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g1]
불타는 지옥의 명품 와인
심산의 와인예찬(39) [타워링](존 길러민, 1974)의 로마네 콩티 1929
1971년의 크리스마스는 특별했다. 극동에 위치한 조그마한 군부독재 국가가 전세계 매스컴의 주목을 받은 날이다. 이날 아침 10시경, 대한민국 서울의 충무로에 위치해 있던 대연각호텔에서 화재가 발생했다. 시작은 미미했다. 1층 커피숍 주방 안에 세워져 있던 프로판가스가 폭발하면서 근처에 있던 가스레인지에 불이 붙은 것이다. 하지만 이 작은 불씨는 끝내 꺼지지 않고 호텔 전체를 삼켜버렸다. 결국엔 대통령 전용 헬기를 비롯하여 육군항공대와 공군, 미8군 헬기까지 동원되었으나 역부족이었다. 이날 집계된 공식 사망자수만 165명에 이른다.
그로부터 수년이 지나지 않아 전세계를 뒤흔든 블록버스터급 재난영화가 바로 존 길러민 감독의 [타워링](The Towering Inferno, 1974)이다. 당시 이 영화가 개봉되었을 때 “한국의 대연각호텔 화재사건을 모티브로 하여 제작되었다”는 소문이 공공연하게 돌았다. 실제로 그런 인터뷰 기사를 본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이 글을 쓰기 위하여 자료를 뒤적이다 보니 해당 기록을 찾을 수는 없었다. 이 영화는 공식적으로 2개의 재난소설을 원작으로 한다. 리처드 마틴 스턴의 [더 타워]와 토마스 스코티아와 프랭크 로빈슨이 함께 쓴 [더 글래스 인퍼노]라는 장편소설들이다. 하기야 이 소설들 자체가 대연각호텔 화재사건에서 영감을 얻어 쓰여진 것인지의 여부를 누가 알 수 있겠는가?
[타워링]은 [포세이돈 어드벤처](로널드 님, 1972)와 더불어 이른바 ‘재난영화’의 양대 산맥을 이루고 있는 영화다. 또한 이 작품은 [오리엔트특급 살인사건](시드니 루멧, 1974)과 더불어 ‘할리우드 스타들의 종합 선물세트’로도 손꼽힌다. 그만큼 엄청난 스타들이 하나의 스크린 안에서 치열한 용쟁호투 혹은 아름다운 하모니를 보여주는 영화이기도 하다. 나로서는 당시 가장 좋아했던 두 명의 남성 배우, 스티브 맥퀸과 폴 뉴먼이 함께 나오는 영화였으니 주저없이 극장으로 달려갈 수밖에 없었던 작품이다.
[img2]
[타워링]은 아카데미로부터도 높은 평가를 받았다. 작품상, 남우조연상(프레드 아스테어), 미술상, 음악상, 음향상 등 5개 부문에 노미네이트되었으며, 촬영상, 편집상, 주제가상 등 3개 부문을 수상했다. 로버트 와그너가 애인인 비서와 함께 빌딩에 고립되어 있다가 결국엔 불타는 몸으로 창문을 깨고 떨어져 죽는 장면에서 흘러나왔던 “우리 다시는 지금처럼 사랑할 수 없으리(We May Never Love Like This Again)"라는 주제가는 지금까지도 사랑받는 팝 스탠더드가 되었다.
이 추억의 영화를 나이 들어 다시 보니 비로소 고개를 끄덕이게 만드는 장면이 있다. 물론 모든 어른들에게 해당되는 이야기는 아닐 테고 와인애호가인 어른들에게만 해당되는 장면이다. [타워링]에 등장하는 캐릭터들 중 가장 막강한 권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으로 묘사되는 이는 워싱턴에서 날아온 파커 상원의원(로버트 본)이다. 건물에 입장할 때 그에게 터지는 카메라 플래쉬와 일장 연설을 들어보면 아마도 차기 대통령 후보쯤 되지 않을까 싶다. 그를 초청한 건물주(윌리엄 홀든)는 당대 최고의 건축가인 덕(폴 뉴먼)에게 자신의 속내를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도심 재개발권을 따낼 거야, 그러면 이 도시 전체를 초고층빌딩으로 채울 수 있어.”
