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심산 등록일: 2008-10-04 15:57:07 IP ADRESS: *.237.8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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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로운 일상의 위안


심산의 와인예찬(43) [아멜리에](장-피에르 주네, 2001) 이웃들이 마시는 강화와인

 

1973년 9월 3일 오후 6시 28분 32초의 일이다. 분당 14,670회의 날개짓을 하던 쇠파리 한 마리가 몽마르트르 거리에 살짝 내려앉았다가 때마침 그곳을 질주하던 승용차 바퀴에 치어 보도블럭 위에 흉한 핏자국을 남긴채 죽어갔다. 같은 시각, 근처의 한 레스토랑에서는 탁자 위에 놓여있던 두 개의 와인잔이 테이블보가 바람에 흔들릴 때마다 우아하게 넘실거리고 있었고, 5번가에 있는 아파트 5층에서는 친구의 장례식에 다녀온 유진 콜레르가 자신의 수첩에서 죽은 이의 이름을 지우고 있었는데, 그러거나 말거나 라파엘 풀랑의 정자는 아만다의 자궁을 향해 맹렬한 속도로 달려가고 있었다. 그 이후 9개월만에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이가 바로 우리가 사랑해 마지않는 여인 아멜리에이다.

 

장-피에르 주네 감독의 [아멜리에]를 보고 있노라면 킬킬대며 삐져나오는 웃음을 참기 어렵다. 그는 ‘아무 것도 아닌 이야기’를 흥미롭게 이야기할 줄 아는 보기 드문 감독이다. 그의 유명한 전작인 [델리카트슨](1991)이나 [잃어버린 아이들의 도시](1995)와 마찬가지로 [아멜리에] 역시 ‘유니크한 비주얼 스토리텔링’의 정수를 유감없이 보여준다. 프랑스와 독일의 합작 영화인 이 작품은 미국의 컬럼비아가 배급을 맡게 된 덕분에 전세계의 스크린에 모습을 드러낼 수 있었고, 놀라운 흥행성적을 올리지는 못했지만 소수의 관객들과 다수의 평론가들로부터 기립박수에 가까운 상찬을 받았다.

 

[아멜리에]의 스토리 라인은 단순하다. 몽상가 처녀 아멜리에(오드리 토투)가 자신의 사랑을 찾아가는 이야기이다. 영화를 보지 않은 사람들은 이렇게 반문할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흔해빠진 로맨틱 코미디 아니야? 플롯만을 따져보면 분명히 그렇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플롯은 그다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아멜리에]는 캐릭터와 디테일의 묘사 그리고 허를 찌르는 미장센에서 탁월한 성취를 보여준다. 이런 것들을 글로 묘사하거나 설명하기란 애당초 불가능하다. [아멜리에]라는 영화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설명할 수 없다. 그냥 감상하시라. 충분히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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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멜리에]라는 작품의 감상과 평가 따위는 이 글의 관심사가 아니다. 우리는 영화 속의 와인에 집중해보자. 마들렌(욜랑드 모로)은 외로운 미망인이다. 한때 그토록 사랑했던 남편은 보험회사의 여비서와 눈이 맞아 바람을 피우다가 급기야는 공금까지 횡령하여 파나마로 사랑의 도피행각을 떠나 버렸다. 그 이후 마들렌이 전해들은 소식이란 그가 파나마에서 불의의 교통사고로 사망했다는 것뿐이다. 그녀에게는 남겨진 삶이 너무도 막막하다. 연애시절의 남편이 자신에게 써보낸 낯뜨거운 러브레터를 거의 외울만큼 마르고 닳도록 읽는 것 이외에는 아무 것도 할 일이 없다. 이 외로운 미망인은 자신에게 남겨진 막막한 삶을 어떻게 견디어내고 있을까?

 

