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에 제주올레 관련 에세이집을 내겠다는 계획은 속절 없이 물 건너 갔습니다. 아~무 이유도 없고, 그냥 제가 게을렀던 탓입니다. 마감이 없으면 도무지 글을 쓸 생각조차 안한다는 말이죠(ㅋ). 덕분에 이 계획을 덮을까 아님 내년 봄에나 낼까...하고 있는데 뜻밖에도 [제민일보]에서 원고청탁이 들어왔습니다. 제주올레의 코스별 에세이를 써달라는 겁니다. 그래서...쓰기 시작했습니다. 아마도...이건 쓸 겁니다, 왜냐, 원고청탁이고 마감(!)이 있잖아요(ㅋ). [제민일보]에는 2009년 10월 10일(토)부터 연재되고요, 연재의 제목은 '작가 심산의 제주올레 사랑고백'입니다. 이 연재물에 쓰이는 사진들은 전부 김진석 선생님의 작품들이고요, 신문에도 그 점을 명확히 밝혔습니다.
한 외지인의 제주올레 사랑고백
-제주올레 에세이 연재를 시작하며
제주올레는 이미 ‘너무 많이 알려진’ 길이 되어 버렸습니다. 듣자하니 외국인 트레커들 사이에서도 유명세를 누리고 있다 합니다. 덕분에 제주를 찾는 사람들이 부쩍 늘었고 지역경제에도 적지 않은 활력소가 되고 있다니 반가운 소식입니다. 제주올레를 즐겨 찾는 한 외지인으로서 이 길에 대한 사랑을 고백할 수 있는 지면을 얻게 되어 아주 기쁩니다. 코스별 안내 따위는 동어반복이 될 터이니 가능하다면 ‘감성적인 에세이’를 쓰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독자 제현의 너른 양해와 따뜻한 성원을 부탁드립니다(심산).
[img1]제주올레의 맛뵈기 혹은 축소복사판
제주올레 1-1코스 우도올레
글/심산(심산스쿨 대표)
사진/김진석(사진작가)
제주올레의 전코스를 걸었다. 어떤 코스는 역방향으로도 걸었고, 또 다른 코스는 세 번이나 걸었다. 따사로운 봄볕을 만끽하며 걷기도 했고, 몰아치는 비바람에 어깨를 잔뜩 웅크리고 걷기도 했으며, 낙엽이 떨어지기 시작하는 길을 걷기도 했다. 틈날 때마다 제주올레를 쏘다니는 내게 사람들이 묻는다. 어떤 코스가 제일 좋아요? 이틀 밖에 시간이 없다면 어디를 걸어야 할까요?
난감한 질문이다. 답변을 발설하는 순간 틀리기 십상인 질문인 것이다. 그것은 이를테면 이런 질문과도 같다. 20대 시절이 좋았나요 40대 시절이 좋았나요? 20대 시절은 20대여서 좋고, 40대 시절은 40대여서 좋다. 동시에 20대 시절은 20대여서 불행했고, 40대 시절은 40대여서 불행하다. 요컨대 모든 시절에는 나름대로의 행복과 불행이 있는 것이다. 길 또한 이와 다르지 않다. 우리는 그것을 개성이라고 부른다.
제주올레의 모든 코스에는 나름대로의 개성이 있다. 어떤 코스는 화려한 아름다움을 뽐내고 또 다른 코스는 진지한 고뇌를 불러온다. 그런데 과연 아름다움이 고뇌보다 좋은 것인가? 꼭 그렇지는 않다. 다만 다를 뿐이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대답한다. 모든 코스가 다 좋아요. 그리고 모두 다르지요. 같은 코스라도 어떤 계절과 어떤 날씨에 어떤 방향으로 걷느냐에 따라 완전히 달라요. 가능하다면 제주에 오래 머무르시면서 한 코스 한 코스 음미해보시는 게 좋아요.
하지만 모든 일에는 시작이 있는 법이다. 당신은 제주올레를 모두 걸어보려 한다. 그렇다면 어느 한 코스에서 출발해야 한다. 사정이 그러하다면 나는 주저 없이 우도올레를 추천하련다. 이유는 간단하다. 우도올레는 제주올레의 맛뵈기 혹은 축소복사판인 까닭이다. 제주올레는 ‘걸어서 제주 한 바퀴’를 목표로 한다. 이 길이 완성되면 출발점으로 되돌아오는 ‘아름다운 폐곡선’이 만들어질 것이다. 동쪽 끝의 시흥초등학교에서 시작된 이 길은 현재 서쪽 끝의 한림항까지 모두 14코스로 이루어져 있다. 번외코스 2곳을 합치면 16코스가 된다. 제주 남부 해안을 모두 품에 안은 이 길은 그러므로 아직 미완성이다. 대략 3개월마다 한 코스씩 길을 내고 있으므로 아마도 완벽한 폐곡선을 이루기까지는 3~4년이 더 소요될 것이다. 우도올레는 조만간 완성될 이 제주올레의 폐곡선을 선체험할 수 있는 코스다. 즉 자신이 첫발자욱을 뗀 바로 그곳에 마지막 발자욱을 겹쳐넣을 수 있는 곳이다.
