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심산 등록일: 2017-07-12 19:14:29 IP ADRESS: *.139.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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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 너머 산들이 아득하여라

한국산서회와 함께 하는 인문산행

5회 정선 경교명승첩의 현장을 찾아서

 

/심산(한국산서회)

사진/송석호(한국산서회)

 

이제 우리나라의 기후는 아열대에 속한다고 보는 것이 옳을 듯하다. 201771() 아침 10시 지하철 9호선 [양천향교역] 1번 출구 앞. 7월의 첫날인데도 한여름 복날 더위를 방불케하는 날씨다. 그토록 기다리던 장마가 코앞으로 다가왔는지 공기 중의 습도가 매우 높아 후텁지근하다. 참가자들의 도착 여부를 확인하고는 재빨리 발걸음을 떼어놓는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던가. 등산은 뒤로 미루고 일단 에어컨이 씽씽 돌아가는 건물 안으로 쫓기듯 들어선다. 바로 궁산 아래 위치한 겸재정선미술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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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재 정선이 마지막 예술혼을 불태운 곳은 양천의 궁산 자락

 

돌이켜 보면 동서고금을 통틀어 겸재 정선만큼 당대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던 예술가는 따로 없었던 듯하다. 당대의 세도가 장동김문이 그를 후원했고 임금인 영조 또한 조정의 질투를 받을 만큼 그를 총애했다. 그가 인생의 황혼기에 이른 65(1740, 영조 16)부터 70(1745, 영조 21)까지 이곳 양천의 현령으로 지냈던 것 역시 이곳의 아름다운 풍광들을 그려서 보여달라는 영조의 의지와 배려 덕분이 아닌가 한다.

겸재 정선이 사천 이병연과 시화환상간(詩畵換相看, 시와 그림을 서로 바꾸어 보다)의 약속을 지키기 위하여 그린 후기의 걸작들을 모은 것이 바로 [경교명승첩(京郊名勝帖)](33, 간송미술관 소장)이다. 한국산서회와 함께 하는 인문산행의 제5회 주제는 경교명습첩의 현장을 찾아서이다. 이 화첩이 소중한 것은 우리가 이를 통하여 18세기 중엽의 한강과 그 주변 산들의 풍광을 소상히 들여다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 행복한 답사를 위한 사전 공부로는 겸재정선미술관을 찬찬히 둘러보는 것보다 더 나은 길이 없다.

겸재정선미술관에서 자원봉사자로 일하고 계신 해설사 김윤성 님이 일행을 반갑게 맞아주신다. 지난 번 사전답사 때에도 느낀 바이지만 이분의 해설은 자못 상세하고 열정적이다. 양천의 역사와 정선의 생애 그리고 그의 예술세계에 대한 간략한 해설들이 길게 이어진다. 오늘 보게 될 풍경들을 겸재의 그림 속에서 미리 확인해보는 것은 또 하나의 작은 즐거움이다. 다만 설명이 길어지니 일부 참가자들은 몸을 뒤틀기 시작한다. 인문학과 산행 중에서 어디에 경중을 두는가는 인문산행의 영원한 딜렘마라 할 수 있다. 이제 미술관을 나서 궁산으로 오르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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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남정맥의 끝자락에 솟아난 작은 야산

  

전국의 산들을 꽤나 쏘다녔다는 산꾼들에게도 궁산(宮山)이라는 산명은 낯설다. 그도 그럴 것이 고작해야 해발 74미터에 불과한 동네 야산에 불과한 것이다. 아마도 인문산행이라는 개념이 없었더라면 그 존재 자체도 몰랐을 법한 산이다. 하지만 어떤 산의 가치는 그 해발고도와는 무관하다. 높고 큰 산만 아니라 낮고 작은 산도 제 나름의 존재가치를 지닌다. 이 산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찾게 만든 것은 오롯이 겸재 정선의 덕이다.

안산 수리산에까지 와 닿은 한남정맥이 북행(北行)을 계속하여 증산(甑山)을 이룬 다음 한강변에 이르러 낮아지는데, 서쪽으로는 개화산(開花山), 동쪽으로는 탑산 쥐산 선유봉 등과 더불어 강변 야산의 절경을 이룬 산이 궁산이다. 이 산에는 이명(異名)도 많다. 삼국시대에 이 지역에 붙여진 최초의 이름이 재차파의(齊次巴衣)인데, ‘제사 드리는 바위라는 뜻으로, 차후 설명할 공암(허가바위)에서 연유되었다. 덕분에 이 산을 파산(巴山)이라고도 한다.