오프닝 파티가 한창 진행 중일 때 건물주는 상원의원의 옷소매를 은근히 끌어당긴다. “자네를 위해 특별히 준비해둔 것이 있지.” 이를테면 일종의 로비 혹은 뇌물을 안길 셈이다. 그는 바텐더에게 지시한다. “그걸 보여드리게.” 바텐더가 올려놓은 것은 뜻밖에도 매우 낡은 나무 상자 한 궤짝(!)일 뿐이다. 하지만 그걸 본 순간 상원의원은 경악한다. “1929년?” 바텐더가 상자의 뚜껑을 연다. 그 안에는 12병의 와인들이 나란히 눕혀져 있다. 상원의원은 말을 잇지 못한다. “아니 도대체 이걸 다 어떻게 구했나?” 건물주는 으스대며 잘난 척 한다. “뭐 별 거 아니야.”
도대체 어떤 와인이길래 저런 대화를 주고 받는 걸까? 자세히 들여다보면 상자의 옆면에 찍혀진 글씨가 또렷이 보인다. 로마네 콩티 1929. 경악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어떻게 이걸 다 구했느냐는 질문은 무엇을 뜻하는 걸까? 로마네 콩티 1병을 사려면 DRC 세트 12병을 모두 다 사는 수밖에 없다. DRC 1세트는 로마네 콩티 1병, 라 타슈 3병, 그리고 리슈부르, 에셰조, 그랑 제셰조, 로마네 생 비방이 각각 2병씩 들어 있다. 그런데 건물주인 윌리엄 홀든이 준비한 상자에는 오직 로마네 콩티만 12병이 들어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DRC를 12세트 산 다음 거기서 로마네 콩티만 선별하여 따로 한 상자를 만들었다는 뜻이 된다.
[img3]
그 와인 한 상자 혹은 뇌물 한 상자의 가치가 얼마나 되는지는 가늠할 길이 없다. 지난 2008년 5월의 크리스티 경매에서 1985년 빈티지의 DRC 한 세트가 23만 7천 달러에 낙찰되었다는 사실만 참고삼아 밝혀둔다. 사실 로마네 콩티를 논할 때 가격은 이미 논외이다. 아무리 가진 게 돈밖에 없는 졸부라고 해도 로마네 콩티를 마음대로 살 수는 없다. 그들은 마치 마피아처럼 “아는 사람하고만 거래 한다”는 원칙을 고수하고 있는 까닭이다. 그런데 그런 로마네 콩티를, 그것도 1929년 빈티지만으로, 12병을 모아서 상원의원에게 상납한다? 단언컨대 모든 영화를 통털어서 이것보다 더 놀라운 수준의 뇌물은 다시 없을 것이다.
물론 영화는 영화일 뿐이다. [타워링]은 행여 DRC로부터 제소라도 당할까봐 염려되었던지 로마네 콩티의 스펠링 하나를 바꾸어 놓았다. 콩티(Conti)가 아니라 콩티(Contie)라고 변형시켜 놓은 것이다. 영화의 논리는 이렇다. 샌프랜시스코에 세계에서 가장 높고 럭셔리한 135층 짜리 고층빌딩이 들어섰다. 그 빌딩의 스카이라운지에는 로마네 콩티 1929가 한 상자 숨겨져 있다. 아주 그럴듯한 설정이다. 혹시 그 와인으로 대변되는 자본주의의 극치는 곧이어 펼쳐지는 대형참사와는 무관한 것인가? 대답하기가 쉽지 않다.
더 어려운 질문은 이런 것이다. 만약 누군가가 나에게 “이 파티가 끝나면 저 상자를 가져가시오”라고 했는데 그의 제안을 뿌리치고 홀연히 저 건물을 빠져나올 수 있을 것인가? 솔직히 이건 대답하기 쉽다. 나는 그냥 그 건물에 남아있을 것이다. 우리는 그런 식으로 불에 타서 죽는다.
[중앙SUNDAY] 2008년 8월 3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