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심산 등록일: 2007-10-04 17:50:22 IP ADRESS: *.201.1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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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g1]

히말라야의 디오니소스 축제
심산의 와인예찬(24) 남체의 모든 와인들(하)

삶은 본래 불행한 것이다. 히말라야에서의 삶은 더욱 그러하다. 죽음을 위로하러 히말라야에 오르는 삶에 대해서는 더 말할 나위가 없다. 하지만 키쓰는 키쓰이고 한숨은 한숨이다. 마찬가지로 학교는 학교고 등반은 등반이다. 밤이면 학교가 열리지만 새벽빛이 희뿌윰하게 세상을 밝힐 때 즈음이면 어김없이 등반이 계속된다. 그런데 그 등반이라는 것이 영 마음 먹은 대로 되어주질 않는다. 학교 때문이 아니다. 그 죽일 놈의 고산병(!)이 우리의 목젖을 움켜쥐고 발목을 낚아채는 것이다.

고소적응훈련의 최종 목적지는 임자체(6189m)였다. 서양인들이 아일랜드 피크라고도 부르는 곳이다. 하지만 임자체 베이스캠프(5200m)에 도착했을 즈음 대원들의 컨디션을 바닥을 치고 있었다. 온몸이 젖은 솜뭉치처럼 무거웠고, 머리는 깨어질듯 아팠으며, 단순히 숨을 들이쉬고 내쉬는 것마저도 힘에 겨워 도저히 꼼지락거릴 엄두조차도 내기 힘들었던 것이다. 원정대장의 불호령이 떨어진 것은 당연하다. “그 따위 체력과 정신력을 가지고 에베레스트 정상에 오르겠다고? 거기서 애들 시신을 수습해서 내려오겠다고? 다 필요 없어, 이 자식들아! 나 혼자라도 올라갈 테니까 너네들은 뻗어있든지 말든지 맘대로 해!”

결국 임자체 정상까지 오른 것은 원정대장을 포함해서 네 사람뿐이었다. 가장 젊어 활기에 넘쳐야 했던 막내들은 일찌감치 고산병으로 뻗은 지 오래였고, 화려한 등반 경력으로 보아 선두에 섰어야 마땅했던 장비 담당과 식량 담당 역시 임자체의 초입에서 피눈물을 흘리며 돌아서야만 했다. 히말라야 전문기자로서 수 차례에 걸쳐 원정에 참여했던 베테랑급 취재진은 아예 베이스캠프까지 올라오지도 못했다. 원정대의 사기가 바닥에 떨어진 것은 당연한 결과다. 대원들은 모두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죄송한 마음에 서로 눈을 맞추지 않았다. 상황이 이 지경에 이르니 학교가 열릴 리도 만무하다.

고산병의 유일한 해결책은 서둘러 고도를 낮추는 것뿐이다. 우리는 정상 등정조를 뒤에 남겨놓은 채 서둘러 남체로 내려왔다. 남체에 정해 놓은 우리의 숙소는 당근 쿰부히말 로지(Kumbu Himal Lodge). 1975년 안나푸르나 남벽 원정대의 사다(Sarar)로 명성을 떨쳤던 파쌍 카미가 세운 집인데 ‘남체의 터줏대감’이라고 불리울 만큼 오래된 역사와 전설을 간직하고 있는 곳이다. 파쌍 카미가 세상을 떠난 이후에는 그의 딸이 대를 이어 경영해오고 있다. 그녀는 파김치처럼 축 늘어진채 죽을 상을 짓고 들어서는 우리를 보자 더 이상 아무 것도 묻지 않고 따뜻한 밀크티부터 내왔다. 우리의 고통이 그녀에겐 일상이었던 것이다.

반나절의 시간이 더 흐른 다음에야 원정대원 모두가 로지에 집합했다. 원정대장을 마주 볼 낯이 없었던 대원들은 모두 대역죄인들처럼 고개를 푹 수그린채 아무런 말도 없다. 정상을 딛고 내려온 대원들의 어깨에서는 여전히 김이 모락모락 솟아오른다. 그들 역시 이따금 땀이 식을 때면 섬찟한 추위가 느껴져 저도 모르게 부르르 몸서리를 칠뿐 달리 무어라 할 말도 없다. 열흘 넘는 기간 동안 산간학교(?)를 열어온 교장이 한 옥타브 높힌 목소리로 설레발을 쳐야될 때는 바로 이 순간이다. “자, 자, 다들 왜 이래? 죽으러 온 사람들처럼? 오늘 저녁식사는 내가 쏜다! 밥만 쏘는 게 아니라 와인도 무제한 쏜다! 괜찮지요 대장님?” 원정대장이 잠시 마뜩찮은 표정을 지어보이더니 이내 못이기는 척 고개를 짧게 끄덕인다.

