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심산 등록일: 2009-07-08 18:19:32 IP ADRESS: *.237.8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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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g1]

길은 그리움이다

 

본문 첫번째 글

 

길, 이라는 말을 들으면 맨 먼저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다. [광대타령]이었는지 [들병이]였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전후좌우의 자세한 맥락 역시 잊어버렸다. 어찌되었던 방학기의 만화다. 시대는 아마도 조선 말기쯤 된다. 그 이미지 속의 유일한 인물은 들병이다. 들병이란 술병(아마도 호리병)을 들고 다니며 술을 파는 아낙을 뜻한다. 물론 술만 팔았던 것은 아니다. 멍석 따위를 둘둘 말아 괴나리 봇짐처럼 이고 지고 다니다가 발정난 수캐마냥 치근덕대는 남정네를 만나면 술도 팔고 몸도 파는 것이다.

 

그런 들병이가 진정으로 사랑하는 남자를 만났다. 그 남자의 직업은 아마도 광대였지 싶다. 방랑이 본색인 두 남녀가 한 살림을 차린다. 두 사람의 신혼생활은 달콤하고 다정하고 뜨거웠다. 본래 ‘놀아본’ 사람일수록 가정에 충실하려 애쓰는 법이다. 들병이 역시 제 서방을 위하여 밥을 하고 찌개를 끓이고 빨래를 해서 너는 그 모든 일상들이 전율이 느껴질 만큼 행복하다. 아무 문제도 없어 보인다. 이제 그들은 한 곳에 정착한 지아비 지어미로서 행복하게 살아가기만 하면 된다.

 

문제의 그 장면은 남자가 집을 비운 사이에 등장한다. 아무리 서로를 사랑한다고 해서 손가락만 빨면서 살 수는 없다. 남자는 돈을 벌어오기 위하여 집을 나선다. 아마도 광대질을 하러 떠난 것이리라. 살갑고 애틋한 미소로 남편을 배웅한 들병이는 이내 집 앞 텃밭에 쪼그리고 앉아 푸성귀 따위를 손질하고 있다. 전통적인 아내의 모습이다. 질끈 동여맨 머리 수건 아래로 성실한 노동의 땀방울이 돋는다. 흙 묻은 손등으로 땀방울을 찍어내는 그녀의 손놀림마저 행복에 겨운 춤사위처럼 아름답다.

 

그런데 그때였다. 무심코 고개를 든 그녀의 시야에 봐서는 안될 것이 불쑥 들어온다. 길이다. 그냥 길이다. 시골마을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그저 그런 길이다.  평범하기 이를 데 없는 길이다. 때마침 봄이었다. 그 길 위로 아지랑이가 피어오른다. 가물대는 아지랑이 너머로 길은 끝간 데 없이 펼쳐지다가 가뭇없이 사라진다. 르네상스 시대의 원근화법에서 보이는 바로 그런 길 말이다. 순간 그녀는 예기치 못한 신열에 들뜬다. 잊고 살았던 피톨이 온몸을 휘감고 돌아 이마에서 열기가 피어오른다. 불행의 예감에 그녀는 질끈 눈을 감아버린다. 그리고 손 보던 푸성귀에 온 신경을 집중하려 애쓴다. 그러나 틀렸다. 너무 늦었다. 그녀는 길을 보아버린 것이다. 들병이는 무심하고 홀린듯한 표정으로 다시 길 저편을 바라본다. 그러다 문득 당연하다는듯 호미를 던져버리고 흙먼지를 툭툭 털어낸 다음 그 길을 향해 발걸음을 떼어놓기 시작한다.

 

그녀는 광대인 남편을 진심으로 사랑한 게 아니었던가? 그렇지 않다. 사랑했다. 그녀가 ‘논다니’ 출신이라는 것이 치명적인 약점이었을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녀는 현재 그곳에서 살고 있는 자신이 불행하다고 느껴서 떠나기로 결심한 걸까? 그렇지 않다. 단언컨대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내와 한 살림을 차리고 정착하여 그가 돈을 벌러 집을 비운 사이 마당의 텃밭을 손질하고 있던 바로 그 때가 그녀의 생애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이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왜 호미와 더불어 남편도 집도 행복도 모두 버리고 무작정 그 길로 정처 없이 걸어 나가고야 말았을까? 답변이 쉽지 않다. 조리 있게 설득해내기가 어렵다. 하지만 나는 그녀를 이해할 수 있을 듯하다. 길이라는 말을 들으면 나는 언제나 호미를 든 채 멍하니 아지랑이 너머를 바라보던 들병이를 떠올린다.