아멜리에가 마들렌을 처음 만나는 장면을 들여다보자. 아멜리에가 무엇을 물어보려 하자 마들렌은 다짜고짜로 그녀를 집안으로 잡아끌며 이렇게 말한다. 일단 낮술부터 한잔 하자구. 우리말 자막에는 ‘낮술’로 되어 있지만 실제 영화 속의 프랑스어는 ‘포르투’였다. 영어로는 포트(Port)라고 불리우는 이 술은 포르투갈에서 만드는 강화와인(fortified wine)이다. 와인의 변질을 방지하고자 브랜디를 부어 만든 이 술은 알콜농도가 높은 까닭에 쉬이 변하지 않아 오랜 세월 동안 보관하면서 천천히 마실 수 있다. 화면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포트를 마실 때에는 특별한 잔을 사용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일반적인 와인잔보다 훨씬 작고 앙증맞은 포트잔을 사용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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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몽(세르주 메를렝)은 ‘유리인간’이라는 별명으로 불리울 만큼 뼈가 자주 부서지는 바람에 20년 동안이나 방 안에 갇혀서 생활하고 있는 아마추어 모사(模寫)화가이다. 그는 바깥 세상의 사람들 모두가 ‘사기꾼’이라고 여기며 자기 안에 웅크리고 살아가는 캐릭터인데, 지난 20년 동안 모사한 그림이라고는 오직 하나, 르노아르의 [선상에서의 오찬]뿐이다. 이 괴팍한 노화가가 품고 있는 고민이라는 것 또한 황당하다. 르노아르 그림 속에 등장하는 한 처녀의 표정을 제대로 잡아낼 수가 없다는 것이다. 이 처녀는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이것이 그가 품고 있는 예술적인 혹은 실존적인 고민이다.

 

레이몽 역시 아멜리에와 처음 만나는 순간 이렇게 제안한다. 어여 들어와, 나랑 설탕 탄 와인이나 한 잔 하자구. 여기서 말하는 ‘설탕 탄 와인’이란 도대체 무엇일까? 양조학의 전문용어로 이야기하자면 샤프탈리자시옹(Chaptalization, 加糖)을 했다는 것인데, 이 역시 강화와인의 일종이다. 아마도 위에 언급한 포트와인보다 훨씬 조악한 싸구려 와인일 것이다. 그가 와인을 따라서 아멜리에에게 불쑥 내미는 잔은 더욱 가관이다. 유리로 되어 있기는 하나 와인잔이 아니라 머그잔인 것이다. 레이몽이 아멜리에에게 와인을 권하는 장면은 영화의 후반부에 한 번 더 나오는데, 이때 아멜리에는 그 머그잔 속에 빵조각 따위를 집어넣어 적셔 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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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멜리에]는 프랑스 서민들의 삶에서 와인이 차지하고 있는 지위와 역할을 잘 보여준다. 그들에게 와인은 사치품이 아니라 필수품인 것이다. 그렇다. 와인은 일상의 음식이다. 머그잔에 따라 마시면 어떻고 사발에 따라 마시면 또 어떤가? 일단 코르크를 따면 다 마셔 버려야만 하는 와인을 고집할 필요도 없다. 어제도 조금 마시고, 오늘도 조금 마시며, 내일도 조금 마실 일상의 와인이라면 ‘설탕 탄 와인’인 강화와인이 제격이다. 와인을 앞에 놓고 격식과 가격을 따지는 것이야말로 전형적인 속물근성에 불과하다. 자신의 처지에 걸맞게 즐기면 그만인 것이다. [아멜리에] 속에서 묘사된 와인은 외로운 일상의 위안이며, 타인과의 소통이 시작되는 출발점이다.

 

[아멜리에]는 보는 사람을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영화다. [아멜리에]는 작품 속에 등장하는 모든 캐릭터들에게 행복한 결말을 선사해준다. 마들렌과 레이몽 역시 마찬가지이다. 아멜리에는 마들렌에게 ‘뒤늦게 사랑을 깨달은 남편의 편지’를 보내주고 레이몽이 파악할 수 없었던 ‘그림 속 여인의 표정’을 알게 해준다. 우리가 어찌 영화 속의 아멜리에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지만 영화 밖의 현실에서 아멜리에와 같은 아가씨를 만날 가능성은 거의 없다. 그렇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라야 빤하다. 슬리퍼를 끌고 가까운 와인숍에서 어슬렁거리다가 일용할 싸구려 와인들을 잔뜩 사다놓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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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SUNDAY] 2008년 10월 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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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동진

2008.10.04 22:56
*.44.210.111
푸하하하하하[깔깔][깔깔][깔깔]
강화와인의 추억이여.~~~

정말로 와인수업에 간지도..
와인모임에 간지도
거의

백만년전 오스트랄로 피테쿠스였던 때의 추억인거 같군요....

아.....즐거웠던 그날이여..~~~~ [취함]
profile

심산

2008.10.05 01:39
*.131.158.52
그러길래 동진아, 와인모임에 좀 나오렴
와인에서 멀어지면...행복에서도 멀어지는 거란다...[쪼옥]

조현옥

2008.10.06 14:13
*.53.218.52
아멜리에, 정말 무쟈게 재밌게 봤던 기억이...^^(금붕어의 자살기도~ㅋㅋㅋ)
그 홀짝거리던 와인이 '포트와인' 이었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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