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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눈물과 땀방울의 결실
심산의 와인예찬(47) [와인미라클](랜달 밀러, 2008)의 샤또 몬텔레나 1973
우리가 마시는 와인은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을까? 대부분이 물이다. 그 다음으로 높은 퍼센티지를 차지하는 것이 알콜이며, 포도의 발효과정에서 발생하는 글리세롤이 세 번째를 차지한다. 이것이 양조학자들의 대답이다. 하지만 세상에는 과학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것들이 너무도 많다. 천지인의 오묘한 조화로 태어나는 와인의 경우는 특히 더 그렇다. 와인은 피눈물과 땀방울로 이루어져 있다. 이것이 영화 [와인미라클]이 아름다운 영상과 더불어 우리에게 전해주는 가슴 벅찬 메시지이다.
영화의 주요 무대는 미국 캘리포니아 나파밸리에 자리잡고 있는 무명의 와이너리 샤또 몬텔레나(Chateau Montelena). 이 샤또의 주인인 짐(빌 풀먼)은 아내로부터 이혼을 당하고 은행대출금을 갚지 못해 쩔쩔 매면서도 오직 ‘최고의 와인’을 만들고야 말겠다는 일념 하나로 버티고 있는 자존심 강한 사내이다. 그에게는 “우드스톡 페스티발이 끝난 지가 언제인데” 아직도 무책임한 히피처럼 아무 생각 없이 살고 있는 아들 보(크리스 파인)가 있다.
영화의 첫장면은 이들 부자 간의 권투장면이다. 아들은 아버지로부터 얻어터지며 신경질적으로 항변한다. “랙킹을 또 하라구요? 벌써 네 번이나 했잖아요! 세계 신기록을 세울 작정이에요?” 여기서 말하는 랙킹(Racking)이란 찌꺼기 분리작업을 뜻한다. 발효가 막 끝난 와인에는 효모의 찌꺼기가 많이 남아 있기 마련인데, 이것을 가라앉힌 다음 윗부분의 맑은 부분만 채취하여 따로 분리시키는 작업이다. 세심한 정성과 엄청난 노동량을 요구하는 일인데 고급 와인일수록 랙킹의 횟수가 많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강펀치를 날리며 못을 박는다. “끝없이 계속해야돼! 최고가 될 때까지!”
영화는 최고의 양조자가 되겠다는 꿈을 안고 이 샤또에 취직하러 온 샘(레이첼 테일러)이 등장하면서부터 묘한 삼각관계를 보여준다. 놀라운 테이스팅 능력을 가지고 있는 구스타보(프레디 로드리게스)와 보가 샘을 동시에 연모하게 된 것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짐은 샘을 데리고 포도밭 사이를 거닐며 자신만의 와인 철학을 전수해준다. “자네, 포도밭에 뿌리는 최고의 비료가 뭔지 아나?” 히피 풍의 신참내기 아가씨 샘이 알 리가 없다. 짐은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을 잇는다. “바로 주인의 발품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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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도나무를 심어 놓기만 하면 와인이 열리는 것이 아니다. 포도나무의 줄기와 잎 그리고 열매가 매달려 있는 부분을 캐노피(Canopy)라고 부르는데, 포도 재배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캐노피 매니지먼트다. 간단히 말해서 가지를 쳐내고 잎사귀층을 조절해줌으로써 햇볕과 바람이 포도열매에 닿는 방식을 통제하는 것이다. 게으른 주인이 가꾸는 포도밭은 캐노피가 무성하다. 그리고 캐노피의 두께와 와인의 품질은 반비례한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 짐의 말마따나 “부지런히 발품을 파는 주인”만이 좋은 와인을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마시는 와인은 바로 그들의 땀방울인 것이다.
