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을 하려면 뉴욕으로 가라
-[세계의 크리에이티브 공장-뉴욕](엘리자베스 커리드/샘앤 파커스) 서평
명로진/인디라이터
동방신기의 세 멤버는 왜 화장품 브랜드를 론칭했을까? 가수 조영남은 왜 그림을 그리고, 배우 황신혜는 왜 속옷을 파는 걸까? 우리는 흔히 ‘한 우물만 파라’는 이야기를 들어왔다. 엘리자베스 커리드는 말한다. "문화 예술인은 두 우물을 파야 한다."
뉴욕에선 직업의 이동이 자유롭고, 동시에 여러 업계에서 활동할 수 있다. 그래픽 디자이너는 음반 디자인을 하는 동시에 클럽 DJ로 일한다. 뮤지션은 영화 배우 겸 패션 디자이너로 활약한다. 영화배우를 영화배우로, 뮤지션을 뮤지션으로만 한정 짓는 것은 이제 무의한 일이 되어버렸다. 뉴욕에서는.
1976년 ‘파리의 심판’ 이라 불리는 와인 블라인드 테이스팅에서 미국와인들이 프랑스 와인을 제치고 1위부터 5위를 석권한 적이 있다. 프랑스 와인 메이커들은 충격을 받았고 미국 와인 관련자들은 “품질의 승리”를 외치며 상품 홍보에 열을 올렸다.
[세계의 크리에이티브 공장-뉴욕]을 읽어 보면 이 블라인드 테이스팅은 아무 의미가 없다는 걸 알게 된다. 마치 샤넬 오리지널 백과 중국산 짝퉁 백을 두고 어떤 것이 더 질긴지 실험한 것과 같다는 것이다. 중국산 짝퉁이 더 견고하다고 해서 오리지널보다 더 좋은 것인가? 저자는 말한다. 노! 사람들은 제품의 성능을 사는 것이 아니라, 제품 속에 녹아든 역사를 사는 것이다.
뉴욕에서 음악과 미술, 패션은 한 몸과 같다. 사람들은 유명 뮤지션의 음악을 들으며 그들의 이름이 붙은 옷을 입고 싶어한다. 그래피티 미술가의 그림을 보면서 그들의 일러스트가 들어간 운동화를 신고 싶어한다. 배우가 나오는 영화를 보면서 동시에 그가 운영하는 레스토랑에서 음식을 먹고 싶어 한다.
힙합의 대부 퍼프 대디는 음반 판매로 고수익을 올린 뒤 재빠르게 의류 브랜드를 선보였다. 그는 당당히 ‘나의 본업은 패션’이라고 말하며 1년에 1억 달러 이상의 매출을 올린다. 뉴욕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힙합 뮤지션들이 음악을 만드는 이유는 단 한가지다. “자신의 이름을 딴 패션 브랜드를 만들기 위해서”.
퓨트라 2000은 1970년대만 해도 뉴욕 지하철에 불법으로 그래피티를 그리며 경찰에 쫓기는 신세였다. 이제 그는 유명 가수들의 앨범 재킷을 디자인하고 다국적 스포츠 기업의 후원을 받아 일러스트를 파는 거물이 됐다. 패리스 힐튼이 망나니 짓을 하면서도 끝없이 미디어에 등장하는 이유는, 많은 사람들이 그녀처럼 살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무엇이 이런 문화 예술의 발전을 가능하게 하는가? 그것은 열린 마음과 후원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예술을 하는 사람들은 늘 가난했다. 뉴욕은 2차 대전 이전까지는 금융의 중심지였다. 돈이 넘쳐났다. 2차 대전이 일어나자, 파리와 유럽에서 활동하던 음악가, 미술가, 작가들이 뉴욕으로 대거 이주해 왔다. 뉴욕은 이들에게 값싼 숙소와 든든한 후원을 제공했다.
뉴욕의 부자들은 가난한 예술가들의 스폰서가 되는 것이, 단지 ‘돈이 많다’고 자랑하는 것 보다 더 큰 우월감을 선사한다는 것을 알게 됐다. 특히, 무명이지만 떠오르는 문화 예술계 인재들을 알아보고 아낌없이 지원해 주는데 인색하지 않았다. 그 전통은 오늘까지 이어진다.