[img2]우도올레에는 제주올레의 모든 것이 축약된 형태로 집중되어 있다. 제주도는 한반도에서 가장 큰 섬이다. 섬에는 배를 타고 들어가야 제 격이다. 하지만 우리는 제주도를 방문할 때 주로 비행기를 이용한다. 바다를 가로질러 섬에 들어간다는 느낌이 반감되는 것이다. 하지만 제주도에서 우도로 들어갈 때는 배를 이용하지 않을 방법이 없다. 우도는 제주도에 딸린 62개의 섬들 중에서 가장 큰 섬이다. 우리는 성산항에서 배를 타고 이 섬으로 진입한다. “배를 타고 들어가 섬을 한 바퀴 걷는다.” 이것이야말로 우도올레의 정체성이자 매력이 아닐 수 없다.
폐곡선을 걸을 때의 장점은 어느 지점에서 시작해도 무방하다는 것이다. 성산항에서 배를 타면 우도의 천진항이나 하우목동항으로 들어간다. 어느 곳에서건 곧바로 올레를 시작할 수 있다. 우도올레의 총연장이 16Km에 불과하니 걸음이 빠른 사람이라면 4시간만에 완주를 한 다음 다시 배를 타고 나올 수도 있으리라. 하지만 단지 ‘발도장을 찍기 위하여’ 우도에 간다면 그보다 더 어리석은 짓도 없다. 왜 그리 서두르는가? 우도는 단지 4시간 짜리 워킹트랙을 선사하기 위하여 존재하고 있는 섬이 아니다. 그곳에는 사람이 있고, 풍광이 있고, 역사가 있고, 생활이 있다.
우도에 숙소를 정하라. 그 작은 섬에 뭐 볼 게 있느냐고 반문한다면 당신은 제주올레를 걸을 자격이 없다. 나는 우도에서 일주일을 머물렀다. 매일 매일이 새로운 날이었다. 정 바쁘다면 하루라도 머물러라. 우도에서 해가 지고 달이 뜨고 별이 지는 것을 보아야 한다. 우도에서 바다 저 켠의 성산일출봉에 아침햇살이 비추는 장관을 바라보아야 한다. 우도올레는 어디에서 시작하는가? 당신의 숙소 앞 고샅길로 나서면 그곳이 바로 우도올레다.
나는 우도에 들어갈 때 가능하면 막배를 탄다. 운이 좋으면 배 위에서 붉은 노을을 만끽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숙소는 천진항과 우도봉 사이의 허름한 민박집으로 정한다. 아침마다 산책 삼아 우도봉에 오를 수도 있고, 밤이면 바다 건너 제주의 야경을 감상할 수도 있는 까닭이다. 슬리퍼를 끌고 동네의 수퍼로 향한다. 우도땅콩을 사기 위해서다. 단언컨대 나는 세상에서 이보다 맛있는 땅콩을 먹어본 적이 없다. 시원한 캔맥주를 들이키며 우도땅콩을 입 안에 털어 넣다 보면 어느 새 하늘에는 별들이 가득하고 가슴 속에는 행복감이 뭉게뭉게 피어오른다.
아침 일찍 올레길을 나선다. 어느 방향으로 가도 상관없다. 하지만 우도봉에서의 조망을 하이라이트로 남겨두려면 천진항 방향으로 걷기 시작하는 것이 좋다. 길을 잃을 가능성은 없다. 곳곳에 올레길 표지판이 세워져 있다. 어떤 때는 파란 화살표로, 어떤 때는 파란 리본으로, 어떤 때는 근사한 나무판으로. 하지만 설혹 길을 잃는다 해도 그 또한 좋다. 손오공이 날아봤자 부처님 손바닥 안이다. 올레길에서 벗어나봤자 우도 안이다. 올레길은 천천히 걷는 게 좋다. 마치 맛있는 요리가 일찍 끝나지 않기를 바라듯, 마치 흥미로운 책이 일찍 끝나지 않기를 바라듯, 천천히 음미하며 걷는 것이다.
당신은 우도올레에서 제주올레의 모든 것을 볼 것이다. 작고 아름다운 섬 비양도를 한 바퀴 돌 때면 우도올레의 모든 것을 예감할 수 있다. 제주도-우도의 관계가 곧 우도-비양도의 관계인 까닭이다. 우도봉에 올라 우도 전체를 내려다본다. 당신이 걸었던 돌담길과 들판과 모래사장이 한눈에 들어온다. 그곳에 오밀조밀 모여살고 있는 사람들과 동물들의 기쁨과 슬픔이 시원한 바닷바람을 타고 몸 전체에 전해져오는 느낌이다. 불현듯 당신은 우도를 떠나기 싫어진다. 그 아름답고 서글프고 가슴 저린 풍경 속으로 보다 더 깊숙이 들어가 보고 싶다. 그렇다면 이제 당신은 본격적인 제주올레를 시작할 준비가 된 것이다.
[img3][제민일보] 2009년 10월 10일
엄지원 양이 나와서 손가락으로 방향을 가리키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