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레는 축제다
제주올레 13코스 용수~저지
글/심산(심산스쿨 대표)
사진/김진석(사진작가)
제주올레 제1코스가 개장된 것이 2007년 9월이니 벌써 오래 전의 일이다. 그 이후로 매코스가 개장될 때마다 크고 작은 행사들이 열렸고 언론을 통해 그 사실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개장행사라는 것 자체가 나와는 무관한 일이었다. 다른 이유는 없고 그저 사람 붐비는 곳을 싫어하는 본래의 성품 탓이다. 아니다. 어쩌면 그것은 타고난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터득된 것일지도 모른다. 시간에 얽매이지 않는 자가 굳이 붐비는 시간에 동참할 이유가 무엇이란 말인가.
내게 직업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직장은 없다. 출퇴근 시간이나 휴일도 따로 없다. 좋게 말해서 프리랜서요 적나라하게 말하자면 백수다. 그런 사람은 직장인의 동선과 시간을 피해 다니는 것이 특권이요 상책이며 예의다. 그런 연유로 나는 주말이나 공휴일에는 산에 가지 않는다. 시쳇말로 나래비로 줄을 서서 앞 사람 뒷꿈치만 바라보며 걷고 싶지는 않은 것이다. 직장인은 시간을 담보 잡혀서 월급을 받는다. 프리랜서는 시간을 제 멋대로 쓰는 대신 빈한하다. 가난하되 한가롭다는 것, 그것이야말로 백수의 본질이다.
그러므로 2009년 6월 27일 토요일에 열렸던 제주올레 제13코스의 개장행사는 내게 일종의 충격(!)이었다. 그날은 일단 우리 일행의 숫자부터 만만치 않았다. 김진석사진반의 제자들과 우연히 합류하게 된 출판기획자들, 그리고 게스트하우스 제주 사이의 스탭들까지 합쳐서 거의 열 명에 육박하는 인원이었다. 이 많은 인원들이 함께 움직이자면 버걱대겠군, 하며 내심 걱정하던 나는 개장행사가 열리는 용수포구에 도착하자 아예 기가 질려 입부터 쩍 벌리고 말았다. 맙소사, 수십 명도 아니고, 수백 명도 아니고, 적어도 천 명은 훌쩍 넘을듯한 사람들이 마치 시위하듯 그곳에 모여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놀라움과 낭패감은 오래 가지 않았다. 저항감 내지 거부감도 이내 꼬리를 감췄다. 무언가 부정적인 느낌을 가지기에는 그곳에서 분출되고 있는 에너지가 너무 밝고 유쾌했던 것이다. 전국 방방곳곳에서 몰려든 올레꾼들은 한껏 들떠 있었다. 아이를 들쳐 업고 나선 젊은 엄마와 지팡이에 의지해야만 발걸음을 뗄 수 있을 법한 할아버지의 표정들이 너무 밝았다. 식권을 나누어주고 있는 제주 토박이 마을 아낙들의 얼굴에서는 넘치는 자부심이 반짝거렸다. 그들의 기쁨과 설레임 그리고 자부심의 소용돌이 안에서 나는 문득 깨달았다. 그렇다. 제주올레는 축제다.
남들이 오지 않는 평일 낮에 저 홀로 올레를 걷는 백수는 알 길이 없다. 마을과 마을을 잇는 올레를 만들고 그 길을 처음 걷는다는 일이 가지는 축제의 의미를. 쳇바퀴 안에 갇힌 일상을 잠시 벗어 저 만치 던져 놓고 금쪽같은 휴일의 시간을 쪼개어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올레를 걷는 장삼이사(張三李四)들의 기쁨을. 쉬어갈만한 길목마다 집에서 들고 나온 식탁을 가져다 놓고 생전 처음 보는 외래인들에게 시원한 물과 맛깔난 음식을 대접할 때 마을 토박이들이 느끼는 긍지와 자부심을. 그날 내가 본 대규모의 군중 신(scene)은 제주올레라는 너른 장터에서 토박이들과 뜨내기들이 한 데 어울려 신명나게 놀아제끼는 한판의 유쾌한 축제였다.
