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부]가 만든 와인
심산의 와인예찬(17) 니바움-코폴라의 로쏘
확실히 와인이 대세다. 지난 수년간 한국의 와인시장은 급속히 팽창해왔다. 서울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지방에서조차 와인스쿨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나고 있고, 이따금씩 창고대방출이니 와인대제전이니 하는 세일행사가 열릴라치면 그야말로 시위현장을 방불케 하는 인파가 모여들어 북새통을 이룬다. 유력 일간지들이 이른바 ‘기사인척 하는 와인광고’를 매일 매일 써갈기고 있으며, 각종 포털 사이트의 카페나 커뮤니티는 다양한 와인동호회들로 차고 넘친다. 이쯤 되면 와인이 정치 현상이나 경제 상황과는 무관하게 일종의 ‘시대정신’처럼 되어버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영화계조차 와인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예전에 내가 와인을 홀짝거릴 때만 해도 말들이 많았다. 저 자식은 쓰라는 시나리오는 안 쓰고 뜬금없이 웬 놈의 와인타령이래? 이를테면 일종의 비아냥거림이다. 하지만 요즘엔 사정이 달라졌다. 웬만한 제작발표회장이라면 의례히 와인들이 비치되어 있기 마련이고, 이른바 '접대‘라는 것을 할 때도 룸살롱보다는 와인바를 선호하는 경향이 생겼다. 덕분에 이즈음 들어 내가 자주 받게 되는 질문은 이런 것들이다. 나한테 어떤 와인이 들어왔는데 이게 도대체 어떤 와인이야? 투자자하고 배우한테 와인을 선물하려고 하는데 좋은 것 좀 추천해주라.
모든 해답은 질문 속에 있다. 선물 받은 와인에 대한 평가란 사실 간단한 것이다. 조금만 공부하고 책을 뒤적여 보거나 인터넷에서 검색해보면 된다. 하지만 선물로 줄 와인에 대한 선정은 쉽지 않다. 그것은 마치 와인 레스토랑에 가서 담당 소믈리에에게 좋은 와인을 추천해달라고 하는 우문(愚問)과 다를 바 없다. 좋은 와인이란 지극히 주관적인 것이다. 만약 엄청난 가격의 와인을 추천하면 어떻게 할 텐가? 게다가 제 아무리 고가의 와인이라 해도 그것을 받는 사람이 그 가치를 알지 못한다면 말짱 도루묵이다. 무엇보다도 개인의 입맛과 취향은 너무도 천차만별이어서 ‘누구에게나 훌륭한 와인’을 추천한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이런 질문에 대하여 ‘일반적인 모범답안’을 제출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질문 자체를 좀 더 좁혀보자. “영화인들에게 선물하기에 좋은 와인은 어떤 것일까?” 최근 들어 내가 가장 많이 듣는 질문이기도 하고, 내가 가장 자신 있게 답해줄 수 있는 질문이기도 하다. 답변은 간단하다. “코폴라 감독이 만든 와인!” 일단 이렇게 말문을 터놓으면 그 다음에 쏟아져 들어오는 질문들도 대개 판에 박힌 듯 빤하다. 코폴라? [대부]를 만든 바로 그 코폴라? 그 사람이 와인도 만들어? 이름만 갖다 붙인 거야 그 사람이 직접 만드는 거야? 아무리 좋은 말도 여러 번 하면 지겹다. 더 이상 앵무새처럼 똑 같은 대사들을 지껄여대는 것에 지쳐, 이 지면을 빌어, 코폴라와 그의 와인에 대하여 조금 깊숙이 들어가 보도록 하자.
[img1]미국의 영화감독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Francis Ford Coppola, 1939- )가 현재 소유하고 있는 와이너리의 이름은 니바움-코폴라(Niebaum-Coppola)이다. 이 와이너리의 원래 이름은 니바움이었는데, 미국와인사에 굵은 글씨로 아로새겨진 매우 역사적인 포도원이다. 미국의 캘리포니아가 세계사의 주무대에 중요한 변수로 등장하게 된 것은 1840년대 말의 골드러쉬(Gold Rush)를 통해서였다. 권총 한 자루를 꿰차고 금광을 찾아 이곳으로 모여든 사람들의 이야기는 이후 숱한 서부극의 단골 소재가 되었음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실제로 금을 찾은 사람들은 극소수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나머지 사람들은? 땅과 노동으로 부를 창출할 수 있는 전혀 새로운 금광을 찾아냈다. 바로 포도원을 설립하고 와인을 만드는 것이다.
19세기 중반 캘리포니아 와인의 역사를 새로 쓴 두 사람이 있다. 하나는 헝가리 귀족 출신 이민자 어고스톤 하라스티(Agoston Haraszthy)인데, 그는 유럽으로부터 165개의 포도 품종 10만주를 들여와 캘리포니아에 가장 적합한 품종을 가려내는 대실험을 감행했다. 덕분에 그는 지금도 ‘캘리포니아 와인의 아버지’라고 불리운다. 다른 하나가 바로 핀란드 선장 출신 이민자 구스타프 니바움(Gustave Niebaum)인데, 그는 1879년 나파 밸리에서도 가장 규모가 큰 잉글눅(Inglenook) 와이너리를 세우고 일찌감치 보르도 품종들을 옮겨 심었다. 현재 캘리포니아 와인을 세계 톱클래스의 와인으로 만든 것은 보르도 품종이다. 그런 뜻에서 그는 ‘캘리포니아 와인의 선구자’라고 할 수 있다.