성산(城山)은 이곳에 양천고성이 있기 때문이고, 진산(鎭山)은 이 산에 양천고을의 관방설비가 되어 있기 때문이며, 관산(關山)에서 빗장 관()자를 쓴 것은 이 산이 맞은 편의 행주산성과 더불어 한강을 지키는 빗장 구실을 했기 때문이다. 궁산의 궁()은 이 산 아래 양천향교가 있어 그곳에 모신 공자에 대한 숭배의 표시로 붙인 것이다. 한 고을의 진산이며 제사 지내는 바위가 있고 공자를 모셨으며 한강을 지키는 빗장의 구실을 하였으니 이 어찌 한낱 동네 뒷산이라고 폄하할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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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과 그 너머로 펼쳐지는 산들의 파노라마

 

현재 궁산은 궁산근린공원으로 지정되어 관리되고 있다. 어느 들머리를 택해도 정상까지 반 시간이면 충분히 올라갈 수 있다. 후텁지근한 날씨에도 불구하고 이마에 땀방울이 송글송글 맺히기도 전에 정상이 불현듯 다가온다. 정상에 오르자 참가자들이 모두 약속이나 한 듯 탄성을 내지른다. 발 아래로는 푸르른 한강이 넘실대고 그 너머로는 아름다운 서울의 산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져 있는 것이다.

궁산에 오르면 이곳이 왜 그 낮은 해발고도에도 불구하고 역대 전쟁사에서 전략적 요충지 역할을 했는지를 한눈에 확인할 수 있다. 바로 건너편에 덕양산([德陽山, 125미터)의 행주산성이 보인다. 임진왜란 당시 전라창의사 김천일, 강화의병장 우성전 등이 의병들을 이끌고 이 산 위에 진을 치고 있다가 한강을 건너 저 곳으로 나아갔다. 그들은 그곳에서 권율장군을 도와 행주대첩을 대승으로 이끄니 바로 임진왜란의 전세를 역전시킨 쾌거였다.

현재 남아있는 양천고성의 옛터는 매우 보잘 것 없다. 하지만 이곳은 예로부터 건너편의 행주산성 그리고 파주의 오두산성과 더불어 한강 하구를 지키던 최고의 요새 역할을 했다. 일제 강점기에는 김포 군용비행장 개설공사 때문에 일본군이 주둔하기도 하였고, 한국전쟁 때는 미군에 이어 국군이 수년 전까지도 계속 주둔하였던 관계로 정상 부근의 원형은 심하게 훼손되어 있다. 대신 거의 평지에 가까운 풀밭을 이룬 까닭에 인근 동네 사람들의 가벼운 피크닉 장소로 애용되고 있다.

겸재 정선은 양천 현령으로 재임하던 기간 동안 거의 매일 이 산에 올랐다고 한다. [경교명승첩]을 펼치면 이곳에서 바라본 18세기의 풍경들이 거짓말처럼 되살아난다. 그들 중 이른바 파릉팔경 그러니까 양천팔경을 꼽아보면 다음과 같다. 소악루의 맑은 바람(岳樓淸風), 양화강 고기잡이배의 불(楊江漁火), 목멱산의 해돋이(木覓朝暾), 계양산의 낙조(桂陽落照), 행주로 돌아오는 고기잡이배(杏州歸帆), 개화산의 저녁봉화(開花夕烽), 겨울 저녁 산사에서 들려오는 종소리(寒山暮鍾), 안양천의 졸고 있는 갈매기(二水鷗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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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악루에서 달 뜨기를 기다리던 풍류

 

1994년에 복원된 소악루(小岳樓)는 궁산 정상과 지척의 거리에 있다. 예로부터 이곳 궁산의 한강변은 절경으로 유명하여 중국 동정호의 악양루(岳陽樓)에서 바라보는 경치에 버금간다고 하였다. 그래서 우리의 선조들은 아예 이곳에 누각을 짓고 악양루라고 불렀다. 기록에 의하면 이 산에는 악양루 말고도 춘초정, 막여정, 춘산와, 제일정 등의 누정들이 즐비했다고 한다. 영조 때의 문신인 이유는 관직에서 물러난 뒤 이곳으로 와서 과거 악양루가 있던 자리에 새로 누정을 조성하고 소악루라고 이름 붙였다. 겸재가 양천 현령으로 부임한 것은 그로부터 겨우 2~3년 후의 일이다.

복원된 소악루의 풍광은 근사하나 현판은 그렇지 못하다. 이왕 복원할 거면 현판 글씨도 좀 제대로 된 것을 썼으면 좋았겠다고 참가자들이 입을 모은다. 이곳에서 점심식사를 한다. 한국산서회에서 미리 얼려온 수박이 큰 인기다. 한국산서회의 고문인 박계수 시인이 흥에 겨워 자작시를 낭송한다. 제목은 [짝사랑하는 산]으로 센티멘탈한 느낌인데 내용은 그렇지 않다. 박무택 박영석 지현옥 등 산에 올랐다가 내려오지 않은 옛산벗들에 대한 그리움을 토로한 시다. 그들은 설산에 묻혀 있는데 우리는 한강변의 정자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다.

