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정한 사람과 와인을 홀짝 물회를 후루룩
제주올레 제5코스 남원~쇠소깍
글/심산(심산스쿨 대표)
사진/김진석(사진작가)
내 앞에 제주올레 제5코스의 사진이 두 묶음 펼쳐져 있다. 하나는 내가 찍은 볼품없는 사진들이고, 다른 하나는 김진석이 찍은 볼만한 사진들이다. 그와 나는 서로 다른 날 이 길을 걸었다. 내가 걷던 날은 신비로운 바다안개(海霧)가 시야를 희롱하던 날이었고, 그가 걸었던 날은 눈부신 햇살이 카메라 뷰파인더를 가득 채운 날이었다. 두 사진을 번갈아보니 그 안에 펼쳐진 것이 과연 같은 길인가 의심스러울 정도다. 고대 그리스의 어떤 철학자가 그랬다지. 우리는 같은 강물에 두 번 발을 담글 수 없다. 그렇다면 우리 역시 이렇게 말해도 무방하리라. 우리는 같은 올레를 두 번 걸을 수 없다.
풍광으로 보자면야 김진석의 올레가 훨씬 더 근사하지만 마음이 가 닿는 곳은 역시 내가 걸은 올레다. 본래 풍광이란 완벽한 타자(他者)로 자아의 밖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알프스의 그림 같은 별장보다 내가 나고 자란 고향의 오두막이 더욱 정감 있게 다가오는 것은 그 때문이다. 내가 찍은 사진들 속의 자욱한 바다안개가 오래 되지 않은 추억을 선명히 일깨운다. 조금 걷다보니 내의를 축축하게 만들었던 그 습기까지도 생생하게 되살아난다. 어떤 기억은 장쾌한 시각으로 우리에게 남는다. 하지만 시각이 오감의 전부는 아니다.
남원에서 쇠소깍에 이르는 제주올레 제5코스는 내게 촉각으로 기억된다. 머리카락에 배어있는 바다안개의 촉각, 허공의 거미줄에 송글송글 맺혀있던 습기의 느낌, 얇은 바지를 적시고 이내 내의까지 파고들던 기분 좋은 한기. 이 길은 또한 미각과 후각으로도 기억된다. 맑은 핑크빛의 모스카토 로제와 된장 베이스가 입맛을 돋우던 자리물회의 추억. 아 기억을 더듬다보니 청각도 되살아난다. 바다안개 저편으로 낮고 음울하게 깔리던 뱃고동소리, 뜻은 사상된 채 음향으로만 남아있는 누군가의 목소리, 아이들이 불어대는 비누 거품처럼 기분 좋게 터지던 웃음소리. 그 목소리와 웃음소리의 주인공이 누구였는지가 이제 분명해졌다.
어떤 길은 풍광보다는 그 길을 함께 걸었던 사람으로 기억에 남는다. 내게 있어 제주올레 제5코스는 ‘신명희와 함께 걸은 길’이다. 현재 제주국립박물관의 학예사로 일하고 있는 그녀와의 인연은 어느 짤막한 와인 칼럼에서 시작된다. 수년 전 나는 한 영화잡지에 와인을 사람에 빗댄 소설적 에세이를 연재하고 있었다. 당시 서울의 국립중앙박물관에서 근무하고 있던 신명희는 그 에세이들을 읽고 심산스쿨로 찾아와 내가 이끌고 있던 와인반에 등록했다. 학예사라는 직업에 걸맞게 몹시도 꼼꼼하고 학문적이었던 그녀는 이내 ‘와인반의 학술위원장’이라는 애칭을 얻으며 동호회원들의 사랑을 듬뿍 받았다.
그러던 그녀가 돌연 제주로 발령을 받아 서울을 떠나게 되자 와인반에 뜻하지 않은 제주여행 붐이 일었다. 그녀를 위로 혹은 격려한다는 핑계로 우루루 제주로 몰려가 며칠 동안 와인을 퍼마시게 된 것이다. 내가 소문으로만 알고 있던 제주올레의 실체와 접하게 된 것도 이 때였다. 결국 나로 하여금 제주올레를 걷게 하고 이렇게 글까지 쓰게 만든 장본인이 바로 신명희였던 셈이다. 습기를 머금은 바람이 모슬포를 가득 채우고 있던 어느 날이었다. 그녀는 제주에 정착한 다음 새로 구입한 아담한 경차를 끌고 내 숙소를 찾아왔다. 며칠째 홀로 걷고 있던 내게 올레의 동행을 자처한 것이다.