대표적인 패션 후원그룹 젠아트의 창업주 이안 제라드는 “알렉산더 플로코브, 레베카 테일러, 차이켄 등 오늘날 성공 가도를 달리는 디자이너들을 발탁했다는 것이 우리의 성과”라고 말한다. 부자들의 후원은 이익이 되는 장사였다. 처음에 자본의 뒷바라지를 받았던 패션 디자이너, 가수, 미술가, 배우들은 유명 인사가 되어 자본에 보답했다. 부자들이 여는 잔치에 초대받았던 예술인들은 이제 먼저 파티를 열고 초대 리스트에 올릴 부자들을 고른다. 갑자기 한 여배우를 자살로 몰고 가게 한 우리나라의 찌질이 매니저와 쪼잔한 후원자와 철면피 자본가들이 떠 오른다. 너희들은 죽어도 뉴요커가 못 될 거야!
뉴욕의 장점은 무엇일까? 다른 선진국의 대도시와 달리, 서로 다른 영역의 중심지들이 한 곳에 몰려 있다는 것이다. LA에서 차를 타고 다녀야 볼 수 있는 박물관, 패션몰, 극장, 증권사들이 뉴욕에서는 걸어서 다닐 수 있는 거리 안에 집중 되어 있다. 때문에 점심 시간에 화이트 셔츠의 회계사와 문신을 새긴 미술가가 나란히 초밥을 먹곤 한다.
이곳에선 서로 다른 종류의 문화가 퓨전의 양상으로 엉킨다.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서 샤넬 전시회가 열리고, 구겐하임 미술관을 조르지오 아르마니에게 임대하며, 소호에서 미술계 핵심 전시인 다이치 프로젝트가 실행된다.
문화 예술계가 뉴욕에 미치는 영향은 막대하다. 문화 예술계 관련 종사자는 뉴욕에서 금융업 다음으로 많다. 창조적인 직종이 도시에 실질적인 일자리와 수입을 제공하고 경제를 이끄는 원동력이 되는 것이다. 뉴욕의 직업별 경쟁 우위를 나타내는 수치를 보면, 문화 예술계는 독보적이다. 한마디로 ‘말은 제주도로 보내고, 예술가는 뉴욕으로 가라’는 게 저자의 주장이다.
커리드는 말한다. "1970년대 세계 경제 침체기 때는 어느 도시나 다 어려웠다. 뉴욕이 이 시기를 이겨내고 세계 경제의 선두주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도시를 재창조할 수 있는 능력 때문이었다. 그 능력은 긴밀한 문화 공동체에서 나왔다. 작가에서 디자이너, 영화 프로듀서에 이르는 문화인들은 경제적 부침 속에서 명맥을 이어가며 뉴욕에 활기를 불어넣었다."
뉴욕의 미술가, 가수, 배우, 패션 디자이너 등 예술가들은 큐레이터, 후원자, 미디어 관련자, 그냥 돈 많은 언니 오빠 들과 어울려 자주 파티를 열었다. 대표적인 것이 1960년대를 풍미했던 앤디 워홀의 팩토리였다. 팩토리는 말 그대로 문화 예술 관계자들의 공장이었다. 팩토리에서 문화 예술인들은 대마초를 피우며 노래 가사를 썼고, 와인을 마시며 멜로디를 떠 올렸으며, 춤을 추면서 다음 시즌 패션 테마를 생각해 냈다.
방송인 스티브 파워스는 이렇게 말한다. “문화 예술계의 중대한 거래는 기업 중역실이 아니라 댄스 플로어에서 이뤄진다.” 저자는 문화 선진국 미국의 예술계에서 성공하려면 ‘인맥’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물론 그 인맥이 유지되는 것은, 문화 예술인들이 지치지 않고 꾸준히 뚜렷한 예술적 성과물을 만들어내는 한도 내에서다.
나는 이 책을 읽고 뉴욕에 가고 싶어 졌다. 그곳에 가서 다양한 인종의 문화 예술인들과 어울리고 싶어졌다. 아니, 생각해 보니 내가 살고 있는 홍대 앞이 바로 한국의 뉴욕이다. 매일 밤, 클럽에 미술가와 연예인과 가수들이 모인다. 그들을 모아서 한국판 팩토리를 만들어 볼까 생각 중이다. 그런데, 후원자는 어떻게 모은담? 어느 누가 싹수만 겨우 보이는 이 예비 예술가들을 위해 돈을 풀어줄까? 한 4천만 땡겨주면 좋을텐데...
[교보문고 북모닝 CEO 20090824]
미국 와인이 1위부터 5위까지를 싹쓸이했다...는 것은 사실과 다르다
저자가 그렇게 써놨디? 짜식들, 공부 좀 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