[img2]굳이 다가가지 않고 먼발치에서 바라본 테이프 커팅 장면도 절로 웃음을 자아내게 한다. 제주올레의 서명숙 이사장은 반바지에 등산복 차림이다. 소설가 조정래의 머리 위에 얹혀진 탐험가용 모자가 근사하다. 각진 자세로 가위를 움켜쥔 특전사령부 장교의 표정이 근엄하다. 그들의 뒤로 인산인해를 이룬 채 어서 새 길이 열리기만을 학수고대하고 있는 전국 올레꾼들의 추임새와 어깨춤이 거대한 군무(群舞) 같다. 그야말로 교과서에서나 보던 ‘군관민’의 합동작전이다. 이 작전은 그러나 전쟁을 지향하지 않는다. 오직 평화와 휴식을 찬미할 뿐이다. 제주올레의 개장행사는 그래서 따뜻하고 아름다웠다.
우리 일행은 개장행사의 올레꾼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갈 때까지 용수포구의 방파제 위에 앉아 노닥거렸다. 하늘과 바다가 모두 눈부시게 파랗다. 한쪽에선 실전 사진 강의가 한창이고 다른 쪽에선 출판 일정과 관련된 닦달이 시작되는데 내 귀에는 그저 쇠귀에 경 읽기다. 인파가 조금 뜸해진다 싶을 때 배낭을 메고 일어선다. 작은 마을을 벗어나자마자 곧바로 펼쳐지는 너른 들판이 가슴을 후련하게 한다. 앞서 걷는 아가씨들의 즐거운 수다들이 흡사 새들의 재잘거림 같다.
용수포구에서 저지마을로 이어지는 13코스는 바다를 버리고 중산간으로 파고든다. 산세(山勢)는 미약한 대신 곳곳에 숨겨진 작은 밭길과 숲길들이 걷는 이를 즐겁게 한다. 용수 너른 밭길, 복원된 밭길, 특전사 숲길, 고목나무 숲길, 고사리 숲길, 하동 숲길, 터널 숲길, 과수원 잣길...제주올레가 붙여 놓은 길이름들이 소박하고도 귀여워 미소가 절로 지어진다.
오늘 개장행사의 점심 식사 장소는 낙천리 아홉굿 마을이다. 이 마을 주민들이 직접 만들었다는 크고 작은 의자들이 천 여개 펼쳐져 있어 흡사 거대한 야외미술관 같다. 그늘 아래 의자에 앉아 식권과 맞바꾼 고기국수를 먹는다. 비위가 약한 신참들은 멸치국수에 매달린다. 식당이 아니라 집에서 만든 음식이니 그 정성만으로도 배가 부르다. 그 힘으로 코스 말미의 저지오름까지 내쳐 오른다. 닥나무 울창한 저지오름 정상에서의 조망은 오늘 하루의 노고를 보상해주고도 남는다.
종착지인 저지마을회관 앞마당에서 푸짐한 부침개에 막걸리를 기울인다. 흥겨운 수다는 엉뚱한 방향으로 튀었다가 이내 예기치 못했던 결론에 도달한다. 매번 얻어먹기만 할 수는 없지, 우리도 한 턱 내자구. 누구한테? 제주올레 사무국. 본래 느려터진 백수들일수록 노는 동작은 빠르다. 곧바로 썩 괜찮은 이태리 와인숍 ‘빵과 장미’가 있는 제주시로 달려간다. 트렁크에 와인병들을 가득 채우고 돌아오는 길, 차창 너머 제주 바다에는 붉은 노을이 일렁거린다. 오늘 지는 해는 내일 다시 떠오를 것이다. 축제는 그렇게 이어진다.
[img3][제민일보] 2010년 7월 3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