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강남역, 만두소년의 부활
김대우의 맛집기행(4) 신포우리만두의 찐만두
1980년 무렵이었을 것이다. 세상은 몹시 어수선했다. 오랫동안 갇혀있던 공기들이 고압의 증기처럼 세상을 향해 뿜어져 나오고 있었고, 그런 기운들은 입시에 찌든 고등학교 3학년생들에게도 느껴질 정도였다. 하지만 세상이 어찌 돌아가는지 알 수 있는 식견이 특별히 있는 것도 아니어서 학교에는 고작 두발 자유화 따위나 외치며 데모가 일어났다. 유리창이 깨지고, 어쭙잖은 함성이 일고, 킥킥대며 몰려다니고, 뭐 그런 식이었다. 그런 오후에 친구가 갑자기 인천에 영화를 보러 가자고 했다. 햇볕이 나른하게 들어오는 1호선 전철을 타고 수많은 역을 지나 동인천역에 내린 친구가 나를 데리고 간 곳은 신포동에 있는 어느 만두집이었다. 배가 고프니 만두를 먹고 영화를 보자는 것이었다.
허름한 계단을 올라 이층으로 올라가니 바닥이 온통 타일로 되어 있는데다가 기름기까지 배어 있어서 몹시 미끄러웠다. 친구는 무려 8인분을 시켰다. 그리고 만두가 나오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이윽고 커다란 접시에 만두가 수북이 올려져 나왔다. 학생들이라고 터진 것들까지 덤으로 껴줘서 한 10인분은 되어 보였다. 나는 너무 많이 시킨 것이 아니냐며 못마땅해 했고, 친구는 일단 먹어보라며 웃기만 했다. “우리가 돼지냐?”운운하며 하나를 집어먹었는데, 아, 그때의 기억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세상에 어떻게 이런 만두가 있단 말인가. 얇은 껍질은 만두소의 기름을 먹어 촉촉하면서도 쫄깃했고 돼지고기와 파, 생강이 뒤섞인 내용물은 흥건한 육즙 속에서 뜨겁게 향을 발하고 있었다. 나는 결국 6인분 정도를 혼자 먹어버리고 말았다. 돼지처럼.
그 이후에도 시간과 용돈이 허락하면 그 친구와 둘이 인천에 가곤 했다. 물론 목적은 서로 조금 달랐다. 그 친구는 영화를 보기 위해서, 나는 만두를 먹기 위해서 가는 것이었으니까. 바로 그 만두집의 이름이 ‘우리만두’이다. 신포동 소박한 시장거리에서 시작한 우리만두는 인천지역을 중심으로 조금씩 뻗어나가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전국적인 분식 체인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세월이 흘렀다. 그 친구와 내가 조금씩 변해가듯 신포동 우리만두도 변해갔다. 본사에서 냉동상태로 날라져 온 만두는 무관심한 아르바이트생들에 의해 얼마 찌지도 않고 테이블에 올려졌고, 몇 번의 실망 끝에 나의 발길도 뜸해졌다. 이제 그 만두의 추억은 양복 깃의 단춧구멍처럼 분식집 이름에 엉뚱하게 남겨져 있을 뿐인가 싶었다.
그러다 우연히 강남역 부근을 지나던 중에 신포 우리만두집에 들어오게 되었다. 별 기대도 없이 만두를 시켰는데 그 옛날 본점의 맛을 거의 따라가는 지라 너무나도 기뻐서 주인에게 물어보니 이곳은 직영점이란다. 만두도 직접 만들어서 오랫동안 쪄서 올린다고 한다. 요즘 들어 소룡포를 간판으로 내건 만두집들이 많이 생겨나지만 나는 아직도 ‘기본적인 정성만 갖춘다면’ 신포동 우리만두가 결코 뒤지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물론 대형화, 체인화해 가는 전통의 맛집들의 행보에 동의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때 그 친구와 어떤 영화들을 보았는지가 잘 기억나지 않는다. 그 만두집의 계단과 2층에 앉아 있을 때의 적막감, 작은 창으로 내다보이는 단층 목조 건물의 지붕들, 간혹 시장에서 올라오는 소음들, 모든 것이 또렷이 기억나는데 같이 본 영화는 전혀 기억이 나질 않으니, 참 이상한 일이다. 그 친구는 예술영화를 좋아했던 것 같다. 화면에 두 남녀가 별 대화 없이 오랫동안 침묵을 이어가던 장면이 문득 떠오를 뿐이다. 그런 영화들을 좋아하던 그 친구는 공무원이 되었고, 만두만을 그리워하던 나는 영화를 하고 있으니, 인생이란 참 리얼리티 없는 스토리다.
[무비위크] 2006년 12월 11일
그런데 이번 맛집기행엔 연락처가 없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