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사랑하기 위해 와인 잔을 들어라”
-랠프 스테드먼 저<세계 와인 기행>
-명로진 <배우, 인디라이터, 교보 문고 북멘토>
한 잔의 와인을 마시는 순간, 우리는 순간 이동을 하게 된다. 그 와인이 가장 빛나던 그 시절과 공간 속으로. 이 글을 쓰기 위해, 나는 강건한 카베르네 소비뇽 한 잔을 들이킨다. 순간, 나는 다소곳한 신부와 함께 앉아 있다. 식탁은 비좁고 불빛은 흐리고 신혼의 살림은 빈한하지만, 포도주의 향기와 맛은 잘 익은 우리들의 사랑처럼 황홀하다.
와인은 그런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마시는 것이다. 아니, 내가 부르짖는 ‘귀납적 삶의 방식’에 의하면, 와인을 함께 마시면 사랑하는 사이가 된다. 그러므로 와인의 초보자는 사랑으로 와인의 빈약함을 감싸고, 와인의 중급자는 지식으로 와인의 담론을 풍부하게 하며, 와인의 고급자는 경험으로 대작하는 사람을 즐겁게 한다.
랠프 스테드먼의 <세계 와인 기행>은 와인 고급자의 기호를 만족시켜준다. 칠레에서 남아공, 부르고뉴에서 바스크까지 세계의 개성있는 와인 생산지를 이 유쾌한 영국 작가는 유유자적한다. 그것도 영국 와인회사의 협찬으로! 젠장. 이런 프로그램이야 말로 모든 와인을 마시며 글을 쓰는 자들의 꿈이다. 그러나 랠프 스테드먼은 글 꽤나 쓴다는 작자들을 보기 좋게 한 방 먹인다. 그는 뛰어난 일러스트레이터 이기도 하다. 세계의 와인 생산지를 돌아다니며 보고 느낀 풍광과 인물들을 익살스러운 그림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의 그림들은 모두 취해 있다. 보르도에서는 카베르네 소비뇽과 멜롯의 브랜딩 비율에 맞게, 스페인 리베라 델 두에로에서는 템프라니요처럼 발랄하게, 캘리포니아에서는 개척자의 정신을 내보이는 척 하며. 일러스트와 함께 전개되는 위트 넘치는 그의 글을 읽다 보면, 어느새 나도 취해 버린다. 취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일상과 윤리와 억압의 일탈이다. 취하지 않을 이유가 있을까? 이 좋은 저녁에? 더구나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는데.
‘포도라는 생명체는 정교한 기압계보다 더 민감하게 반응하며, 스스로를 조절해 변화에 순종하는 본능이 있다. 이것이 바로 생명체의 진실이다’ 작가는 포도를 진실한 존재로 파악한다. 아마도 스테드먼에게 포도는 말 잘 듣는 푸들보다 더 친근한 애완물일 것이다. 칠레에서는 45도를 넘나드는 기온을 무릅쓰고 ‘산의 눈물’인 포도를 만드는 사람들에게 찬사를 보내고,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는 흑백차별로 오랫동안 폐쇄적인 국가였던 이 나라를 은근히 비꼬며, 샹파뉴에선 ‘은행털이에 성공한 강도조차 샴페인으로 축배를 든다’며 프랑스 스타일을 찬탄한다.
프랑스 가스코뉴에 갔을 때의 일화를 소개하면서 스테드먼은 이렇게 너스레를 떤다. ‘아무리 프랑스 인이라고 해도 내게 바다의 쓰레기인 굴을 먹일 수는 없을 것이다. 나에게 굴을 먹는 다는 행위는 평소 좋아하지 않는 손님이 철갑으로 만든 만찬용 정장을 차려 입고 왔을 때 저녁으로 이 손님을 잡아먹는 것과도 같다. 그러나 성게는 다르다. 성게를 날것으로 밥 위에 올려놓고 올리브 잎으로 써 먹으면 아주 기가 막히다. 에헴, 보시다시피 나는 음식에 대해서는 도덕적인 입장이 완전히 뒤죽박죽이다’
제멋대로인 이 와인 광을 보라! 아마도 그는 와인으로 혈중 알콜 농도가 0.1 이상인 상태에서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사랑을 나누었을 것이다. 그러나 결코 와인에 대한 지식을 자랑하지 않으며, 섣불리 설명하려고도 하지 않는다. 와인 산지에서 만난, 살아 있는 사람들을 만난 이야기를 들려주고, 살아있는 포도들의 맛을 알려주며, 살아있는 코르크의 숨결에 대해 언급할 뿐이다. 고수일수록, 지루한 설명은 생략하는 법이다. 일찍이 파스 빈더는 갈파했다. ‘덜 사랑할수록 더 권력을 갖는다’고. 와인에 관한 한, 덜 사랑할수록 더 와인에 대해 많이 이야기한다.
