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인에는 격식이 없다
심산(심산스쿨 대표)
우리나라의 와인문화는 여전히 벽이 높다. 아직도 와인을 마시는 사람들, 하면 뭔가 고상한, 많이 배운, 돈도 많은 인간들인 것처럼 느껴진다는 것이다. 실제로 강남의 내로라 하는 와인바에 가보면 기 죽기 십상이다. 그곳의 실내장식은 인테리어에는 젬병인 사람이 봐도 몇 억은 족히 발랐겠다 싶다. 게다가 그 안에 앉아 와인을 홀짝거리고 있는 사람들의 행색이며 태도를 보면 아 내가 못 올 곳에 왔구나 하는 자괴감에 빠지기 일쑤다.
일단 입고 있는 옷이나 몸에 걸친 장신구가 명품이다. 와인을 따라주는 소믈리에를 대하는 눈빛도 도도하기 짝이 없다. 우리나라 와인바에서 사용하고 있는 와인잔들은 아마도 세계 최대 규모일 것이다. 그 커다란 와인잔에 와인이 담기면 모두들 그 잔을 돌리기에 바쁘다. 이른바 스월링(swirling)이다. 와인과 공기의 접촉면을 급속히 넓혀 맛의 품질을 제고하고, 향기를 최대한 이끌어내겠다는 것인데, 어디서 따로 비밀과외라도 받고들 오는지 그 돌리는 솜씨들이 거의 묘기의 수준이다.
일단 스월링이 끝나면 잔을 눈 높이 이상으로 비스듬히 들어 와인의 색깔을 감상한다. 아니다. 그들의 진지한 눈빛을 보면 그건 감상이 아니라 검사다. 검사가 끝난 다음에는 코를 잔 안으로 깊이 박는다. 향기를 들이마실 때에는 또 분명한 매뉴얼이 있다. 마치 “사냥개가 냄새를 맡듯 강하게 킁킁” 들이마시는 것이다. 그 다음에는 와인을 혀 위에 놓고 굴리며 맛을 음미하는데 이 과정이 또한 예술이다. 혀의 가운데 부분을 옴폭하게 만든 다음 그 위에 와인을 올리고 “휘파람을 불 때의 반대 방향으로” 공기를 빨아들이면서 “후루룩 후루룩” 소리를 내는 것이다. 최초의 와인 한 방울을 목 뒤로 넘기는 것은 그 다음의 일이다.
아니 와인 한잔 마시는 데 이다지도 복잡한 과정을 거쳐야 하는가? 과연 전세계의 모든 나라에서 와인을 마신다는 인간들은 모두 이런 해괴한 격식을 차리는 것일까?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전혀 아니올시다”이다. 내가 알기에 이렇게 온갖 개폼과 호들갑을 다 떨어대면서 와인을 마시는 곳은 대한민국 서울의 강남뿐이다. 불행히도 우리나라의 와인문화는 스노비즘(snobbism)에 빠져버렸다. 그들은 음주(drinking)와 시음(tasting)을 구분하지 못하여, 음주할 곳에서 시음을 하고, 시음할 곳에서 음주를 한다.
음주란 말 그대로 술을 마시는 것이다. 술을 마시는 데 격식 따위는 필요 없다. 그저 좋은 사람들과 어울려 즐겁게 마시면 된다. 반면 시음이란 매우 고차원의 학습과 훈련을 필요로 한다. 위에 언급한 강남식 와인문화는 명백히 시음의 차원에 속한다. 로버트 파커 같은 와인평론가나 와인제조사의 패널(panel)들이 특정한 공간에서 하는 행동이다. 레스토랑이나 와인바는 대중적인 공간이다. 우리가 비싼 돈을 내고 그곳에 가는 이유는 즐거운 식사나 멋진 데이트를 하기 위해서다. 그런데 옆 자리의 인간들이 잔뜩 차려입고 앉아 산만하게 와인잔을 계속 돌려대거나 코와 입으로 “킁킁 후루룩 후루룩” 소리를 내고 있다면? 한 마디로 재수가 없다. 그야말로 공중도덕의 ABC조차 못 배운 매너 없는 망발인 것이다.
최근 몇 년 동안 프랑스, 이탈리아, 남아프리카공화국 등 세계적인 와인생산지를 집중적으로 여행했다. 그곳에서 얻은 가장 커다란 깨우침은 그들이 정말 와인을 사랑하며 그것을 격식 없이 즐긴다는 것이다. 보르도 그랑 크뤼의 오너는 피식 웃었다. “이 와인에 대한 평가요? 그건 평론가들이 알아서 하겠지요. 난 그냥 이게 좋아서 만들고 마실 뿐이에요.” 샤블리 그랑 크뤼의 오너는 사발에다가 와인을 콸콸 따라주며 무작정 권했다. “와이너리에 와서 취재를 하겠다니 제 정신이야? 일단 마셔.”
남불 아비뇽 근처의 오랑주라는 작은 마을에 머물 때였다. 내가 묵었던 숙소는 전원식 농가주택(Fermes Auberges)이다. 그런데 이 허름한 숙소에서도 와인을 만들고 있었다. 숙소의 여주인은 아이 셋을 키우고 있는 가정주부였는데, 내가 와인기행을 하고 있다고 하자 부리나케 창고로 달려가 자기가 만든 와인 한 병을 들고 나왔다. 아직 탄산가스도 채 다 빠지지 않았고 라벨도 붙이지 않은 와인이다. “보르도? 부르곤? 다 필요 없어! 우리 집 와인이 제일 맛있어!” 실제로 그랬다. 정말 맛있는 와인이었다. 그들에게 와인이란 우리들의 고향집 뒷마당 장독대 안에 들어있는 된장 고추장과 다를 바 없는 것이다. 이름 따위야 아무래도 좋다. 등급도 격식도 필요 없다. 맛있는 와인을 즐겁게 마시면 그만인 것이다.
그러니 제발 부탁이다. 남들 다 즐거운 시간을 보내러 온 레스토랑이나 바에서 잔을 휘휘 돌리고 코로 킁킁 대고 입으로 후루룩 후루룩대는 매너 없는 짓은 하지 말자. 외국에 나가서는 더더욱 금물이다. 만약 당신이 프랑스나 이탈리아의 레스토랑에서 그러고 있다면? 손님들은 모두 당신을 쳐다볼 것이며 조만간 소믈리에와 매니저 그리고 오너가 당신을 둘러쌀 것이다. 야단치거나 내쫓으려고 그러는 것은 아니니 쫄 필요는 없다. 다만 곧이어 이어질 질문에 대답할 각오는 해야 한다. “동양에서 오신 저명한 와인평론가십니까? 저희 집 와인과 요리에 대해서 고견을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TRAVELLER] 2011년 2월호
아주 가~끔 와인 마시고 필름 끊기는거 빼곤ㅋ, 선생님께 와인을 제대로 배운거 맞죠?!^^★
아, 영화별점 게시판 [심야의 FM]에 선생님께서 내셨던 와인퀴즈 정답 제가 맞췄습니다..ㅋ 뿌이뿌쉐 이후 또 한번 그 정답의 와인이 선물은 아니겠죠?^^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