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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인과 마주 앉아 회를 먹는다면
심산의 와인예찬(34) [미녀는 괴로워](김용화, 2006)의 푸이-퓌세
김용화 감독의 [미녀는 괴로워]는 2006년 최고의 흥행작이었다. 개봉 당시 순식간에 전국 600만을 돌파하면서 단칼에 ‘역대 한국영화 흥행 베스트 10’에 진입한 이 작품은 ‘잘 만들어진(well-made)' 상업영화의 한 전형을 보여준다. 내가 시나리오 워크숍 도중에 자주 인용하는 작품이기도 하다. 대부분의 수강생들이 이 작품을 보았기 때문에 인용하기에 편할뿐더러 ‘상업영화의 본질’을 논파하기에도 적절한 대상이기 때문이다.
[미녀는 괴로워]가 당대 최고의 흥행을 기록한 이유는 무엇일까? 간단하다. 많은 관객들이 극장 매표구에 돈을 들이밀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들은 무엇 때문에 이 영화를 기꺼이 보려 했을까? 솔직히 말하자. 이 영화가 불러일으킨 흥행 돌풍의 핵심은 ‘김아중’이라는 배우였다. 이 영화를 본 많은 관객들은 하나 같이 이렇게 말했다. 김아중 너무 이쁘지 않니? 김아중, 노래고 몸매고 정말 끝내주지 않니? 이른바 ‘충무로 밥’을 먹고 사는 나 역시 그랬다. 아니 도대체 저런 눈부신 보물이 어디서 갑자기 튀어나온 거야?
조금 더 영화를 많이 아는 관객들은 이렇게 말했다. 주진모도 나름 괜찮지 않았어? 그보다 더 많이 아는 관객들은 감독의 이름을 들먹인다. 김용화 감독, 내가 [오! 브라더스](2003) 때부터 알아봤어! 언젠가는 홈런을 칠 줄 알았다구! 영화산업에 대해서 더 깊숙이 알고 있는 사람들은 이렇게 말했다. KM컬처가 이제 어깨에 힘 좀 주겠군, 혹은, 쇼박스 배급라인 뒤에 빨리 줄 서는 게 좋겠어. 천박하다고? 그렇지 않다. 이것이 바로 상업영화가 대중 속에서 유통되는 방식이다. 당연하다. 그것이 이 동네에서 통용되는 ‘게임의 법칙’이다.
하지만 내가 시나리오작가로서, 시나리오작법 강사로서, 그리고 한국시나리오작가조합 대표로서 이 작품을 자주 인용하는 이유는 다른 데 있다. [미녀는 괴로워]의 흥행과 그에 뒤따르는 각종 찬사들을 꼼꼼히 들여다보면 거기에는 ‘작가’가 없다. 당신은 혹시 [미녀는 괴로워]의 작가가 누구인지 알고 있는가? 뭐 몰라도 좋다. 본래 상업영화 관객들이란 그 작품의 시나리오작가가 누구인지 알 필요도 없고 알 의지도 없으니까. 하지만 그해 최고의 흥행을 기록하고 ‘역대 흥행 베스트 10’에 진입한 이 작품의 시나리오작가가 ‘실제로 벌어들인 돈’의 액수를 알게 되면 어쩌면 쇼크(!)를 먹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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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녀는 괴로워]의 원작자는 일본의 순정만화가 스즈키 유미코이다. 하지만 한국영화 [미녀는 괴로워]는 일본만화 [미녀는 괴로워]와 엄청 다르다. 일본 원작만화와 그것을 각색한 한국영화를 비교해보면 시나리오작가의 재능과 역할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확연히 인식할 수 있을 것이다. [미녀는 괴로워]는 [올드보이](2003)와 더불어 일본 만화를 원작으로 하되 그것을 각색하는 과정에서 ‘청출어람’의 모델로 꼽힐만한 훌륭한 영화였다. 가만 있자, 어째 이야기가 샛길로 가고 있는 것 같다? 내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단순하다. [미녀는 괴로워]라는 영화를 이야기할 때는 그 작품의 시나리오작가 노혜영을 기억해 주었으면 좋겠다는 것뿐이다. 그녀는 또 다른 흥행작 [싱글즈](2003)의 시나리오작가이기도 하다.