스테드먼은 와인에 대해 강의하는 대신 와인 잔에 그 지방의 와인을 가득 따르고 말한다. ‘닥치고 이거나 마시셔~’ 우리는 너무 와인에 대한 지식에 주눅들어 있는 것은 아닐까? 그랑 크뤼의 리스트를 외우고, 좋은 빈티지를 암기하고, 발음도 안 되는 이름 말하기에 쓸 데 없는 에너지를 낭비하는 것은 아닐까? 보르도와 부르고뉴의 빈티지 차트를 외우는 노력이 전혀 무상하지는 않으나, 와인의 향미에 단 한 방울의 페로몬도 첨가해 주지 않았다.
<세계 와인 기행>은 지식보다는 에피소드를, 암기 항목보다는 스토리를, 도메인 상식보다는 그 도메인에 얽힌 옛 이야기를 들려준다. 아마도 이 책의 한 대목을 기억해 두었다가 와인 마시는 자리에서 슬쩍 들려준다면, 부르고뉴의 그 복잡한 밭 이름을 꿰뚫는 사람보다 더 인기를 얻게 될 지도 모른다. 참, 부르고뉴는 그 도메인을 지키기 위해 엄청난 피의 댓가를 치뤘다. 궁금하면 책을 보시라~.
이 책을 번역한 사람은 고형욱이다. 고형욱은 이미 ‘보르도 와인-기다림의 지혜’를 통해 우리에게 보르도 와인 세계를 알려준 바 있다. 그래서 더욱 신뢰가 가는 작가다. 그는 <세계 와인 기행>의 옮긴이를 소개하는 글에 이렇게 썼다. ‘틈만 나면 와인 산지로 여행 떠나기를 즐기고 심심풀이로 청담동에서 와인 바를 경영하면서 책과 레코드에 젖어 산다’......헐. 부럽다. 얼마나 돈을 모아야 스테드먼처럼 세계 와인 산지를 돌아다니고, 고형욱처럼 살 수 있을까? 나도 빨리 돈을 모아서 더 좋은 와인도 마시고, 와인 생산지 견학도 해야겠다.
먼저 탱고의 나라 아르헨티나로 가고 싶다. 오호, 아르헨티나산 시라 와인을 들이켜자 그녀가 이렇게 말한다. ‘너는 이미 부에노스 아이레스에 와 있잖아. 필요한 건 음악뿐이야. 왜 꼭 비행기표를 사서 서른 시간이나 날아가야 한다고 생각하는 거야?’ 그렇다. ‘돈을 모아서 와인이 만들어지는 곳으로 여행을 가야겠다’ 는 생각은 와인을 마시기 이전의 개념이다. ‘와인이 만들어지는 곳으로 일단 여행을 가면, 어떻게든 돈이 생길 것이다’라는 무모함은 와인을 한 병째 비우고 있는 지금의 명제다. 그러므로 이제 나는 <세계 와인 기행>의 마지막 몇 페이지를 남은 와인을 마시며 읽어야 할 것 같다.
[교보문고] 2007년 11월 8일
세상에서 가장 빨리 이곳 [심산스쿨] 홈페이지에 실립니다...^^
하이 로진, 그런데 어제 저녁에 말이야....너만 빼고 [샤또몽벨] 친구들은 모두
위의 책을 번역한 고형욱의 청담동 와인바 [벵쌍]에서
코가 비뚤어지도록 와인을 마셨단다...
아마도 한 서른 병쯤은 마신 거 같다...ㅋㅋㅋ
12월 12일에는 [샤또몽벨 송년모임]을 가지니까 너도 꼭 와!
와인반 친구들이 다들 너를 너무 보고 싶어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