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를 거꾸로 읽다
심산(심산스쿨 대표)
우리는 예전부터 빤한 훈계조의 이야기나 듣기 싫은 소리를 가리켜 ‘공자님 말씀’이라 불러왔다. 일종의 경멸 내지 조롱의 뜻이 내포된 표현이다. 공자의 입장에서 보자면 억울하거나 불쾌해할 수밖에 없는 처사일 터. 사실 ‘공자왈 맹자왈’하며 비웃는 사람들치고 그 모든 ‘공자님 말씀’의 원전이라할 [논어]를 제대로 읽어본 사람들이 몇이나 될까 심히 미심쩍기는 하다. 다른 사람들 핑계 댈 것도 없다. 나 자신부터 그러하다. 내가 공자라는 인물과 그의 삶 혹은 사상에 대하여 조금이라도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최근 주윤발 주연의 영화 [공자]를 보고난 다음부터이니까.
하지만 엉덩이에 뿔이 난 송아지는 무슨 짓을 해도 사고를 치기 마련이다. 그나마 있던 외양간마저 다 부수어버리기 일쑤다. 원전 [논어] 및 그에 관한 해제서들을 이것 저것 들추어보다보니 소문으로만 듣던 ‘공자님 말씀’에 손발이 다 오그라들 지경이다. 국가니 제도니 하는 거대담론들은 다 제쳐놓고 그저 한 사람의 일생에 대한 언급들만을 읽어봐도 그렇다. 그는 열다섯의 나이를 ‘지학(志學)’이라 불렀다. 학문의 뜻을 둘 나이라는 뜻이다. 책을 잠시 덮고 나의 열다섯 시절을 되돌아본다. 나는 그 나이때 학문에 뜻을 두었던가?
학문에 뜻을 두기는커녕 학교에 가는 것 자체가 싫어서 미칠 지경이었다. 이제 와 돌이켜보아도 교사로서의 자질은 눈꼽만큼도 갖추고 있지 않던 인간들에게 둘러싸여 들들 볶이며 지내야 했던 암담했던 나날들. 스무살의 나이는 ‘약관(弱冠)’이다. 관례를 치루어 성인이 되어야할 시기라는데 나에게는 택도 없는 소리다. 어설픈 첫사랑 이후로 하는 연애마다 실연으로 이어져 술독에 빠져 지냈던 시절이다. 나이 서른이면 ‘이립(而立)’이란다. 사회와 가정에서 기반을 닦을 나이다. 이쯤 되면 헛웃음이 나온다.
나이 서른의 나는 무엇을 해야 좋을지를 알 수 없었다. 아니 보다 정확하게 표현해보자면 내가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을 구분할 줄 알게 되었다. 그런데 그때까지 나는 내가 잘 할 수 없는 일에 매달려왔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덕분에 사회와 가정에 기반을 닦기는커녕 허허벌판에 서 있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오해하지 마시길. 그 허허벌판에 서 있는 느낌이 꼭 나쁘지만은 않았다. 오히려 위태로운 자유의 바람을 맞으며 일종의 해방감에 몸을 떨었다고 표현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다만 배가 고팠다. 무슨 짓을 해서 밥을 먹느냐가 아주 구체적인 고민으로 닿아왔다.
공자가 마흔의 나이를 ‘불혹(不惑)’이라 했을 때 내게는 두 갈래의 길이 남았다. 하나는 내가 얼마나 기준 미달의 인간인가를 자인하는 것이다. 나의 경우, 마흔이 되자, 세상은 온통 유혹으로 가득 차 있었다. 예쁜 여자들은 왜 그리도 많은지, 가보고 싶은 곳은 또 왜 그리도 많은지, 멋진 차와 근사한 오디오와 맛있는 와인들의 리스트는 왜 끝이 없는지. 아마도 그 모든 유혹의 대상들은 내가 마흔이 되기 훨씬 이전에도 이미 세상 어딘가에 존재하고 있었을 것이다. 다만 마흔이 되어 약간의 경제적 시간적 여유를 누리게 되자 그제서야 비로소 내 눈에 들어왔을 뿐이다.