 

[img2]

 

무라카미 하루키의 [국경의 남쪽, 태양의 서쪽]에도 비슷한 이야기가 나온다. 시베리아의 농부들에게서 이따금씩 발견되는 어떤 증세인데 하루키는 그것을 ‘시베리아병(病)’이라고 불렀다. 시베리아는 허허벌판이다. 그곳에서의 농부의 삶이란 단조롭기 그지없다. 해가 뜨면 밭에 나가 일을 한다. 해가 질 때쯤이면 밭일을 정리하고 집으로 돌아온다. 그뿐이다. 그의 할아버지도 그랬고, 그의 아버지도 그랬고, 그 역시 그러한 삶을 살고 있다. 해질 때가 되면 밭 위에 선 농부의 그림자가 길어진다. 그 즈음 되면 지는 해를 힐끔 힐끔 바라보기 마련이다. 지는 해란 그들에게 하루의 노동이 끝나감을 알리는 시계이기도 한 것이다.

 

평생 묵묵히 그런 삶을 살아오던 농부가 어느 날 문득 농기구를 툭 던져놓고는 해가 지는 곳을 향하여 걷기 시작한다. 아내와 아이들에게 작별인사를 고하지도 않는다. 재산 따위는 커녕 마실 물이나 먹을 음식조차 챙기지 않는다. 그냥 어느 날 갑자기 ‘태양의 서쪽’을 향하여 걷기 시작하는 것이다. 언제까지? 죽을 때까지. 그는 걷다가 허기와 추위에 지쳐 죽을 때까지 계속 걷는다. 걷는 동안 단 한번도 ‘태양의 동쪽’을 향하여 발길을 돌리지 않는다. 그것이 시베리아병이다. 그래서 시베리아 벌판에서는 아무 것도 몸에 지니지 않은 채 서쪽을 향하여 머리를 두고 죽어 있는 이름 없는 농부의 시신들이 곧잘 발견된다고 한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지어낸 이야기인지, 실제로 그런 병이 존재하는지, 아니면 시베리아 지방 전래의 소문인지 나는 모른다. 명확한 출전을 밝히거나 사실의 진위 여부를 가리려 시도해볼 생각도 없다(이런 태도는 이 책 [올레는 자유다] 전체를 관통하고 있다. 독자 제현의 너른 양해를 구한다). 중요한 것은 이 이야기가 내 가슴에 저릿한 울림을 주었다는 것이다. 그럴 수도 있겠다. 이해가 된다. 내가 시베리아의 농부였다면 그럴 수도 있을 것 같다. 비장한 결심이나 명확한 목표의식 따위는 필요 없다. 그저 낡은 실밥이 툭 끊어지듯 어느 날 갑자기 태양의 서쪽을 향하여 터벅터벅 걸어가는 것이다. 가슴 벅찬 희망도 없이, 고통에 일그러지는 표정도 없이, 그저 무심히 발걸음을 옮길 수도 있을 것 같다.

 

들병이나 시베리아의 농부는 행복을 찾아가거나 고통을 잊기 위하여 길을 나선 것이 아니다. 이 점에서 [파리, 텍사스]에 나오는 트래비스(해리 딘 스탠튼)와 다르다. 그는 어느 날 갑자기 가출해버린 젊은 아내(나스타샤 킨스키)의 부재가 가져온 고통을 이길 수 없어 무작정 걷기 시작한 남자다. 그것은 자발적 고행이며 치유 혹은 망각을 위한 고통의 몸부림이다. 그것 또한 길임에는 틀림없으나 내가 가지고 있는 본원적인 이미지의 길과는 사뭇 다른 성질의 것이다. 내가 생각하는 길은 차라리 로버트 플랜트가 [스테어웨이 투 헤븐]에서 노래한 그런 길이다. 서쪽을 볼 때마다 영혼은 떠나고 싶어 울부짖는다(There's a feeling I get when I look to the west, and my spirit is crying for leaving)는 바로 그런 길.

