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삼신인이 신접살림을 차린 곳
제주올레 제2코스 광치기~온평
글/심산(심산스쿨 대표)
사진/김진석(사진작가)
제주까지 오가는 것은 분명 여행에 속한다. 하지만 제주올레만을 똑 떨어트려놓고 들여다보자면 여행이라 할 수 없다. 그것은 산행도 아니고 도전도 아니다. 오히려 산책에 가깝다. 이따금씩 야트막한 오름에 오를 때를 제외해놓고 보면 도처에서 민가를 만나게 되는 것이다. 마늘밭이나 과수원 혹은 해녀들의 탈의장 같은 곳을 지나칠 때면 사람 사는 냄새가 물씬 난다. 이 점에서 제주올레는 히말라야 트레킹과 다르다. 그리고 그것은 감점 요인이 아니라 특장이요 개성이다.
제주올레를 걷다보면 유난히도 여성들과 많이 마주치게 된다. 삼삼오오 떼를 지어 함박웃음과 이야기꽃을 활짝 피우며 걷는 이들도 있고, 마치 자기 동네의 고샅길을 거닐듯 사브작 사브작 홀로 걷는 이들도 있다. 얼핏 보면 익숙한듯 하면서도 곰곰이 따져보면 낯선 풍경이라 아니할 수 없다. 우리나라의 어떤 길에서 이렇게 많은 여성들과 마주칠 수 있었던가? 여성 홀로 일말의 불안감도 없이 편안한 마음으로 걸을 수 있는 길이 과연 존재하기나 했는가? 왜 유독 제주올레에는 여성들이 넘쳐나는가?
예로부터 제주는 여성들의 기가 드센 곳으로 알려져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보기 드물게 모권사회의 전통이 생활 속에 녹아들어 있는 곳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런 전통만으로 이 현상을 설명해내기란 어렵다. 어줍지 않은 내 결론부터 들이대자면 나는 이것이 일종의 ‘후천개벽’이라고 생각한다. 발상의 전환이요, 음양의 교체이며, 새로운 세상이 열린 것이다.
사단법인 제주올레의 대표와 실무진들은 거의 다 여성들이다. 이 사실부터가 혁명적이다. 길을 내는 것은 예전부터 남성의 영역에 속해 있었다. 그리고 남성들이 길을 내는 이유는 단순무식(!)하다. 전쟁 혹은 경제를 위해서다. 인간이 갈 수 있는 가장 험난한 길을 추구하는 알피니즘 역시 남성들의 전유물이다시피 했다. 그들은 ‘어려운 길’과 ‘위험’ 그리고 ‘한계에의 도전’을 추구해왔다. 하지만 여성들이 만들어가고 있는 제주올레는 이와 전혀 다르다. 제주올레는 ‘아름다움’과 ‘관계’를 지향한다. 경제적 이익이나 정복의 성취감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대신 다만 길 자체의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이다. 그 길을 걸으며 새롭게 형성되는 사람 및 사물들과의 관계에 탐닉하는 것이다.
사정이 이러하다보니 이른바 남성 산악인들은 이 길에 금세 흥미를 잃고 만다. 제주올레에는 체력을 소진하고 한계에 도전하여 무언가를 성취해냈다는 자부심(?)을 선사해줄만한 그런 길이 없다. 실제로 내 주변의 지인들 중 몇몇은 제주올레를 다녀온 후 이렇게 반문한다. 그게 뭐야? 이게 다야? 제주올레의 전코스를 3박 4일만에 종주했다는 한 친구는 여전히 무언가 미진한 표정으로 고개를 모로 흔든다. 너무 시시하던데? 차라리 불수도북(불암산-수락산-도봉산-북한산 종주코스)이나 한 번 더 뛸걸 그랬어. 이런 친구들에게는 그저 피식 웃어줄 도리 밖에 없다. 그들에게는 제주올레라는 ‘전혀 새로운 길’을 음미할만한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것이다.