코폴라가 니바움의 이 유서 깊은 포도원을 사들인 것은 1975년의 일이다. 위에 언급한 잉글눅 와이너리 역시 이때 사들였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될 것은 ‘1975년’이다. 1975년에 이 엄청난 규모의 와이너리를 사들였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대부2](1974)의 세계적 흥행으로 거두어들인 천문학적 숫자의 수익금을 몽땅 이 땅에 투자했다는 것을 뜻한다. 돌이켜보면 코폴라의 전성기는 30대였다. 2002년에 출시된 [대부] 개봉 30주년 기념 DVD세트의 서플먼트를 보면 그가 [대부](1972)를 찍을 당시 얼마나 ‘힘없고 불쌍한’ 청년 감독이었는지가 적나라하게 나온다. 당시 파라마운트의 프로듀서는 매회 촬영현장마다 ‘코폴라를 대체할 대기 감독’을 대동하고 나왔다. 여차하면 이 풋내기 신인 감독을 자르고 새로운 감독을 투입하겠다는 으름장이다.
하지만 [대부]가 흥행과 비평 양면에서 모두 ‘역사에 기록될만한’ 대성공을 이루자 전세는 급격히 역전되었다. 코폴라는 [컨버세이션](1974)로 자신의 예술적 재능을 당당히 온천하에 알렸고, 같은 해 개봉된 [대부2]에서는 직접 제작까지 떠맡음으로써 엄청난 부와 명성을 한 손에 거머쥐었다. 그가 캘리포니아 최대의 와이너리 니바움을 사들여 그 이름 자체를 ‘니바움-코폴라’로 바꾸었다는 것은 당시의 그가 만끽하고 있었던 엄청난 자신감의 표현이다. 이 와이너리는 이후 단 한번, 최대의 재정적 위기를 맞는다. 마치 밑 빠진 독에 물 붓는 격으로 끝없이 쏟아져 들어가는 영화제작비 때문에 헐값에 매각될 위기를 맞게 된 것이다. 바로 [지옥의 묵시록](1979)의 제작과정에서였는데, 이 영화의 메이킹 필름인 [회상의 묵시록](그의 아내 엘리노어 코폴라가 연출하였다)을 보면 당시의 끔찍한 제작 상황 때문에 웃을 수도 없고 울 수도 없는 ‘지옥체험’을 생생히 맛볼 수 있다. 하지만 코폴라는 끝내 이 작품으로 칸느를 제패하고 흥행에도 성공함으로써 자신의 와이너리를 온전히 지켜낸다.
[img2]영화인들에게 코폴라가 만든 와인을 선물하며 이런 이야기를 해주면 그들은 한결같이 새삼스럽게 라벨를 쓰다듬으며 감동 어린 표정을 짓는다. 와인이란 그런 술이다. 모든 와인에는 나름대로의 ‘스토리’가 있다. 게다가 [대부]가 어디 범상한 영화인가? 대부분의 영화전문가들이 꼽는 역대 최고의 작품 리스트에서 항상 1,2위를 다투는 걸작이자 명품이다. 그런데 시나리오작가이자 영화감독이자 영화제작자인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가 [대부] 시리즈로 부와 명예를 한손에 거머쥐고 그 수익금으로 사들인 와이너리에서 만든 와인이 바로 이거라고 하면 더 이상의 설명은 필요 없다. 가격이 얼마이든 품종이 무엇이든 더 이상 알 바 아니다. 간단히 말해서 [대부]가 만든 와인이다. 영화인에게 선물하기에 이보다 더 좋은 와인이 어디 있겠는가?
니바움-코폴라에서는 다양한 레벨의 와인들을 생산한다. 루비콘(Rubicon) 시리즈도 있고 다이아몬드(Diamond) 시리즈도 있으며 에디지오네 펜니노(Edizione Pennino) 시리즈라는 것도 있다. 하지만 영화인에게 있어서 가장 멋진 라벨은 이 와이너리에서 만드는 최저가 와인인 로쏘(Rosso)이다. 로쏘 뒤에는 코폴라가 직접 자신의 소회를 적어놓고 친필 싸인을 남겼다. 그는 말한다. “어린 시절 대가족이 한 테이블에 둘러 앉아 식사 때마다 마시던 테이블 와인의 맛을 잊지 못한다.” 코폴라는 로쏘를 위한 자신만의 블렌딩을 개발해냈다. 진판델 47%, 카베르네 소비뇽 32%, 시라 21%이다(이 블렌딩 비율은 매년 바뀐다). 무엇보다도 멋진 것은 로쏘의 라벨이다. 라벨의 위에는 “프랜시스 코폴라 프리젠츠(Francis Coppola Presents)"라고 써 있고 오래된 극장의 붉은 비로도 천이 펼쳐지며 스크린이 나타나는데, 그 스크린을 가득 채우고 있는 것은 니바움-코폴라 와이너리의 광활한 포도밭이다. 마치 관객 모두에게 와인이라는 멋진 영화를 보여 주려는듯 하다. 이제 칠순을 바라보는 코폴라와 그의 와이너리에 축복 있으라!
일러스트 이은
[무비위크] 2007년 6월 2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