 

그 길을 무엇이라 명명해야 옳을까. 알 수 없다. 우리는 아니 나는 왜 길을 보면 하염없이 걷고 싶어지는 것일까. 모르겠다. 길 저편의 그 무엇이 우리를 끌어당기는 것일까. 길 저편 너머에는 행복이라는 것이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기에는 나이를 너무 먹어버렸다. 길 저편의 세상은 이곳보다 더 아름답고 근사할 것이라고 상상하기에는 돌아다녀 본 곳이 너무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길을 보면 가슴이 설레는가. 어쩌면 길 저편의 그 무엇이 아니라 길 자체가 우리를 끌어당기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길에는 무엇이 있는가. 어떤 곳에 이르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길 그 자체가 목적이라면, 그렇다면 길은 우리에게 무엇인가.

 

길은 그리움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내게는 길을 달리 설명할 방법이 없다. 길은 그리움이다. 그리움임에는 확실하되, 무엇을 향한 그리움인지는 여전히 모르겠다. 머리를 길게 빗어 내리는 여인을 향한 그리움도 아니고, 초고층 주상복합단지가 들어선 편리한 도시를 향한 그리움도 아니고, 대자연이나 초월적이고 종교적인 존재를 향한 그리움도 아니다. 길을 마주하면 두려움과 설레임이 인다. 하지만 기어코 그 길을 향해 발길을 내딛게 하는 것은 결국 그리움이다. 나는 그것을 본원적인 그리움이라고 부른다. 여기 자신이 무엇을 그리워하는지도 모르는 자가 길 앞에 서 있다. 이미 늦었다. 돌이킬 수 없다. 들병이가 호미를 던진다. 농부가 집을 등진다. 록커가 울부짖는다. 나는 걷기 시작한다.

 

[img3]

 

마지막 사진/김진석

 

[심산스쿨] 2009년 7월 9일

조현옥

2009.07.08 21:09
*.237.170.92
'올래?' 라는게 길인가봐요...^^ (ㅡ_ㅡ)
정말 걷고 싶네요. 신도 짐승도 아니고 사람이니까... ^^

박선주

2009.07.08 23:42
*.32.46.69
가슴에 바람이 붑니다..
뜨거운 입김같은 바람이..

김경선

2009.07.09 02:15
*.176.124.168
궁금하네요, 저 마지막 사진은 어떤 장면일까...?

먹고살다가 주워들은 이야기인데, 서쪽에 부엌이 있으면 여자가 바람이 난다네요.
생각해 보세요. 해질 녁의 하늘과 바람이 창밖에서 느껴진다면 저녁 준비가 되겠어요? 당연히 안 되지요.
옛날 우리집은 서쪽에 주방이 있는 언덕위의 집이었답니다.
해질 녘이면 나가서 온 동네를 휩쓸고 다닌 덕에 그 동네 구석구석 모르는 곳이 없어요.
해가 지고 선선한 바람이 부는 산 아래 언덕 길위에서 느껴지던 그 묘한 감정들...정말 사람 미치게 만들던 그 묘한 감정들의 정체가 저도 늘 궁금했습니다.

서쪽의 의미가 무얼까요? 귀향...?

profile

심산

2009.07.09 16:47
*.237.80.179
선주야 조심해, 너 그러다 바람 난다...
어느 날 치과용 도구들을 툭 던지고 하염 없이 걸어가게 된다...ㅋㅋㅋ

경선, 뭐 어떤 장면이야? 내가 그냥 걸어가는 장면이지...
아, 저 사진을 보니 계속 걸어가야 할 것 같다...^^

강지숙

2009.07.10 08:35
*.148.218.63
길..이라는 게 정말
오로지 걷는 거 외에는 다른 것들...
그러니까 상념에 젖는다든가 하는 것들을 할수 없게 만드는 묘함이 있어요.

포레스트 검프에서 톰 행크스의 망각(?)의 달리기도 결국 길이 있어서 달리고 있었을 뿐인 것처럼.

이유미

2009.07.10 13:40
*.176.96.164
올레길=마약길=위대한 롤러코스터!!

차민아

2009.07.13 20:37
*.10.165.122
전생이 있었다면 그 막연한 기억 속의 어딘가를 찾고 싶은 그리움 아닐까요?

서영우

2009.07.21 15:34
*.216.12.100
길은 ... 누군가에게로 가는 것, 누군가 오는 것, 누군가가 나일지도

이은경

2009.08.30 11:23
*.117.16.3
산아! 글에 있어 쟝르를 망라해 재주 있는건 익히 알았지만 윗글은 정말 멋지다.
너 글 많이 써야겠다. 많은 사람들에게 행복을 주는 글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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