그렇게 온갖 노고 끝에 만들어낸 화이트와인 ‘샤또 몬텔레나 1973’은 그러나 병입 후 ‘일시적 변색현상’을 일으키는 바람에 짐을 절망의 구렁텅이로 몰아넣는다. 올해 농사는 망쳤다. 은행대출금을 갚을 방법이 없다. 그렇다면 이제 파산신고를 하는 수밖에. 영화 속의 짐은 변색한 와인들 사이에 누워 눈물을 흘린다. 홧김에 휘두른 주먹에서는 피가 뚝뚝 떨어진다. “나는 내 모든 것을 다 바쳤어! 나는 실패를 인정할 수가 없어!” 최선을 다한 인간의 피눈물을 보는 것은 고통스럽다. 영화 [와인미라클]에서 가장 가슴 뭉클해지는 장면이다.
한낱 히피에 불과한 줄 알았던 보가 빛을 발하는 것은 이 순간 이후부터이다. 그가 샘의 손목을 낚아채 부리나케 달려간 곳은 캘리포니아 대학 데이비스 캠퍼스(UC Davis). 프레즈노(Fresno) 캠퍼스와 더불어 미국 와인 양조학의 양대 산맥을 이루며, 현재 프랑스의 보르도 대학을 제치고 세계 양조학의 메카로 인정받고 있는 곳이다. 그곳의 양조학 교수는 보가 들이댄 샤또 몬텔레나 1973을 한참 동안이나 들여다보고 시음하더니 탄성을 내지른다. “맙소사, 책에서만 봤던 바로 그 현상이로군! 걱정할 것 없어, 시간이 필요할 뿐이야, 조만간 다시 제 색깔을 되찾게 될 거야!”
UC 데이비스의 양조학 교수조차 ‘책에서만 봤다’고 고백한 이 일시적 변색현상은 도대체 무엇일까? 나는, 마치 보가 UC 데이비스로 달려가듯, 한국와인아카데미의 김준철 원장에게로 달려갔다. “아마도 적변(pinking)현상을 말하는 것 같군?” 나의 와인 스승이신 김준철 원장의 답변이다. 화이트 와인 양조시 공기와의 접촉을 지나치게 차단하면, 안정화 과정이나 주병 중 갑자기 산화되어 일시적으로 회색빛 띈 핑크빛으로 변하게 되는 경우가 생기는데, 이런 현상을 적변(pinking)이라고 한다.
어째서 이런 현상이 빚어졌을까? 답변은 영화 속에 있다. 짐이 오직 최고의 와인을 만들겠다는 일념 하에 양조 과정에서 “거의 완벽하게 공기를 차단”했기 때문이다. 와인 양조학에서 공기는 일종의 ‘필요악’이다. 접촉을 줄이는 것이 좋으나 지나치게 차단하면 오히려 이런 역효과를 내는 것이다. 이제 영화의 한글판 제목처럼 ‘미라클’이 벌어질 때다. 보는 짐이 폐기처분한 줄 알았던 와인을 용케도 구해낸다. 그리고 영국인 와인평론가 스티븐 스퍼리에(알란 릭맨)를 통하여 자신들의 피눈물과 땀방울로 빚어낸 이 와인을 ‘파리의 심판’에 출전시키는 것이다.
캘리포니아 와이너리들을 대표하여 그곳에 참가한 보는 여전히 헝클어진 장발에 찢어진 청바지 차림이다. 하지만 채점표를 합산하던 스티븐의 표정은 당혹감에 일그러진다. 그는 보를 무대 뒤로 불러내어 다그친다. “자네 좀 깨끗한 옷은 없나? 넥타이는 맬 줄 알아?” 놀랍게도 샤또 몬텔레나 1973이 프랑스 부르곤을 대표하는 그 놀라운 샤르도네들을 모두 물리치고 당당히 1등을 차지(!)한 것이다. 이 거짓말 같은 이야기는 역사 속의 실화이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했을까? 답변은 자명하다. 와인은 전통과 명성으로 만드는 게 아니다. 그것은 피눈물과 땀방울로 만들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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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SUNDAY] 2008년 11월 30일
와인 러버에게 양조학은 한번쯤 꼭 거쳐가야할
필수 코스란 생각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