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심산 등록일: 2008-05-20 02:41:50 IP ADRESS: *.131.15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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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g1]

럭셔리 와인의 대명사


심산의 와인예찬(32) [오션스 13](스티븐 소더버그, 2007)의 샤토 뒤켐 1973

 

영화사상 가장 근사한 데뷔작을 꼽으라면 아무래도 오손 웰즈의 [시민 케인](1941)과 스티븐 소더버그의 [섹스, 거짓말, 그리고 비디오테이프](1989)를 꼽아야 할 것 같다. 이 놀라운 작품들의 시나리오를 쓰고 직접 연출하여 세상에 선보였을 때의 그들 나이가 고작해야 스물 여섯이었다. 하지만 조숙한 천재들의 삶이 흔히 그러하듯 그 이후의 영화 인생은 그다지 순탄치 못했다. 두 번째 작품 [카프카](1991)가 비평과 흥행에서 모두 참패했을 때만 해도 스티븐 소더버그는 그렇게 스러져가는가 보다 했다.

 

하지만 그는 얄미울만큼 현명하게 자신의 필모그래피를 조정해나갔다. [에린 브로코비치](2000)로 할리우드의 환심을 사더니, [트래픽](2000)에서는 다시 작가주의적 경향을 슬쩍 드러내 심기를 불편케 한 다음, ‘오션스 시리즈’로 떼돈(!)을 벌어다 준 것이다. 사실 오션스 시리즈는 그 자체로서 하나의 복잡한 문화 현상이다. 나름대로 진보적 성향을 가지고 있는 할리우드의 스타 감독과 배우들이 자기들끼리 의기투합하여 가장 자본주의적인 영화를 만들어내며 낄낄대고 있는 형국이라고나 할까?

 

[오션스 11](2001)에서 시작하여 [오션스 12](2004)를 거쳐 [오션스 13](2007)에 이르른 이 시리즈의 매력은 무엇보다도 ‘배우를 보는 즐거움’이다. 이 유쾌한 범죄집단의 좌장 격인 대니 오션 역의 조지 클루니, 그의 둘도 없는 친구 러스티 라이언 역의 브래드 피트, 어딘지 어눌해 보이는 소심한 성격의 소매치기 라이너스 캐드웰 역의 맷 데이먼 등이 이 시리즈의 간판 스타들이다.

 

[오션스 13]을 통하여 이 시리즈에 데뷔(?)한 게스트 스타가 알 파치노와 엘렌 바킨이다. 알 파치노에 대해서야 더 이상의 부연 설명이 사족일 터이다. 그가 여지껏 구축해온 근사한 이미지들을 깔아뭉개며 마구 망가져 가는 모습을 보는 것도 이 영화가 선사하는 특별한 즐거움들 중의 하나이다. 나로서는 엘렌 바킨의 등장이 가장 반가웠다. 하지만 현재의 관객들에게는 ‘잊혀진’ 혹은 ‘모르는’ 여배우처럼 취급되었기 때문인지 극장 안의 반응은 영 신통치 않았다. [시에스타](1987)와 [조니 핸섬](1989) 등의 작품으로 한때 전세계 남성팬들의 시선을 집중시켰던 섹시 스타였다는 사실이 무색할 지경이었다.

 

알 파치노는 카지노 업계의 황제로서 오션 일당의 공적 1호로 지목된 윌리 뱅크 역을 맡았고, 엘렌 바킨은 그의 비서이자 오른팔인 애비게일 스폰더 역을 맡았다. 몰래 카메라와 원격조정 주사위, 그리고 지진 발생용 굴착기까지 동원하여 중무장한 오션 일당에게 이제 단 하나 남아있는 관문은 바로 이 애비게일이 지키고 있는 호텔 옥상의 펜트하우스이다. 어딘지 모르게 헤퍼 보이는 그녀(이것이 바로 엘렌 바킨의 매력이다)에게 적절한 전술은 두 말할 것도 없이 미남계이다. 그렇다면 오션 일당 최고의 미남은 누구일까?

[img2]

 

미남계 전술이 입에 오르자 일당들은 하나 같이 미리 약속이나 한 듯 러스티를 돌아다본다. 하지만 정작 강한 의욕을 보이며 앞으로 나선 것은 라이너스이다. 게다가 그가 내세우는 미남계의 전술이라는 것도 황당하기 그지없다. “나는 저런 종류의 여자들을 어떻게 다루는지 아주 잘 알아. 저런 여자는 매부리코한테 뻑 가지.” 맷 데이먼이 이런 시답잖은 대사를 읊조릴 때 그를 돌아보는 오션 일당의 저 맥 빠진 표정이라니! 이런 것이 바로 오션스 시리즈 특유의 해괴한 유머 감각이다. 하지만 라이너스의 이 말도 안되는 미남계는 직빵의 효력을 발휘한다. 천하의 애비게일이 그의 매부리코 앞에서 흐물흐물 녹아나는 것이다.