남체의 로지에 근사한 와인잔 따위가 있을 리 없다. 투박한 물잔에 싸구려 와인을 가득 채우고 나자 원정대장의 축배 제의가 이어진다. “어쨌든 제군들 모두 애써준 덕에 네팔에서의 일정은 무사히 끝났다! 그 과정에서 서로 실망도 하고 상처도 많이 받았던 걸로 안다! 하지만 오늘은 마시자! 그리고 잊어버리자! 우리에겐 가야할 길이 너무도 멀다! 자, 오늘만큼은 긴장을 풀고, 다 함께 취해보자, 건배!” 저녁 식사는 두툼한 야크 스테이크였고, 안주는 인절미처럼 구운 야크치즈였다. 식사를 하는 동안 모두들 두어 잔 씩의 와인을 반주 삼아 마셨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분위기는 침울한 편이었다. 하지만 절망 속에서도 기쁨을 찾아내고 불행 속에서도 웃음을 터뜨리게 만드는 것이 바로 와인이다.

제일 먼저 취한 것은 막내였다. “형님들, 정말 죄송합니다! 제가 제일 빠릿빠릿 움직였어야 되는데...몸이 말을 안 들어서...저도 정말 미치겠어요.” 눈물이 그렁그렁해진 막내의 잔에 와인이 콸콸 따라졌다. ABC 매니저는 재작년 이곳에서 함께 김치를 담그던 녀석이 생각난다며 소울음 소리를 냈다. 그의 잔에도 검붉은 와인이 가득 따라졌다. 어디선가 갑자기 배를 잡는 웃음소리가 터져나왔다. 멀찌감치서 건네다 보니 원정대장이 언제 화를 냈냐는듯 탁자를 쳐가며 박장대소 중이다. 원정대장과 등반대장이 마치 맥주잔 부딪히듯 와인잔을 부딪친다. 그들이 부딪친 잔 위로 핏방울 같은 와인들이 포말처럼 부서진다. 여기서 웃음이 터지고 저기서 울음이 터진다. 여기서 우렁찬 산노래가 울려퍼지고 저기서 애달픈 뽕짝이 흘러나온다. 바야흐로 디오니소스 축제가 시작된 것이다.

[img2]

축제란 무엇인가? 일상의 탈출이다. 권위의 전복이고, 위계질서의 폐기처분이며, 마음에 맺혔던 한과 옹아리를 풀고 미친듯이 웃고 울며 한바탕 노는 것이다. 고대 그리스 사람들은 와인에 대취하며 디오니소스 축제를 즐겼다. 그날 히말라야의 산간도시 남체의 한 로지에 우리가 했던 짓이 바로 그것이다. 공포와 중압감과 책임감으로부터 벗어나 미친듯이 소리지르기! 상급자에게 대들고 하급자에게 얻어맞으며 서로 부둥켜 안고 웃어젖히기! 술에 취한 막내가 BC 매니저에게 삿대질을 하고, 졸지에 반말을 들은 등반대장이 어이가 없어 꺽꺽 웃다가 와인을 벌컥 벌컥 들이킨다. 자금과 장비를 몽땅 잃은 성적불량 학생들은 교장이 트릭을 썼다고 억지를 부리며 주머니에 든 달러들을 강탈하려 든다. 모처럼 모든 것으로부터 해방된 대원들이 서로의 얼굴에 붉은 와인을 뿌리며 어린아이처럼 킬킬댄다.

분위기가 잔뜩 무르익을 즈음 로지의 여주인이 난감한 표정으로 나를 찾는다. 이제 더 이상 와인이 없어요. 저희 집에 있는 와인들을 다 마셔 버렸어요. 나는 주머니를 뒤져 달러 뭉치를 그녀에게 내밀며 큰 소리로 외친다. “이 집에만 와인이 있는 거 아니잖아! 옆집 앞집 뒷집에 있는 와인들 다 털어 와! 오늘 우리가 남체의 모든 와인들을 다 마셔버릴 거야!” 정말 그랬다. 우리는 그날 밤 남체의 모든 와인들을 다 마셔버렸다. 비싼 와인도 아니다. 이름 있는 와인도 아니다. 프랑스의 뱅 드 따블(Vin de Table), 이탈리아의 비노 다 타볼라(Vino da Tavola), 스페인의 비노 데 메사(Vinos de Mesa), 포르투갈의 비뉴스 드 메자(Vinhos de Mesa), 독일의 타펠바인(Tafelwein).

