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심산 등록일: 2007-03-15 02:57:46 IP ADRESS: *.235.170.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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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g1]

이탈리아 플레이보이의 비밀병기
심산의 와인예찬(10) 베네토의 드라이 레드와인 아마로네

이탈리아 남자, 하면 나는 언제나 무라카미 하루키의 여행기 <먼 북소리>가 떠오른다. 정확한 내용은 잊었지만 대략 이런 식으로 표현되었던 것 같다. 정신없이 수다스럽고, 여자 엄청 밝히며, 겉멋내기에 목숨 건 녀석들. 이놈들은 심지어 조깅을 할 때도 혼자 묵묵히 뛰는 법이 없다. 알록달록한 원색 패션으로 잔뜩 멋을 부린 조깅복을 걸치고, 귀에다가는 커다란 이어폰을 꽂은 채 흥얼거리며, 서너 명씩 떼를 지어 왁자지껄 떠들어대며 함께 뛴다. 그들의 대화내용이야 빤하다. 축구 아니면 여자. 심지어 그들 중 한 녀석이 길섶에다가 쉬를 할 때면 모두들 고 옆에서 제자리 뛰기를 하며 끊임없이 수다를 떨어댄다. 그게 내 이미지 속의 이탈리아 남자다. 하지만 내가 처음 사귄 이탈리아 남자는 그 이미지가 전혀 달랐다. 녀석의 이름을 아마로네(Amarone)라고 해두자.

녀석과 처음 마주친 곳은 미국 캘리포니아의 요세미티 국립공원이다. 널리 알려져 있다시피 기독교인들의 성지가 예루살렘이고, 이슬람교도들의 성지가 메카라면, 암벽등반가들의 성지는 요세미티다. 요세미티에는 무엇이 있는가? 거의 수직에 가까운 단일 바위로서 하단에서 정상까지의 표고차가 1,086m에 이르는 엘 캐피탄이 있다. 둥근 공을 단칼에 반쪽으로 갈라 놓은듯한 수직 표고차 560m의 하프돔이 있다. 1,000개가 넘어 일일이 다 헤아릴 수도 없는 숱한 대암벽 루트들이 있다. 그리고 이 바위에 매달려 며칠씩을 지새우면서 온몸으로 허공에 시를 쓰기 위하여 전세계에서 모여든 미친 년놈들이 있다. 10여년 전의 나 역시 바위를 종교로 삼고 있는 광신도 집단의 일원이어서 그곳 야영장의 한 귀퉁이를 차지하고 있었다. 아마로네의 텐트는 내 텐트의 바로 뒤에 웅크리고 있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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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세미티 국립공원 안에는 참으로 다양한 수준의 숙박시설들이 들어서 있다. 부자들을 위한 오성호텔에서부터 우리 같은 거지들을 위한 맨땅의 야영장까지. 그 중에서도 우리가 또아리를 틀고 있던 제4야영장 일명 ‘써니사이드’는 한 눈에 보기에도 가관이었다. 요세미티의 거벽들이 한창 개척되던 ‘황금시대’(1950-1960년대)부터 전통적으로 클라이머들이 텐트를 치던 곳인데, 전세계에서 모여든 가난한 클라이머들이 각 나라 말로 왁자지껄 떠들어대서 그야말로 ‘국제적 히피촌’을 이루고 있는 곳이다. 낮이 되면 다들 바위에 붙어 있느라 텅 비어 있지만 밤이 되면 저마다 모닥불을 피우고 허황된 무용담과 싸구려 와인, 때로는 자기 나라를 대표하는 대마초 따위를 서로에게 권하며 이교도들의 불야성을 이룬다. 한 마디로 시스템으로부터 추방된 자들, 아니 어쩌면 시스템을 자기 밖으로 추방해버린 자들만의 은밀한 해방구라고 할 수 있다.

당시의 내게는 일행들이 많았다. 모두 다 등산학교 동문들이다. 이따금 미국에 거주하고 있는 동문들이 커다란 밴에 갈비들과 소주 궤짝을 가득 싣고 찾아오는 바람에 우리 텐트 앞은 언제나 북적거렸다. 문자 그대로 ‘LA갈비’를 바비큐 그릴에 구워대며 하염없이 소주를 들이킬 때면 내일로 예정된 등반계획 따위도 나 몰라라 내팽개치기 마련이다. 그렇게 술에 취해 잔디밭에 벌렁 나자빠지면 밤하늘을 가득 채우고 있던 별들은 금방이라도 쏟아져 내릴 것 같았다. 그런 식으로 텐트도 마다하고 노숙하며 지낸 날들이 몇 날 며칠인지 모른다. 돌이켜보면 참으로 행복했던 시절이다. 아마로네는 그러나 솔로 클라이머였다. 혈혈단신 홀로 온 그는 싸구려 통조림으로 끼니를 해결하며 우리들의 왁자지껄한 파티를 물끄러미 훔쳐볼 뿐이었다. 그 모습이 너무도 초라해보여 그를 몇 번 초청했다. 녀석은 이탈리아 남자답지 않게 조용히 고기를 몇 점 주워 먹고 커다란 시에라컵에 소주를 가득 담아서는 제 텐트로 슬며시 돌아가곤 했다.