 

라이너스가 느끼한 눈빛으로 애비게일을 훑으며 묻는다. “펜트하우스에는 뭐가 있어?” 그가 노리는 것은 물론 그곳에 숨겨져 있는 다이아몬드이다. 하지만 애비게일은 배시시 웃으며 엉뚱한 대답을 한다. “네가 꿈꾸는 모든 것, 가령...샤토 뒤켐?” 이 대목에서 나는 하마터면 환호성을 지를 뻔 했다. 와우, 샤토 뒤켐(Chateau d‘Yquem)이라고? 과연 럭셔리함의 극한이로군! 준비된 사기꾼의 대사는 물 흐르듯이 이어져나와야 한다. 라이너스는 짐짓 감탄했다는듯한 눈빛으로 애비게일을 유혹하며 멋진 대사로 되받아친다. “설마...1973년 빈티지도 있는 건 아니겠지?”

 

오션스 시리즈는 명품들의 전시장으로도 유명하다. 무엇보다도 이미 ‘명품’의 반열에 오른 배우들이 대거 등장할 뿐 아니라 그들이 영화 속에서 보여주는 시계, 양복, 핸드백, 자동차 등이 모두 당대 최고의 명품들인 것이다. [오션스 13]에서 명품으로 승격(!)한 핸드폰이 삼성 핸드폰이다. 알 파치노가 “쌈쏭! 쌈쏭 쎌폰을 구해오란 말이야!”하며 노래를 부르는 걸 보면 삼성의 로비와 협찬이 엥간했나 보다. 그런 영화에서 일반인들이 꿈꾸기 힘든 그 무엇, 가장 럭셔리하고 에로틱한 상징으로 선정된 그 무엇이 바로 샤토 뒤켐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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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보르도의 소떼른 지방에 있는 포도밭은 새벽의 이슬과 한낮의 햇볕 사이에서 축축해졌다가 바짝 말랐다가 하는 과정을 한 없이 되풀이한다. 이 과정에서 싹터서 포도 껍질에 기생하는 곰팡이가 보트리티스 시네리아(Botrytis Ciinerea)이다. 그 덕분에 과피가 수축되고 수분이 증발된 포도송이들만을 선별 수확하여 만든 명품 와인이 바로 샤토 뒤켐이다. 샛노란 황금색의 빛깔과 그윽한 단맛, 그리고 톡 쏘는 벌꿀향의 피니쉬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그런데 그런 샤토 뒤켐 중에서도 그레이트 빈티지로 손꼽히는 1973년산이라니! 과연 애비게일이 ‘멋진 매부리코의 미남’ 라이너스를 유혹할 때 내놓을만한 와인이다. 아마도 나 같았으면 그 유혹에 빠져 미션이고 나발이고 다 잊어버리고 마지막 한 방울까지 따라 마셨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라이너스는 나 같이 넋 빠진 한량 혹은 와인 폐인이 아니다. 그는 한껏 달아오른 애비게일의 몸을 애무하고 샤토 뒤켐을 홀짝대는 와중에도 그녀 몰래 자신만의 미션을 완성한다. 바로 펜트하우스에 부착(!)되어 있는 다이아몬드 금고 아래에 폭약을 설치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제 막 애비게일이 라이너스의 바지 허리띠를 풀려는 순간, 오션 일당이 파견한 엉터리 FBI 요원이 들이닥친다. 결국 애비게일은 원하던 것(?)을 얻지 못하고, 오션 일당만이 원하던 모든 것을 얻는다. 금고 자체를 아예 헬리콥터로 떼어간 것이다. 하지만 관객인 나는 엉뚱한 데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다. 두 사람이 마시다 만 샤토 뒤켐 1973은 도대체 어떻게 되었을까?

 

[중앙SUNDAY] 2008년 5월 1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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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로진

2008.05.20 11:37
*.86.217.161
ㅋㅋㅋ 마시다 만 샤또 뒤켐이라.
종결이 예술입니다.

김희자

2008.05.20 14:03
*.134.45.43
마시다만 뒤켐을 맷데이먼이 프로젝트를 마치고 마시는 설정을 에필로그 컷으로 보여줬다면 넘 작위적이었을까? 크크크
profile

심산

2008.05.20 15:38
*.131.158.25
비록 뒤켐 1973은 아니지만
위의 사진에 찍힌 뒤켐 1990은 마셔봤다는...
아아 아직도 그 날의 향기가 혀 끝에 맴도는 것 같다는...^^

정경화

2008.05.21 17:22
*.96.222.1
마시다만 샤또 뒤켐1973은.....

스텝들이 마시지 않앗을까요?? ㅋㅋㅋ
쩝... 꼴깍~..

심정욱

2008.05.25 17:35
*.62.158.173
훗 즐감했습니다.
어떤 향기, 맛일지 무척이나 궁금하다는....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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