자, 이제 영화 속의 와인 이야기에 집중해보기로 하자. [미녀는 괴로워]에서 와인이 등장하는 장면은 딱 한 군데뿐이다. 엄청난 뚱녀 ‘한나’에서 늘씬한 미녀 ‘제니’로 변신한 다음 최고의 여가수로 떠오른 김아중이 오래 전부터 짝사랑해왔던 음반 프로듀서 ‘상준’(주진모)의 집에 찾아가는 장면이다. 제니와 사랑에 빠진(한나와 사랑에 빠진 게 아니다) 상준은 그녀를 위해 근사한 저녁식사를 준비해뒀다. 최고급 회와 와인이다. 영화 속의 상준은 잘 나가는 프로듀서로서 부와 명예 그리고 그것에 따르는 권력을 누리고 있는 캐릭터이다. 그런 그가 멋진 인테리어로 꾸며진 근사한 집에서 최고급 회와 더불어 자신 있게 내놓은 와인은 도대체 어떤 것이었을까?
카메라는 영화 속에 등장하는 와인의 라벨에 일부러 포커스를 맞추지 않았다. 인물들에게 포커스를 맞춘 대신 와인병과 그 라벨은 흐릿한 배경처럼 처리했을 뿐이다. 하지만 나 같은 종류의 와인 폐인들은 그 짧게 스쳐 지나가는 순간 속에서도 눈알을 번득여 라벨을 식별해내고야 만다. 그것은 푸이-퓌세(Pouilly-Fuisse)였다. 프랑스 부르곤느 지방의 마꼬네 지역에서 생산하는 샤르도네 100%의 화이트 와인이다. 푸이-퓌세는 A.O.C.의 이름인 동시에 그 와인의 이름이기도 하다. 하지만 푸이-퓌세를 출시하는 생산자들은 많다. 그렇다면 도대체 누가 만든 푸이-퓌세일까?
포커스 아웃된 화면이지만 카메라가 두어 번 식탁을 훑는 동안 푸이-퓌세의 라벨 디자인이 눈에 쏙 들어온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화면은 여전히 흐릿한 채로 남아 있는데 내 눈동자가 저 홀로 초점을 맞춘 것이다. 샛노란 바탕에 삐뚤 빼뚤 쓰여진 장난스러운 글씨의 라벨, 다름 아닌 루이 막스(Louis Max)라는 네고시앙의 작품이다. [미녀는 괴로워]에 등장하는 와인의 설정은 이렇다. 잘 나가는 청년 프로듀서가 자신의 어린 애인을 집으로 초대하여 최고급 회와 더불어 루이 막스가 만든 푸이-퓌세를 내놓는다. 이것은 올바른 설정인가? 정확히 그렇다. 석회(굴)와 더불어 마시기에는 샤블리(Chablis)만한 와인이 없고, 회 종류와 더불어 마시기에는 푸이-퓌세만한 와인이 없다. 게다가 향긋한 내음과 깔끔한 여운으로 혀끝을 신 침을 돌게 하는 것으로 유명한 루이 막스의 작품이라니!
한나/제니는 그러나 그 자리가 편하지 않았다. 모든 것을 뜯어 고친 성형 미인으로서 과연 내가 이 자리에 앉아 있어도 되나 하는 자괴감 혹은 죄책감에 시달리고 있었던 것이다. 한 없이 가벼운 터치로 처리하여 보는 내내 배를 잡고 웃게 만드는 유쾌한 장면이었지만 가슴 한 켠에 짠한 느낌이 들었다. 사람들은 누구나 ‘합당한 대우’를 받을 때라야 마음이 편해진다. 과소평가 못지 않게 과대평가 역시 불편한 것이다. 그 장면을 보며 나는 한나/제니가 편안한 마음으로 저 푸이-퓌세를 음미할 수 있는 날이 왔으면 좋겠다는 엉뚱한 생각을 했다. 하지만 미인이 아닌 여자들에게도, 혹은 스타가 아닌 시나리오작가들에게도, 과연 그런 ‘당연한’ 행복을 맛볼 수 있는 날들이 올 것인가에 대해서는 여전히 의문이다.
[중앙SUNDAY] 2008년 5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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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눈이 이상한걸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