[img2]제주올레에 환호하는 것은 여성들이다. 그들은 길섶에 나뒹구는 귤 하나와 해안도로를 가로지르는 게 한 마리에 가슴이 따뜻해진다. 성게 알을 파내고 계신 해녀 할머니 곁에 쪼그리고 앉아 서로 자기의 남편 욕하기에 시간 가는 줄을 모른다. 그렇게 걷는 둥 마는 둥 하다가 다리가 아프면 안 가면 그만이다. 남성들이 목표지향적이라면 여성들은 관계지향적인 것이다. 지리산 종주 중에 갑자기 귀가하기란 불가능하다. 하지만 제주올레에서라면 가능하다. 현재 있는 곳 어디에서건 전화 한 통화만 걸면 콜택시가 달려와 숙소까지 안전하게 모셔다 주니까.
아마도 그래서일 것이다. 제주올레를 걷는 여성들의 얼굴이 그토록 밝고 환한 것은. 그들은 무언가를 꼭 성취하려 하지 않는다. 그저 걷기를 즐기고, 함께 걷는 이들과 대화를 나누며, 마주치는 사물들마다 사랑의 눈길을 보내면 그뿐이다. 얼마나 많이 걸었느냐 혹은 얼마나 빨리 걸었느냐는 그들의 관심 밖이다. 가다 못가면 어떤가? 다른 길로 에둘러 가면 또 어떤가? 그들에게 제주올레는 ‘소풍’이다. 일상의 쳇바퀴에서 벗어나, 이 지긋지긋한 남성중심사회의 폭력성과 성취문화에서 벗어나, 자신의 존재를 긍정하고 삶의 아름다움을 찬미하는 것이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제주올레는 그 길을 걷는 여성들이 있어서 아름다운 것이다.
제주올레를 걸으며 많은 여성들을 만났다. 제주올레 제1코스에서 만난 한 여성은 홀로 걷고 있었는데 어찌나 느리게 걷는지 우리는 그녀를 ‘사브작녀’라고 불렀다. 사브작녀는 서울의 한 병원에서 근무하는 치과의사였다. 그녀는 매주 주말마다 홀로 제주에 내려와 이렇게 아무 코스나 걷다가 올라가곤 한다고 했다. 서로 명함을 주고받으며 인사를 나눈 것도 잠시, 그녀는 곧 우리 일행의 저 뒤쪽으로 까마득히 멀어져갔다. 여전히 느린 속도로 사브작 사브작 걷고 있는 그녀의 표정에는 일말의 불안감도 없었다. 오직 작은 행복감만이 광채를 발하고 있었을 뿐이다.
제주올레의 제2코스는 나 홀로 걸었다. 식산봉 아래 오조리 마을을 지나칠 때 즈음 역시 나처럼 홀로 걷고 있는 대구 출신의 한 여성을 만났다. 우리는 오래된 지인처럼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으나 이내 앞서거니 뒤서거니 각자 자기 페이스대로 걸었다. 혼인지에서 재회한 우리는 벤취에 나란히 앉아 사과 한 알을 깎아 먹었다. 고, 양, 부 삼신인이 벽랑국에서 찾아온 세 공주를 만나 신접살림을 차렸다는 바위동굴을 들여다보며 그 소박함 내지 질박함에 빙그레 웃어보기도 했다. 이윽고 온평포구에 도착한 우리는 해삼 한 접시에 소주 한 병을 기울이며 우리의 만남과 이별을 자축했다. 위의 이야기는 그 술자리에서 내가 즉흥적으로 펼쳐보인 ‘제주올레 후천개벽설(!)’이다. 그녀는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 동의를 표했다.
광치기에서 온평에 이르는 제주올레 제2코스는 제주의 건국신화가 시작된 곳이다. 식산봉과 대수산봉에서 내려다보이는 제주 동부해안의 풍광은 왜 이곳에서 제주의 시조들이 신접살림을 시작했는지를 설득력 있게 보여준다. 누구라도 한 나라를 일으켜 세우고 싶을 만큼 아름다운 곳이다. 그 나라의 한 구석에서 조용하나 혁명적인 후천개벽이 시작되었다. 전통적인 시각에서 보자면 ‘길 같지 않은 길’이 생겼고, ‘가도 그만 안 가도 그만’인 그 길을 사람들이 걷게 된 것이다. 걷는 사람들 중에 여자들이 더 많아 그 길이 더욱 아름답다. 홀로 걷는 여자들의 행복한 표정이 마주치는 사람의 마음을 평화롭게 만든다. 그 길이 제주올레다.
[img3][제민일보] 2009년 10월 24일
아~ 하는 감탄사를 자아내개 한다.
다음편이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