그 싸구려 와인들이 어떤 경로를 통해 남체의 로지까지 흘러들어 왔는지 나는 모른다. 별로 알고 싶지도 않다. 먼지가 뽀얗게 앉은 병도 있었고, 코르크가 이미 썩어버린 병도 있었다. 상관없다. 고작해야 1유로도 안할 게 뻔한 와인을 10달러씩이나 달라는 파렴치한 로지 주인도 있었다. 두 말 않고 줬다. 우리 원정대가 집단적으로 와인에 대취하여 서로를 부둥켜 안고 울고 웃었다는 오직 그 한 가지 사실만이 중요하다. 후배들을 집단 얼차려 시키려 끌고 나간 대학 산악부 선배는 결국 그들을 끌어안고 울었다. 서로를 소 닭 보듯 하던 대원들끼리 그 동안 덧쌓인 오해를 풀고 배가 아프도록 웃어젖혔다. 어떤 술 취한 녀석이 로지 방문을 밖에서 걸어 잠그는 바람에 용변이 급해진 대원이 등산용 나이프로 벽을 뚫고 나오는 코믹 대활극도 벌어졌다.

어쩌면 남체의 밤을 뜨겁게 달궜던 그날의 디오니소스 축제는 당시의 우리에게 꼭 필요한 통과의례 같은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지금도 원정대원들끼리 만나면 그날을 이야기하며 웃음꽃을 피운다. 그만큼 우리에게는 행복했던 추억이다. 물론 삶은 본래 불행한 것이다. 하지만 와인이 있어 그 삶을 견딜만한 것으로 만든다. 이따금씩 사람들은 내게 묻는다. 가장 유쾌하게 와인을 마셨던 날이 언제냐고. 당신이 마셨던 가장 근사했던 와인은 어떤 것이냐고. 나는 피식 웃으며 대답한다. 남체의 모든 와인들을 다 마셔버리던 날, 먼지가 뽀얗게 쌓여있던 그 이름 없는 와인들이었다고.

일러스트 이은

[무비위크] 2007년 10월 8일

한수련

2007.10.04 17:55
*.235.169.165
와...............................................
profile

심산

2007.10.04 18:03
*.201.16.7
수련, 그 '와..............'라는 반응의 의미는 대체 뭐야?

김희자

2007.10.04 18:21
*.134.45.100
좋다는 거지요...와................................................

박선주

2007.10.04 18:33
*.91.99.212
와~~~~~~~~~~~~~~~~~~~~~~~~~~~
profile

심산

2007.10.04 18:35
*.201.16.7
야 이 싱거운 년들아 그만하지 못해...?!!!

최상

2007.10.04 20:53
*.232.196.218
와........................................................................(뒷북입니당^^;)
profile

박민호

2007.10.04 22:28
*.121.142.146
와..........................................................................(인반 수업 들은 사람 전원이 같은 댓글 달꺼 같다는)ㅋ

조현옥

2007.10.05 01:25
*.62.89.4
생활의 허용치와 술의 허용치가 달라서, 때로는 술에 푸욱 담궈진 축제가 필요한가봐요...^^
'히말라야의 디오니소스 축제'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미소가 떠올라요.^^

정경화

2007.10.05 10:37
*.96.222.1
와~~~~~~~~~~~~~~~~~~~~인이라는 놈은 정말이지... 사람을 깜짝깜짝 놀래킵니다~
우리를 잡고 마구 흔들어요.. 된쟝~ ^^

조인란

2007.10.05 11:10
*.115.227.16
절망 속에서도 기쁨을 찾아내고 불행 속에서도 웃음을 터트리게 만든다...?
나 지금 와인 필요해~~!

윤혜자

2007.10.05 14:26
*.217.128.144
남자의 울음.....

강상균

2007.10.05 18:50
*.100.102.70
남체의 와인... 여체의...
profile

명로진

2007.10.05 21:39
*.86.217.161
와.............................................................................................
profile

심산

2007.10.05 23:19
*.241.45.230
댓글에 '와~~~~~~'라고 단 모든 년놈들, 아가리를 쫙 찢어서 와인을 콸콸 부어주리라!!!!ㅋㅋㅋ

박선주

2007.10.05 23:54
*.32.46.114
어머나 세상에.... ^^

조현옥

2007.10.06 03:13
*.62.89.4
와~~~~~~~~~~~~~~~~~~~~~~~~~~~~~~~~~~~~~~~~~~~~~~~~~~~~~~~
휴... 이정도면 되겠지!

(로진쌤과 몇명, 뒤에 부호가 틀려서 아웃!)
profile

명로진

2007.10.06 17:05
*.129.236.232
나는 와~~~~~ 아니고 와......임.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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