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의 땅끝에 서다
제주올레 21코스 하도~종달
글/심산(심산스쿨 대표)
사진/김진석(사진작가)
누가 뭐래도 축제의 날이다. 개장행사 약속시간 훨씬 전에 도착했는데도 제주해녀박물관 앞은 이 축제에 동참하고자 전국 각지에서 모여든 사람들로 이미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다. 그 중에서도 제주올레 완성기념 대형 플래카드를 걸어놓은 곳이 유난히 시끄럽다. 웃음소리와 박수소리, 그리고 카메라 셔터 누르는 소리와 즐거운 함성소리가 끊이질 않는다. 까치발을 하고 건너다 보니 역시나 오늘 ‘축제의 여왕’ 서명숙 이사장이다.
“아니 심작가는 입도(入島)할 때 와인 한 상자 들고 와야 하는 거 아니야?”
서이사장이 내게 건넨 제일성(第一聲)이다. 애정이 담뿍 담긴 핀잔 혹은 핀잔의 탈을 쓴 반가움의 표현인 것이다. 아, 이 양반은 몇 년 전 내가 (사)제주올레의 식구들을 사이(게스트하우스)로 불러 와인파티를 열었던 일을 기억하고 있구나. 별것도 아닌 일을 기억하고 있다니 고마울 따름이다. 서이사장과 몇 마디 더 나누고 싶었지만 그녀는 너무 바빴다. 마치 서이사장과 함께 ‘인증샷’을 찍지 못하면 오늘의 축제에 온 것도 무효라는 듯 모든 사람들이 그녀를 낚아채가기 위하여 난리 북새통이었던 것이다.
축제의 시작을 알린 것은 인근 초등학교 학생들로 이루어진 어린이 풍물패다. 붉은 비단옷과 머리띠를 두르고 신명나게 북채를 두드리는 그들은 흡사 어린 화랑(花郞)들 같았다. 개장행사의 사회를 맡은 사람은 여성학자 오한숙희. 그녀의 거침없고 걸쭉한 입담이 섬나라 겨울 아침의 찬바람마저 따스하게 달구어놓는다. 그런데 제주올레와 관련된 즉흥퀴즈로 좌중을 웃기고 박수치게 하였던 그녀가 돌연 엉뚱한 제안을 한다.
“자 여러분, 오늘 완성될 제주올레를 함께 걸을 짝궁, 옆사람과 부둥켜안아 보세요!”
[img2]개장행사장의 맨 앞에 서 있던 서이사장이 순간 재빨리 좌우를 훑어보더니 포르르 달려와 내게 안긴다. 이건 그야말로 뜻하지 않은 횡재다. 오늘 축제의 여왕을 만인의 앞에서 보란듯이 껴안게 되다니 행운이요 영광이 아닐 수 없다. 가만히 있으려 해도 절로 함박웃음이 터져 나온다. 오한숙희는 제주올레 이음단, 매구간별 올레지기, 그리고 제주올레 탐사대를 모두 일일이 소개한 다음 서이사장을 행사장의 중앙으로 불러낸다. 인사말을 올리는 서이사장의 목소리에서 물기가 묻어난다. 제주올레의 마지막 테이프 커팅을 할 때에는 어쩔 수 없이 눈자위마저 붉어진다. 김진석의 카메라가 그 순간을 놓칠 리 없다.
“아이, 김작가, 이런 건 좀 찍지 말지?”
뷰파인더 안에서 서이사장이 예쁘게 눈을 흘긴다. 민망해 하는듯한 그녀의 표정과 붉어진 그녀의 눈시울이 더 없이 아름답다. 하긴 어찌 눈물 흘리지 않을 수 있으랴. 처음 그녀가 걸어서 제주도를 한 바퀴 도는 길을 내겠노라고 했을 때 그것을 귀담아 듣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너무 거창하다기 보다는 차라리 황당무계한 이야기처럼 들렸던 것이다. 그런데 그녀는 그것을 해냈다. 무려 5년이 넘는 세월 동안 자신의 모든 것을 송두리째 쏟아 부어 장장 425 Km에 이르는 제주올레를 이었고, 오늘이 그 대장정의 마무리를 짓는 날인 것이다. 어찌 감격의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을 수 있겠는가.