소악루에는 정선의 그림 두 점이 복제 진열되어 있다. 이곳에서 바라본 안산의 저녁봉화(鞍峴夕烽)와 소악루에서 달 뜨기를 기다림(小岳後月)이다. 참가자들은 그림 속에 표현된 산과 봉우리들을 눈 앞의 풍경 속에서 하나 하나 짚어본다. 공암, 탑산, 선유봉, 목멱산(남산), 금성산(난지도 앞), 와우산, 잠두봉(절두산), 안산 등이 지금도 여전히 그 자리에 있다. 인간은 왔다 가지만 산천은 그대로 있다는 사실이 역설적으로 묘한 안도감을 안겨준다. 산천은 의구하되 인걸만 간데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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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은 바위 동굴 속에서 시작되었다

 

이제 궁산에서 한강변으로 내려온다. 궁산근린공원 둘레길이다. 후텁지근한 강바람을 맞으며 잠시 걸으니 곧 허가바위로 가는 길을 알리는 표지판이 등장한다. 허가(許家)바위와 구멍바위와 공암(孔巖)은 모두 같은 곳을 가리키는 지명이다. 지금은 한강에서 약간 떨어져 있지만 1970년대까지만 해도 이곳은 강물과 맞닿은 백사장에 붙어있었다. 그러던 곳이 올림픽대로를 건설하면서 매립하는 바람에 당시의 원형을 잃어버린 것이다. 아마득한 옛날 석기시대의 선조들이 한강에서 조개와 물고기를 잡으며 이곳에 모여 살았으리라 짐작되는 혈거동굴이다.

이 동굴이 역사에 등장하는 것은 나말려초의 시기이다. 당시 왕건이 견훤을 치러가면서 이곳을 통과할 때 도강(渡江)의 편의와 군량미 등을 제공한 노인이 있었다. 왕건은 이 노인의 공로를 높이 사서 그에게 공암촌주(孔巖村主)라는 벼슬(?)을 내린다. 그가 바로 양천허씨의 시조로 꼽히는 허선문이다. 현재 이곳에는 공암바위라고 새겨진 기념비가 서 있는데, ‘양천허씨 시조 고려개국공신 공암촌주 유적지라고 병기된 것은 그 때문이다.

양천허씨는 공암허씨라고도 부르며 [동의보감]의 허준과 [홍길동전]의 허균 등 자손들이 매우 번성하였다. 심지어 시조인 허선문이 태어난 곳도, 허준이 [동의보감]을 서술한 곳도 모두 이 동굴 안이라고 하니 허가바위라는 명칭이 붙을 만도 하다. 뒤늦게 합류한 인문산행팀의 고문 심우경 교수가 흥미로운 해설을 덧붙인다. 공암은 공알을 점잖게 일컫는 표현인데, 어머니의 자궁처럼 아늑하고 편안한 곳이며, 허준이 그와 같은 명저를 저술한 것도 이 강인하고 맑은 바위의 기()를 받아서라고 한다.

허가바위에서 멀지 않은 곳에 광주(廣州)바위가 있다. 본래의 이름은 광제(廣濟)바위가 아니었을까 싶다. 너른 나루에 있는 바위라는 뜻이다. 공암과 이 바위를 한 화폭 안에 구현한 것이 저 유명한 겸재의 [공암층탑](孔巖層塔)이다. 이 바위들을 거느렸던 산이 탑산(塔山, 31미터)인데, 산 중턱에 탑이 솟아있어 그렇게 불렀다. 겸재 그림 속의 광제바위는 한강 위에 떠 있어 절경을 자랑하는데 이 역시 현재에는 매몰되어 땅 위로 올라와 있다. 우리는 겸재보다 편리한 시대에 살고 있지만 그가 보았던 절경을 다시 볼 수는 없는 것이다.


월간 [산] 2017년 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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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회 인문산행 안내

 

주제> 관악산 자하동천을 찾아서

일시> 201785() 오전 10

장소> 과천정부청사역 11번 출구 앞

코스> 과천향교~연주암~연주대~문원폭포~마애승용군

신청> 2017731()부터 다음카페 한국산서회(http://cafe.daum.net/peakbook) 게시판을 통하여 신청

 

과천정부청사역으로 원점회귀 산행을 합니다

관악산 정상까지 올라가는 산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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