아마로네가 우리를 감동시킨 것은 요세미티에서의 꿈결 같은 나날도 보름쯤 지나간 다음이었다. 그가 잔뜩 수줍은 얼굴로 와인을 한 병 들고 와서 우리 텐트의 문을 제쳤다. 오늘은 내가 와인 한잔씩 대접할 게요. 워낙 허물없이 지내던 터라 나는 대뜸 듣기에 따라서는 무례(!)하게 들릴 수도 있는 질문부터 던졌다. 아니 네가? 네가 무슨 돈이 있어서? 아마로네는 피식 웃었다. 그 동안 빈 캔들을 모아서 받은 돈으로 한 병 샀어요. 야영장에 나뒹구는 빈 캔들을 주워서 모았다가 레인저 사무실에 가져다 주면 약간의 돈을 준다. 한 캔당 대략 5센트 정도 되었던 걸로 기억한다. 그런데 그렇게 힘들여 모은 돈 10달러를 가지고 녀석이 우리에게 대접할 와인을 산 것이다. 그 와인의 이름이 아마로네(amarone)였다. 제 고향 발폴티첼라(Valpolticella)에서 만드는 귀한 와인이에요. 그 동안 너무 얻어먹기만 해서 제가 한잔씩 대접하려고요.

늘 우수에 젖은 표정을 한 채 과묵하기만 했던 그가 귀한 와인을 한잔씩 대접한다고 하니 야영장 전체의 클라이머들이 하나 둘씩 모여들었다. 녀석은 제 주위로 모여든 모든 클라이머들에게 그야말로 최후의 만찬에서 피를 나누듯 찔끔 찔끔 아마로네를 따라주었다. 죄송해요, 한 병 밖에 살 수가 없어서 많이는 못 드리네요. 그것은 드라이하되 진하고 그윽한 맛이었다. 더욱 그윽했던 것은 그의 라이프 스토리다. 삼년 전부터 이렇게 세상을 떠돌고 있지요. 제 첫사랑 로라가 제 곁을 떠나간 이후로는 아무 것도 손에 잡히지 않아서. 바위에 달라붙어 있을 때에만 살아 있는 것 같아요. 그때만은 아무 생각도 하지 않으니까. 모닥불은 낭만적으로 타올랐고 몇몇 여성 클라이머들은 눈시울을 붉히기도 했다. 하긴 실연의 상처로 클라이밍 범(climbing bum)이 되어 전세계 바위순례를 하고 있다는데 어떤 여자인들 가슴이 먹먹해지지 않겠는가. 녀석은 그 단 한 병의 아마로네마저 다 비우지 않았다. 4분의 1쯤 남았을 때 코르크 마개를 닫으며 이렇게 말했다. 이만큼은 남겨둘께요. 로라와 함께 마시던 와인이어서. 그녀를 추억하면서 저 혼자 조금씩 마시고 싶네요.

[img3]

그 감동적인 ‘아마로네의 밤’이 지나고 나서 며칠 후 녀석은 돌연 종적을 감추었다. 유타주로 볼더링 여행을 떠났다는 말도 있고 뉴욕 근교의 샤왕겅크스로 갔다는 소문도 있었다. 그런데 그가 사라지고 나자 여기저기서 ‘우는 여자’들이 나타났다. 자기는 아마로네와 사랑을 나누었고 앞으로 함께 바위순례를 하자고 굳게 약속했다는 여자들이다. 그 여자들의 국적도 스페인, 남아공, 유고슬라비아 등 다양하기 이를 데 없다. 그들 모두의 공통점은 단 하나, 그의 텐트로 몰래 찾아가 아마로네를 한잔씩 얻어 마셨다는 것이다. 우는 여자들을 앞에 두고 해서는 안 될 짓이지만 나는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참기가 힘들었다. 맙소사, 아마로네, 너 정말 대단한 녀석이로군? 빈 캔들을 모아서 산 그깟 와인 한 병을 가지고 이 많은 여자들을 다 홀렸단 말이야? 배가 아프게 웃어대다 보니 맞은 편 텐트 안에서도 훌쩍거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일본에서 온 여성 클라이머들의 텐트다. 이봐, 미사코, 너도 아마로네를 마시러 갔어? 독기가 오른 미사코는 공연히 내게 바락바락 소리를 지른다. 입 닥쳐, 이 망할 자식아! 너희 사내새끼들은 다 개새끼들이야!^^

