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칠 수 없을 때까지 고쳐쓴다
브루스 조엘 루빈(Bruce Joel Rubin, 1943- )
당신이 세 번 고친 시나리오를 감독이 찢어발겼다고? 당신이 다섯 번 고친 시나리오를 제작자가 쓰레기통으로 던졌다고? 행여라도 브루스 조엘 루빈을 만난다면 아무 말 하지 않는 것이 좋다. 그는 [사랑과 영혼]의 피칭(시나리오의 내용을 3~4분 안에 말로 설명하는 것)을 위해 할리우드의 거의 모든 영화사를 돌아다니며 약장사 노릇을 했고, 열다섯 번 이상 고쳐쓴 상태에서 초고 계약을 맺었으며, 다시 감독이 나타나기를 기다리면서 꼬박 일년 동안 고쳐썼다. 그리고 드디어 제리 주커가 감독으로 낙점되자 다시 열아홉 번을 고쳐써서 시나리오를 완성했다. 끔찍하게 들리겠지만 사실 이 정도는 약과다. 완성도 높은 할리우드 시나리오들은 대개 이런 지옥체험 끝에 탄생된다.
루빈이 뉴욕대학에서 영화를 공부할 때 동기생들이 브라이언 드 팔머나 마틴 스콜시즈였다는 사실을 상기하면 그가 걸어온 가시밭길이 너무도 아득해 보인다. 남들은 이미 미국을 대표하는 감독으로 우뚝 섰는데 대학을 졸업한 지 20년이 다 되도록 시나리오 한 편 팔아보지 못했다면 죽고만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냉정하게 따져본다면 이것 역시 일반적인 현상이다. 죽을 때까지 단 한 편의 시나리오도 영화로 만들어보지 못한 시나리오 작가(지망생)가 훨씬 더 많다. 루빈이 할리우드에 판 첫 시나리오는 [브레인스톰]이었는데 그는 시사회를 보고 절망에 빠진다. 너무도 많은 작가가 고치고 또 고쳐서 그의 오리지널 시나리오가 걸레조각이 되어 있었던 것. 하긴 그가 쓴 대사들이 단 한 줄도 남아있지 않았다고 하니 자기환멸에 빠질 만도 하다.
[img2]그러나 [브레인스톰]은 그의 작가인생에서 커다란 전환점이 된다. 영화 때문이 아니라 시사회장에서 만난 동기생 브라이언 드 팔머 때문이다. 팔머는 루빈에게 시나리오 작가로 살아남으려면 아예 할리우드로 이사를 와서 끝장을 보라는 격려 반 협박 반의 충고를 했다. 루빈은 일리노이에 있던 집을 처분하고 할리우드 변두리의 월셋방으로 거처를 옮긴다. 아내와 두 아이까지 딸린 40대 가장이 오직 시나리오를 쓰겠다는 목표 하나만을 갖고 무작정 할리우드로 쳐들어가는 모습을 상상해보라. 가슴이 답답해진다. 그에게 할리우드는 약속의 땅이 아니라 생존의 벼랑 끝이었다. 그 벼랑 끝에서 루빈은 혼신의 힘을 다하여 시나리오에 매달린다.
루빈은 할리우드에 [야곱의 사다리]로 자신의 작가적 역량을 알리지만, 이 빼어난 시나리오는 너무도 음울한 내용을 다루고 있다는 이유로 오랫동안 제작이 보류된다. 오죽했으면 ‘할리우드에서 영화로 만들지 않은 최고의 시나리오’로 꼽혀 《아메리칸 필름 매거진》에 게재까지 됐겠는가? 그 작품이 영화로 만들어진 것은 전세계적 대박을 터뜨리면서 루빈에게 아카데미 트로피를 안긴 [사랑과 영혼]의 여진 덕분이다. 이 두 작품을 나란히 극장에 붙인 1990년은 루빈 생애 최고의 해였다. 그가 오랜 세월 동안 벌여왔던 눈물겨운 사투를 떠올리면 기립박수라도 보내고 싶은 심정이다.
루빈의 작품에서는 고난을 뚫고 나온 휴머니즘이 돋보인다. 유일하게 감독을 한 [마이 라이프]를 보면 생생이 느낄 수 있듯 그는 ‘인간’에 무한한 애정을 품고 있는 작가이다. [딥 임팩트]가 같은 소재를 다루고 있는 [아마겟돈>]1998)보다 나은 점이 있다면 아마도 그 안에 고난받는 인간 군상이 있고 그들을 보는 작가의 따스한 시선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성공의 속도나 스펙터클의 규모가 아니다. 루빈은 말한다. “중요한 것은 자기 영혼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태도입니다. 나는 피상적인 글쓰기를 증오합니다. 내게서 글쓰기란 내면의 목소리가 선사하는 영적 체험을 관객들과 공유하려는 시도입니다. 그것이 결핍되어 있다면 모두 호사스러운 시간낭비에 불과합니다.”
[img3]시나리오 필모그래피
1983년 더글러스 트럼벌의 [브레인스톰](Brainstorm)
로버트 댈버의 [흑마 돌아오다](Black Stallion Returns)
1986년 웨스 크레이본의 [데들리 프렌드](Deadly Friend)
1990년 제리 주커의 [사랑과 영혼](Ghost)ⓥ★★
애드리언 라인의 [야곱의 사다리](Jacob's Ladder)ⓥ
1991년 대미언 해리스의 [행복했던 여자](Deceived)ⓥ
조셉 루벤의 [적과의 동침](Sleeping with the Enemy)ⓥ
1993년 브루스 조엘 루빈의 [마이 라이프](My Life)ⓥ
1998년 미미 레더의 [딥 임팩트](Deep Impact)ⓥ
ⓥ는 비디오 출시작
★★는 아카데미 각본(색)상 수상작
[씨네21] 2000년 5월 16일