나는 본래 심각하고 도덕적인 인간이 아니다. 무거움보다는 가벼움을 택하고 눈물보다는 웃음을 택한다. 지극히 현세적이고 육체적이며 실용적인 인간이다. 이런 류의 인간들은 굳이 자학의 길을 걷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공자의 불혹 발언’을 달리 해석하는 두번째의 길을 택했다. 아하 이 양반, 일종의 농담을 하고 있는 거야. 오죽 유혹이 많았으면 ‘유혹에 넘어가지 않아야 된다(不惑)’고 했겠어? 이런 고차원적인 유머의 반어법을 글자 그대로 해석해선 안되지. 그리하여 나는 공자를 제멋대로 해석하기 시작했다. 공자를 거꾸로 읽는 것이다.
일방통행로를 거꾸로 걷기 시작하니 모든 길이 제대로 보인다. 그래, 열다섯이면 공부에 흥미를 잃을 나이지. 스무살에 어른이 된다는 건 어불성설이야. 서른살이면 사회에서건 가정에서건 앞이 캄캄해지는 게 정상적인 경우 아니겠어? 견강부회라 해도 좋고 아전인수라 해도 상관없다. 허물없는 친구들과의 술자리에서도 잘 통하는 농담이다. 네가 사십대라면 유혹에 기꺼이 넘어가도록 해. 더 나이 들면 아무도 너를 유혹하지 않을 테니까.
그리고 올해 나는 드디어 오십이 되었다. 공자님 말씀으로는 ‘지천명(知天命)’ 곧 하늘의 뜻을 알게 되는 나이다. 하지만 농담의 독법은 이 경우에도 유효하다. 아하 아무 것도 알 수 없게 되는 나이로구나. 선악의 구분도 모호해지고 피아의 경계도 희미해지는 게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야. 누군가 내게 인생에 대하여 물어오면 차라리 조니 미첼의 노래를 들려주리라. “아이 리얼리 돈 노 라이프 앳올(I really don't know life at all).” 그래서 내멋대로 줄여서 하는 대답이 ‘돈노라이프’다.
언젠가는 육십이 될 것이다. 모든 것이 원만하여 무슨 말을 들어도 이해가 된다는 ‘이순(耳順)’이다. 이게 무슨 뜻인지 나는 이제 능히 넘겨짚을 수 있다. 육십이 되면 남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게 된다는 뜻이다. 아집과 독선에 사로잡힌 고집불통의 노인이 될지도 모른다. 요즘 표현으로 ‘수구꼴통’이다. 그렇게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겠다. 이럴 경우를 대비하여 잊지 말아야 될 금언이 있다. “나이를 먹었으면 입은 다물고 지갑을 열어라.” 멋진 표현이다. 나이를 먹었으면 젊은이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묵묵히 돈을 내라. 왜 돈을 내냐고? 젊은이들 사이에 끼어 앉아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축복이니까.
공자님 말씀이건 예수님 말씀이건 상관없다. 삼신할매 말씀이면 어떻고 모하메드 말씀이면 또 어떠랴. 텍스트는 소재일 뿐이다. 그 소재에서 어떤 주제를 도출해내느냐는 각자의 몫이다. 나이 열다섯에 학문에 뜻을 세웠다고 떠들지 말아라. 아직 어린아이일 뿐이다. 나이 마흔에 세상 일에 미혹됨이 없다고 뻥치지 말아라. 나이 오십에 하늘의 뜻을 깨우쳤다며 잘난 체 하지 말아라. 그런 인간들 입에서 나오는 소리들이야말로 ‘재수 없는 공자님 말씀’이다.
한국조폐공사 [가치바치] 2010년 6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