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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패 경찰에게 바치는 뇌물
심산의 와인예찬(33) [아메리칸 갱스터](리들리 스코트, 2007)의 크리스탈 로제
어떤 영화는 개봉도 하기 전에 사람을 흥분시킨다. 나의 경우는 이를테면 리들리 스코트의 [아메리칸 갱스터]가 그런 영화였다. 왜냐고? 리들리 스코트가 연출한 영화니까! 평론가들 사이에서 그에 대한 찬반양론이 무성하다는 사실 정도야 나도 어깨 너머로 들은 바 있다. 하지만 평론가는 평론가일 뿐이다. 나는 관객이다. 나에게 리들리 스코트란 ‘그 이름 하나만으로도 주저 없이 티켓을 사게 만드는’ 몇 안되는 감독들 중의 한 명이다. 나는 브라이언 드 팔마와 더불어 그를 가장 스타일리쉬한 현대 상업영화 감독이라고 생각한다.
게다가 이 영화의 시나리오작가는 스티븐 자일리언이었다. 일반 관객들에게 시나리오작가의 이름 따위가 귀에 들어올 리 없다. 하지만 내게는 그들이 중요하다. 스티븐 자일리언의 작품 세계에 대해서 중언부언하는 것은 이 지면과 맞지 않는다. 그냥 그의 필모그래피를 몇 개 읊어보자. [어웨이크닝](1990), [쉰들러 리스트](1993), [한니발](2001), [갱스 오브 뉴욕](2002). 이 정도면 충분하지 않은가?
스티븐 자일리언이 시나리오를 썼고, 리들리 스코트가 연출을 맡았단다. 게다가 덴젤 워싱턴과 러셀 크로가 양대 주연을 맡았는데, 장르는 갱스터 누아르란다. 이 정도면 충분하다. 더 이상의 정보는 영화에 몰입하는데 방해가 될 뿐이다. 영화가 개봉되자 나는 극장으로 달려갔다. 실제로 보고 난 다음의 느낌은? 이게 좀 복잡하다. 영화가 훌륭하다거나 후졌다는 뜻이 아니다. [아메리칸 캥스터]는 매우 텍스트가 두꺼운 작품이다. 마약문제와 인종문제가 뒤섞여 있고, 선악의 구분이 모호한 캐릭터들이 서로 격돌하는데, 심지어 그들 사이에 야릇한 우정 혹은 공생관계가 싹트기도 한다. [대부](1972)의 냄새도 나고 [스카페이스](1983)의 냄새도 나고 [히트](1995)의 냄새도 나는데, 그 어떤 것과도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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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랭크 루카스(덴젤 워싱턴)는 새롭게 급부상한 뉴욕 마약조직의 보스이다. 그는 냉정한 판단과 과감한 행동, 그리고 거의 청교도적인 생활로 특징지워진다. 다루는 품목이 마약이어서 문제가 될 뿐이지 ‘가장 모범적인 비즈니스맨’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다. 리치 로버츠(러셀 크로)는 뉴욕경찰의 마약계 형사이다. 이혼 경력에 방탕한 생활을 일삼고 있는 망나니인데 직업윤리만은 너무하다 싶을 만큼 투철하다. 이른바 조직 내에서 왕따 당하기에 딱 알맞는 또라이인 것이다. [아메리칸 갱스터]는 표면적으로는 이 두 캐릭터의 격돌을 다루면서 1960년대 말부터 1970년대 중반에 이르기까지의 미국 사회를 낱낱이 해부한다. 이 작품이 던져주는 철학적 정치적 실존적 질문들이 너무 버거워 영화를 보고 나면 온몸이 물 젖은 솜처럼 축 쳐질 지경이다.
이 영화에서 막강한 파워를 행사하는 인물은 부패경찰 트루포 형사(조쉬 브롤린)이다. 트루포 같은 인물이야말로 현실 세계의 강자다. 그는 마약 판매를 눈 감아주는 대신 상납을 받고, 그들로부터 마약을 넘겨받아 직접 장사를 하기고 하며, 이런 커넥션을 파고드는 리치 같은 형사에게 노골적인 협박과 폭력을 일삼는다. 일찍이 LA 출신의 범죄소설가인 제임스 엘로이가 갈파해낸 그대로 “경찰 없이는 마약도 없고, 가장 커다란 범죄조직은 경찰 그 자체”인 것이다. [아메리칸 갱스터]는 결국 마약조직 보스인 프랭크와 또라이 형사 리치가 결탁(?)하여 트루포 유형의 부패경찰들을 척결해나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갱스터 누아르라는 장르의 법칙에 비추어 보자면 참으로 해괴한 결말이다.