[img2]남원에서 쇠소깍까지 이르는 제주올레 제5코스를 나는 그녀와 둘이 걸었다. 와인으로 맺어진 다정한 오누이가 함께 걷는 길이었다. 제 아무리 소원했던 사람이라도 몇 시간을 함께 걸으면 마음을 열기 마련이다. 하물며 매일 같이 커뮤니티를 드나들며 서로의 안부를 묻던 다정한 오누이 사이라면 더 말해 무엇 하랴. 그녀와 무슨 말을 나누었던지는 기억에 남아 있지 않다. 허공으로 사라져버리는 말 따위야 아무러면 어떠하랴. 어떤 뜻에서 대화란 내용보다는 형식이 더욱 중요하다. 그녀와 나는 무의미하되 다정한 이야기들을 도란도란 나누며 그 길을 함께 걸었다. 행복한 소통의 길이었다.
제주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해안산책로로 꼽히는 큰엉 위 오솔길을 천천히 걸었다. 대영박물관이나 메트로폴리탄의 회랑을 걷는다 해도 이보다 더 충만한 예술적 감격을 느낄 수는 없으리라. 이런 감동의 순간에는 되도록 말을 아끼는 것이 좋다. 그저 나란히 천천히 걸으며 그 벅찬 감동을 공유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용천수 담수탕이 인상적인 신그물을 지나 야트막한 언덕 위의 정자에 이르렀을 때 그녀가 돌연 걸음을 멈췄다. 이쯤에서 한 잔 하지요. 그녀가 배낭에서 무엇을 꺼낼지는 묻지 않아도 안다. 와인이다. 그녀가 오늘 준비해온 와인은 드미 사이즈(375ml)의 모스카토 로제다.
접이식 의자를 펼치고 앉아 플라스틱 와인잔에 맑은 핑크빛의 와인을 가득 따른다. 행복은 굳이 발설할 필요도 없고 광고할 필요도 없다. 진정으로 행복한 존재는 그 자체로서 빛을 발한다. 나란히 앉아 안개 너머로 무심히 출렁이는 바다를 바라보며 와인을 홀짝거리고 있는 오누이의 모습을 상상해보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해지는 풍경이다. 산길을 걷든 올레를 걷든 상관없다. 나는 언제나 배낭 속에 와인을 챙겨 넣는다. 소주는 독하고 맥주는 무겁다. 야외에서 즐기기에는 와인이 제격이다. 다정한 사람과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천천히 걷다가 자리를 잡고 앉아 와인을 홀짝거리기에 가장 어울리는 곳이 바로 제주올레다.
위미의 동백나무 군락지 앞에서 행복한 약속을 한다. 한겨울에 동백이 활짝 피면 우리 여기 또 오자. 조배머들코지의 기암괴석 앞에서 한심한 약속을 한다. 다음에는 와인을 두 병 가지고 와서 이 앞에서도 한 잔 하자. 불현듯 허기가 느껴져 눈에 보이는 아무 식당에나 들어가려 하는 나를 그녀가 만류한다. 조금만 더 가요. 아주 맛있는 물회집이 여기서 멀지 않아요. 김진석의 사진과 내 사진 속 풍경이 유일하게 일치하는 곳이 단 하나 있다. 바로 검은모래사장으로 유명한 공천포의 한 음식점이다. 아무리 시장이 반찬이라지만 이 집의 자리물회가 꿀맛인 것은 단지 허기 때문만은 아닌 것 같다.
망장포구를 지나고 예촌망을 지난다. 제5코스의 종점인 쇠소깍이 멀지 않다. 이 길이 끝나는 것이 싫어 발걸음은 더욱 늦어진다. 이렇게 느긋하게 살아도 되는지 모르겠어요. 야근과 격무에 길들여진 직장인다운 발언이다. 이렇게 살아야 돼, 더 느리게 살아야 돼. 평생 직장생활이라곤 해본 적이 없는 천상 백수의 대답이다. 이윽고 쇠소깍에 이른다. 민물이 바닷물과 합쳐지면서 천상의 풍광을 연출해내고 있는 곳이다. 그 깊은 못 위에 도무지 가는 건지 마는 건지 판단도 안되는 테우가 한 척 뎅그라니 떠 있다. 제5코스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유유자적한 쉼표다.
[img3][제민일보] 2009년 11월 14일
행여라도 맨 위의 사진 속 남자가 나고 여자아이가 신명희일 거라고는 상상하지 마시길...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