 이야기들을 두런두런 나누며 걷다보니 전에는 안 보이던 길이 눈앞에 펼쳐지기 시작했다. 처음 보는 길은 언제나 매력적이다. 저 모퉁이를 돌면 어떤 길이 펼쳐질까 궁금해진다. 이른바 ‘블라인드 코너(blind corner)'다. 모든 블라인드 코너는 두려움과 동시에 설레임을 안겨다준다. 그러나 이 책을 쓰기로 결심하던 바로 그 순간에는 일말의 두려움도 느낄 수 없었다. 오직 야릇한 설레임만이 오롯이 피어났을 뿐이다.
내가 이렇게 무작정 혹은 다짜고짜 어떤 책을 쓰겠노라고 나선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우스꽝스러운 고백이 되겠지만 나 자신조차 의아해하고 있다. 최근 몇 년간 글쓰기라면 지레 손사래부터 쳐대며 넌덜머리를 내고 있던 참이다. 그런데 올레에 대해서는 글을 써보고 싶었다. 무슨 내용을 어떻게 쓸지 아무 계획도 없었지만 그냥 써질 것 같았다.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 인연이다. 올레를 걸으면서도 취재를 한다는 생각 따위는 단 한 순간도 해본 적이 없다. 그저 휘파람이나 불고 와인이나 홀짝이며 터덜터덜 걸었을 뿐이다. 근심 걱정을 혹은 숙제를 짊어지고 올레를 걷는다면 안 걷느니만 못하다. 올레는 그냥 걸으면 된다. 즐기면 그만이다. 올레에 대한 글 역시 그러해야 된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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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봄에서 초여름에 걸쳐 현재까지 나있는 올레를 전부 걸었다. 때로는 이런 저런 상념에 잠기기도 했지만 대부분 아무 생각 없이 그냥 걸었다. 그냥 하릴없이 걷는 그 길은 축복이었다. 이제 걷기를 잠시 멈추고 글을 쓰기 위하여 책상 앞에 앉았다. 어떤 글을 쓸 것인가 걱정하지 않으련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이 책이 제주올레 코스 안내집 같은 것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 정보들은 사단법인 제주올레 홈페이지에 접속하면 언제든 손쉽게 구할 수 있다. 똑같은 이야기를 매체만 달리하여 반복하는 것은 물자와 시간과 노력의 낭비일 뿐이다.
나는 길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싶다. 나는 걷기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싶다. 물론 제주올레에 대해서도 하고 싶은 이야기가 너무 많다. 올레에서 만난 사람들과의 인연에 대해서도 기록해두고 싶다. 올레는 그러므로 이 책의 화두다. 나는 올레를 화두 삼아 길과 걷기와 사람과 삶에 대하여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그 이야기를 통하여 당신에게 가닿고 싶다. 이 책 [올레는 자유다]는 당신에게 가닿고 싶어 내가 만든 작은 고샅길이다. 당신이 속도와 정보와 이윤을 추구한다면 이 책은 무용지물이 될 것이다. 이 책은 내가 당신과 인연을 맺고 싶어 글로 만들어낸 작은 올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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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심산
[심산스쿨] 2009년 7월 8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