이탈리아 베네토 지방의 발폴티첼라에서 만드는 아마로네는 매우 독특한 와인이다. 포도를 따서 바로 와인을 담그지 않고 몇 달씩 짚방석 위에 펼쳐놓고 그늘에서 말린다. 이 과정을 통하여 수분이 많이 증발하는 까닭에 거의 건포도처럼 쪼글쪼글해지는데 덕분에 당분의 함량이 무척 높아지게 된다. 여기까지만 보면 헝가리의 토카이, 독일의 트로켄베렌아우스레제, 프랑스의 소떼른느와 비슷하지만, 완전히 발효를 시켜 당분을 소진시킨다는 점에서 이것들과 다르다. 아마로네는 알콜도수가 높고 묵직하며 드라이한 레드와인이다. 이탈리아 와인은 아직도 여전히 품질수준이 고르지 못한데 이 아마로네만은 언제나 기대를 충족시켜준다. 과연 이탈리아의 플레이보이가 비장의 무기 삼아 장전할만한 걸작이다. 이따금씩 아마로네를 마실 때면 녀석이 생각나서 자꾸 웃음이 나온다. 헬로 아마로네, 언젠가 한국으로도 바위를 하러 오겠다더니 왜 소식이 없어? 내 이메일 주소와 전화번호도 이미 어디다가 팔아먹었나? 난 너를 만나면 꼭 묻고 싶은 게 하나 있어. 그날 밤 네가 잔뜩 무드를 잡고 눈물까지 글썽여가며 들려줬던 첫사랑 이야기 말이야. 그 로라인가 뭔가 하는 여자가 실제로 존재하기는 하는 거야?^^

[무비위크] 2007년 3월 19일

신명희

2007.03.15 08:53
*.99.82.25
항상 무비위크가 나오길 기다렸는데...여기서 미리 보니 너무 조아여~~^^

김지명

2007.03.15 10:57
*.9.134.140
ㅋㅋ .. 어쩜 그 로라 .. 아마로네의 강아지 이름일지도 ... ^^

정경화

2007.03.15 11:47
*.96.222.1
아마로네를 아직 마셔보지 못했어요~ 웬지 초코렛향 가득한 가운데 뿜어져 오르는 묵직한 알콜의 기운이 느껴지네요~
아마로네도 역시 초코렛향으로 뭇여쟈들을 유혹한뒤,, 알콜의 기운을 빌어 목적달성을 했을라나??..
선생님의 와인이야기는 언제나 짱입니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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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산

2007.03.15 13:02
*.131.158.37
경화가 아직도 아마로네를 못 마셔봤다니 의외일쎄...?
지명, 네 말이 맞을지도 몰라...^^
명희, 여기 홈피가 전세계에서 제일 빨리 [심산의 와인예찬]을 싣는 곳이야...^^

한수련

2007.03.15 14:09
*.235.170.238
난 이런 남자 좋아요. 아직 덜큰 애 같아 귀여운데.
선생님 글에서 여자들이 모두 울었다는 건 과장일듯..
아마 내색은 안해도 그 이탈리안 바람둥이를 떠올리며 피식하고 웃었을 여자도 있었을것 같아요.^^
덩달아 아마로네도 마셔보고 싶은 충동이 불끈.
셰리같은 여자랑 아마로네같은 남자가 만나면 어떨까 문득 궁금해진다는 거.
언젠가 두개를 같이 사서 교대로 마셔봐야겠다.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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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로진

2007.03.16 13:19
*.86.217.161
주전 와인을 샤도네이에서 아마로네로 바꿔야 하나?
고민일세.....
난 미사코한테 이야기 해 주고 싶어요.

"헤이! 왜 그렇게 옷에다 장식을 주렁주렁 달고 살아?
그냥 아마로네 한 잔 마시고 가~~~어서~~~~"
profile

심산

2007.03.17 10:27
*.131.158.26
수련, 셰리랑 아마로네랑 섞어 마시면 너 그냥 바로 간다....조심해라...^^
로진, 한국적 작업주를 직접 선정해 주셔야지, 웬 이탈리안 카피...?^^

백소영

2007.03.18 20:01
*.138.148.145
당분이 너무 높으면.. 일단 의심을 하고 봐야죠.. ㅋㅋㅋㅋㅋ
profile

명로진

2007.03.20 01:27
*.86.217.161
네 심샘....
샤도네이를 마시고 나서 그냥
가 버리는 여자는 신뢰하지 마라.....
한국적 작업주는
보르도와 브루곤 A.O.C.....
왜냐면 와인도 '링 반데룽'이니까....

심정욱

2007.03.31 02:06
*.55.66.48
ㅎㅎ 로마네 꽁티의 댓글보다가 담주에 끼안티 끌라시코나 한병 들고 갈까했는데요,
여기 명로진 선생님의 댓글보니, 샤도네이를 들고가야하는건지 고민이 되네요. ^^

조현옥

2007.06.04 23:22
*.55.82.214
그럼 선생님의 &&&들은 다 실제로 존재합니까? 크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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