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근태의 추억
아침에 눈을 떠보니 문자가 들어와 있더군요. 김근태 선배님의 부고입니다. 순간 눈시울이 펑(!)하고 젖었습니다.
김근태 선배님이 ‘민주화운동청년연합’을 만드신 것이 아마도 1983년일 것입니다. 광주학살의 주범 전두환이 대통령으로 있던 시절이지요. 그 엄청나게 폭력적인 정치상황에서 감히 ‘민주화운동청년연합’을 만들다니! 당시의 제게는 그 사건 하나만으로도 충격이었습니다. 그리고...만들자마자 물론 김근태 선배님은 계속 수배와 투옥을 반복했지요. 저 유명한 ‘이근안 고문사건’ 직후 법정에서 울부짖던 선배님이 생각납니다. 그때 나온 팜플렛이 바로 [무릎 꿂고 살기보다 서서 죽길 원한다]입니다. 그 팜플렛을 읽으면서 펑펑 울었던 기억이 납니다.
1980년대 중반, 저는 ‘자유실천문인협의회’와 ‘민주언론운동연합’ 그리고 ‘직선개헌국민운동본부’에서 일했습니다. 덕분에 김근태 선배님을 가까이에서 뵐 기회가 많았습니다. 제 기억 속의 김근태 선배님은 ‘온화하되 강인하고, 강인하되 온화한’ 사람이었습니다. 너무 온화한 성품이어서 저는 내심 “저 사람이 서울대 학생운동사의 전설, 그 김근태 맞아?”하고 의아해할 정도였습니다.
김근태 선배님에 대한 추억을 두 가지만 말씀드리겠습니다.
김근태 선배님은 1980년대 모든 운동권의 행사에 오셨습니다. 꼭 정치적인 자리가 아니라 결혼식이나 장례식 같은 자리에도 빠짐없이 오시곤 했습니다. 물론 개인 자격이 아니라 ‘민주화운동청년연합 의장’의 자격으로서였습니다. 그런데 김선배님은 축의금이나 부조금을 내실 때 언제나 5,000원을 내셨습니다. 그리고는 수줍게 방명록에 이름을 남기셨지요. 민주화운동청년연합 의장 김근태. 5,000원이면 당시에도 큰 돈이 아닙니다. 어쩌면 ‘너무 적은 돈’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분은 그렇게 했습니다. 아마도 자기 주머니에 있던 돈을 털어서 내신 거겠지요. 저는 그분이 5,000원을 내시던 그 모습을 오래도록 기억할 것입니다.
언젠가 어떤 모임의 뒷풀이 자리라고 기억합니다. 술이 몇잔씩 돌자 자연스럽게 노래가 흘러나왔습니다. 어떤 후배가 졸랐습니다. “천하의 김근태, 노래 한번 들어보자!” 김근태 선배님은 예의 그 수줍어하는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노래를 한 가락 뽑았습니다. 그 흔한 80년대의 운동가요가 아니었습니다. 너무도 엉뚱한 노래였습니다. [과거를 묻지 마세요]. 오래된 뽕짝입니다. 혹시 이 노래를 아십니까?
장벽은 무너지고 강물은 풀려
어둡고 괴로웠던 세월도 흘러
끝없는 대지 위에 꽃이 피었네
아아 꿈에도 잊지 못할 그립던 내 사랑아
한 많고 설움 많은 과거를 묻지 마세요
저는 김근태 선배님이 그 노래를 부르실 때 또 그만 눈물을 흘렸습니다. 어둡고 길었던 수배자 생활도 떠오르고, 끔찍했던 수감 생활도 떠오르고...하지만 역시 희망도 품고 있는...그런 그분의 마음이 너무도 잘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김근태 선배님의 노래 실력은 별로입니다. 중저음의 음색은 멋지지만 박자도 틀리고 음정도 틀리고...어찌 보면 ‘겨우 음치나 면한’ 그런 수준입니다. 하지만 김근태 선배님이 그날 불러주셨던 [과거를 묻지 마세요]를 저는 아마 죽을 때까지 못 잊을 겁니다. 한 위대한 민주화운동가의 전 생애가 그 노래에 오롯이 담겨 있었으니까요.
자꾸 글이 길어지려고 합니다. 눈시울이 뜨거워져...이제 그만 쓰렵니다. 선배님의 부음을 접한 오늘, 그분을 잘 모르시는 여러분께 제가 간직하고 있는 두 가지의 추억-축의금 5,000원과 [과거를 묻지 마세요]-을 나눠드리고 싶었습니다. 2011년에 우리는 ‘존경할만한 선배님’ 한 분을 잃었습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저는 그를 ‘정치인’으로 기억하지 않습니다. 저는 그를 영원히 ‘민주화운동가’로 기억할 것입니다. 언젠가 그분을 위하여 전각으로 묘비명 하나를 새길 생각입니다.
金槿泰
민주화운동가
1947-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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