이 영화 속에서 와인은 그다지 중요한 키워드가 아니다. 그저 스쳐 지나가는듯한 대사로 얼핏 나오는데 화면마저 바삐 움직여 제대로 인식하기가 어렵다. 하지만 그 한 장면이 뉴욕 마약계 부패형사들의 위상(?)을 제대로 보여준다. 영화 속의 마약조직원들은 모두가 트루포 형사에게 상납을 하고 비위를 맞추는데 혼신의 힘을 쏟는다. 그들 중의 하나가 근사하게 포장된 나무상자를 하나 내민다. 혹시나 마약 덩어리인가 싶었지만 그게 아니다. “저건 도대체 뭐야?” 멀찌감치서 그 모습을 바라보던 미행자가 자문한다. 트루포 형사는 마치 시큰둥한 일상사라도 된다는듯 시니컬하게 내뱉는다. “크리스탈 로제겠지 뭐.”
순간 내 입에서는 시새움 섞인 욕지거리가 터져 나왔다. 염병할, 거 NYPD 부패경찰 할만 하네, 평소에 늘 크리스탈 로제를 상납받는다 이거지? 크리스탈 로제(Cristal Rose)는 어떤 와인인가? 루이 로데레(Louis Roederer)사에서 만드는 샴페인이 루이 로데레이고, 그 중에서도 최고의 품질을 자랑하는 퀴베 스페시알(Cuvee Speciale)이 크리스탈인데, 크리스탈 로제는 그 중에서도 로제로 된 샴페인이다. 본래 로제 와인이란 레드 와인과 화이트 와인의 ‘어중간한 타협’이어서 품질이 그다지 높지 않은 상품으로 취급되는데, 단 하나, 샴페인에 있어서만은 예외이다. 알기 쉽게 가격으로 예시해보자. 루이 로데레가 10만원 정도 한다면, 크리스탈은 30만원 정도 하는데, 크리스탈 로제는 거의 100만원에 육박한다. 한 마디로 꿈의 샴페인이다. 그런데 그런 샴페인을 상납 받고도 시큰둥해할 정도라면 도대체 어쩌란 말인가?
영화 속의 부패경찰들은 더 이상 샴페인을 마실 수 없게 되었다. 리치에게 검거된 프랭크가 마약조직의 상납 커넥션을 낱낱이 불었기 때문이다. [아메리칸 갱스터]는 실화에 근거한 영화인데 실제로 이들 두 사람의 협조(?)로 마약 관련 뉴욕경찰의 75%를 체포했다고 한다. 프랭크는 자신의 재산 2500억을 몰수당하고 징역 70년을 선고 받았지만 협조의 대가로 15년으로 감형되어 1991년에 출소하였는데, 당시 그의 변호사가 바로 경찰복을 벗고 변신한 리치였다고 한다. 이것은 해피엔딩인가? 잘 모르겠다. 어딘지 모르게 씁쓸한 뒷맛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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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크리스탈 로제의 맛 자체가 그러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지난 해에 어떤 와인동호회의 모임에서 크리스탈 로제를 맛본 적이 있다. 분명 분에 넘치는 행운이었다. 날씬한 잔에 담긴 채 끊임없이 기포를 쏘아 올리며 내 앞에 놓여진 크리스탈 로제를 바라보니 절로 행복한 기분이 들었다. 그 색깔과 자태가 너무도 아름다워 차마 입술을 대기가 아까울 정도였다. 하지만 볼 때가 좋았다. 실제로 몇 모금을 목구멍 안으로 넘기니 입 천장 어딘가에 허무하고 씁쓸한 여운이 감도는 게 느껴졌던 것이다. 그것이 겉보기에만 화려한 갱스터 혹은 자본주의의 맛인가?
[중앙SUNDAY] 2008년 5월 18일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에서 끝까지 도망다니다가 결국은 죽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