[img3]2012년 11월 25일은 대한민국 걷기역사의 한 획을 그은 역사적인 날이다. 이날만큼은 서로가 서로에게 잘했다 칭찬해주고, 웃고 떠들고 박수치고, 실컷 먹고 마시고 취해도 좋다. 그야말로 축제의 날인 것이다. 제주올레 21코스를 행진해가는 사람들의 모습은 장엄했다. 야트막한 별방진에 올라가 앞뒤를 돌아보니 길게 늘어선 사람들의 행렬이 시야의 한계를 벗어난다. 가족과 친구와 선후배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올레를 이어나가는 사람들의 모습에서 평화와 휴식을 그리고 행복을 느낄 수 있다.
석다원과 각시당을 지나면 줄곧 제주바다를 왼쪽으로 끼고 걷는 길이다. 저 앞에 토끼섬이 보인다. 한여름에는 하얀 문주란이 온 섬을 뒤덮어 흡사 흰토끼처럼 보인다는 섬이다. 하도해수욕장에 이르니 제주올레 자원봉사자들이 천막을 쳐놓고 따끈한 오뎅과 국물을 나누어주고 있다. 출발하면서 서로를 놓쳐버린 심산스쿨 사람들도 여기서 다시 만난다. 그들 중 몇몇은 이 차가운 겨울날씨에 맨발로 바다에 들어가 첨벙대다가 공중파 TV 카메라에 찍히는 바람에 졸지에 전국적인 스타가 됐단다. 직장과 시댁에 거짓말을 하고 제주도로 놀러온 친구들이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겠다며 행복한 하소연을 늘어놓는다.
[img4]하도에서 종달에 이르는 제주올레 21코스의 하이라이트는 단연 지미봉이다. 모든 길에는 끝이 있다. 모든 땅에는 땅끝이 있다. 전라남도 해남에 가면 땅끝마을이 있다. 우리나라 해돋이 명소들 중에서도 으뜸으로 꼽히는 곳이다. 스페인에도 땅끝마을이 있다. 바로 저 유명한 카미노 데 산티아고의 종착점인 피니스테라(Finisterre)다. 땅끝에 이르면 더 이상 나아갈 수가 없다. 그 너머에는 막막한 바다가 펼쳐져 있을 뿐이다. 그 바다를 건너지 않는 한 왔던 길로 되돌아 나와야 한다. 그렇다면 제주에도 땅끝이 있을까? 있다. 그게 바로 지미봉이다. 땅 지(地)자에 꼬리 미(尾)자, 지미봉이라는 이름 자체가 ‘땅끝에 솟은 봉우리’이라는 뜻이다.
제주올레의 기본 컨셉은 역사 속에서 가져왔다. 그 옛날 제주목사가 제주에 부임하면 제주를 한 바퀴 도는 것으로부터 임무를 시작했다. 제주를 한 바퀴 돌 때 첫발을 내디딘 곳이 시흥(始興)이다. 그래서 제주올레는 시흥초등학교에서 시작된다. 제주를 한 바퀴 돌아 마지막에 도착하는 곳이 종달(終達)이다. 그래서 제주올레는 종달바당에서 끝난다. 종달에 도착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오르는 오름이 지미봉이다. 그래서 지미봉은 제주의 땅끝이 되는 것이다. 다만, 섬의 땅끝은 육지의 땅끝과 다르다. 육지의 땅끝에 이르면 갔던 길을 되짚어 돌아와야 한다. 하지만 섬의 땅끝에서는 그럴 필요가 없다. 계속 앞으로 나아가도 된다. 그러면 제주올레 21코스가 끝나고 다시 제주올레 1코스가 시작되는 것이다.
지미봉의 해발고도는 165.8 m에 불과하다. 지미봉 위에 올라선다. 여기가 제주의 땅끝이다. 제주의 땅끝에 서서 사위를 둘러본다. 360도 거칠 것 없는 파노라마가 장쾌하게 펼쳐져 있다. 우도와 성산일출봉과 제주의 동쪽 바다가 거기에 있다. 말미오름과 알오름과 식산봉도 멀지 않다. 물론 예전에 제주올레를 하며 걸었던 곳이다. 하지만 제주의 땅끝 지미봉에서 바라보니 또 다른 모습이다. 불현듯 그 모든 길을 다시 걷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힌다. 이 길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라는 생각이 든다. 가슴이 설렌다. 그렇다. 오늘은 제주올레라는 거대한 축제가 끝난 날이 아니다. 축제는 이제부터 시작된다.
[img5][심산스쿨] 2013년 1월 7일
아 참, 위에서 두번째 사진의 작가는 김진석이 아니라 임양윤!
임양윤 선생님께 다시 한번 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